219화 생명의 숲 (1)
“뭐, 뭐야? 네가 어떻게 배리어를? 아니, 그것보다 번개라고?”
“잊으셨어요, 형님? 함께 드래곤을 레이드했을 때 뭐가 나왔었는지?”
“그럼 그 미완성 스킬북인가 했던 게 설마……?”
“네, 맞습니다. 일루전이 400레벨 달성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마련해 뒀더라고요. 타 직업의 스킬 하나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그런데 왜 하필 라이트닝을? ……그렇군. 맞아, 어쩌면 네겐 정말 최고의 스킬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왜 이 스킬을 선택했는지, 카이저 형님은 한눈에 알아차린 듯싶었다.
하긴 마검사 직업의 랭킹 1위이자 정석 테크트리를 개척한 당사자이니, 스킬 이해도가 남다른 건 당연했다.
“아무튼, 하던 것부터 마저 끝내볼까? 날 상대로 배리어라……. 갑자기 결투는 왜 청하나 싶더니만, 역시 깜찍한 자식이구나.”
“하핫! 그냥 형님이 타연 최강자시니까 붙어보는 겁니다. 만약 형님한테 통한다면, 제가 스킬을 제대로 골랐다는 뜻이니까요!”
“잔말 말고 와라! 어쩐지 뭔가 좀 어설프다 싶었다.”
그 말이 끝나자, 형님을 감싸던 화염 배리어가 격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차 불덩이가 커지더니, 한순간 폭발하듯 내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불바다로 만들었다.
파이어 배리어와 연계되어 증폭되는 광역 스킬로 유명한, 마검사의 ‘파이어 스톰’이었다.
화르륵! 펑!
[마나 쉴드가 5,556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광역이라 피할 수 없던 공격.
하지만 마법 방어력이 워낙 높은 내게는, 아무리 간판급 스킬이라 해도 신창의 물리 데미지보다는 적게 들어왔다.
한차례 마법 공격을 쏘아낸 후 다시 얼음 배리어를 생성한 형님.
그런 형님에게 다가가자,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무빙하며 내가 거리를 좁히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쿨타임이 길어 자주 사용하지 못하지만, 지속시간 동안에는 도둑을 압도하는 속도를 내게 해주는 자버프.
바로 ‘헤이스트’였다.
‘확실히 테네시 단검 하나 정도는 들고 있어야 해!’
당당이에게 넘겨준 게 후회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거리 계산이 철저한 상대는 오랜만이라, 원딜의 부재가 아쉽게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계속 그렇게 도망만 다니실 거예요?”
“자칫 공격했다가 괜히 확정 디버프에 당하라고? 어차피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완 달리 넌 체력이 줄줄 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확실히 스킬 이해도가 높아서 그런지, 첫 전투인데도 내 약점을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쿨타임이 돌아온 고유의 이동기가 있었다.
[그림자 밟기!]
팟!
형님 뒤로 순간 이동하자마자 휘두른 공격.
그 검을 따라 내 주변을 수놓고 있던 8개의 뇌전 줄기가, 마치 뱀처럼 얼음 배리어를 타고 넘어갔다.
[2초간 빙결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얼음 배리어를 친 덕분에 나 또한 디버프에 걸려 느려졌지만…….
[급소 공격!]
내게는 한번 맞추기만 하면, 무려 8번의 경직에 빠지게 만드는 비장의 스킬이 남아있었다.
“윽! 이거 뭐야!”
퍽! 퍽! 퍽! 퍽!
연속으로 휘둘러지는 공격마다 경직으로 움찔대는 형님.
내 막강한 공격력을 버티지 못하고, 얼음 배리어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지지직!
그리고 동시에…….
계속 멈칫대는 형님에게 쏘아지던 뇌전 줄기로부터, 마침내 디버프 효과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크윽!”
상태 이상 ‘감전’.
화염은 화상을, 얼음은 빙결을 유발시키는 것처럼, 번개 속성 고유의 디버프 효과.
비록 0.5초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감전이 발동되면 마치 스턴에 걸린 것처럼 이동 정지 및 모션 캔슬, 공격 불가 등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뇌전 줄기의 공격 속도는 대략 2초에 한 번으로, 사정 범위 안의 공격 대상을 랜덤 타겟팅으로 공격한다.
그 말인즉슨, 지금같이 일대일 상황에서는 뇌전 공격이 오롯이 한 명한테만 집중된다는 뜻이었다.
[연속 베기!]
[매직 미사일!]
발동 확률 10%의 뇌전 줄기가 총 8개!
단순 계산으로 2초마다 80%의 확률로 터지는 감전 디버프에, 형님은 급소 공격의 모든 공격이 끝났는데도 꼼짝을 못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스킬을 사용해 빠져나가려 들자, 매직 미사일까지 날려 경직 효과를 추가로 얹어주었다.
“타, 타임!”
“네?”
한창 정확한 타이밍에 집중하며 스킬 연계를 넣고 있었는데, 형님이 들고 계시던 창의 무장을 해제했다.
완전히 공격 의사를 저버린 모습.
그에 나 또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겠다고, 그만! 드로 너 이 자식…… 아주 괴물이 돼버렸구나!”
“하핫! 좀 괜찮은 거 같아요?”
“그걸 말이라고?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널 상대할 수 없겠는데? 공격하는 즉시 확정 감전에 걸려버릴 테니, 거리를 유지한 채 마법으로만 상대하려 했는데…… 하필 도둑이라 그것도 불가능하잖아!”
“에이, 형님한테도 비장의 스킬이 있는 거로 아는데요. 이번에 그걸 어떻게 쓰시는지 구경 좀 해보나 했는데 아끼시네요?”
“그걸 쓰고도 이 꼴을 당할까 봐 그만뒀다. 정말 오랜만에 피가 뜨거워지는 결투였는데, 네 배리어를 보고는 전의가 팍 식어버렸어.”
허탈한 웃음을 지으시는 형님.
비록 끝까지 전력을 다하신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타연 최강자 중 하나이자 7신기를 보유한 유저.
그를 상대로 내 새로운 스킬이, 확실히 먹힌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 * *
“지환아, 계속 그러고만 있을 거냐? 길드원들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데…… 빨리 좀 여쭤봐!”
우리의 전투를 가만히 지켜만 보던 현중이가, 잠시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스킬을 익힌 게 간만이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잠시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형님……. 현중이 말대로 몇 가지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형님께서는 뭐 새롭게 알게 되신 게 있으세요?”
“아쉽지만 없다. 도네타의 안식처 이후로 나도 단서를 찾아다녀 봤지만, 확실히 레벨업이 최우선인 것 같아 요즘은 사냥에만 집중하고 있었지.”
“좀 전에 말씀하셨던 시네마틱 영상이란 건 뭐였어요?”
“그건 천계나 마계와 상관없는 퀘스트였다. 자세히 설명하기엔 복잡한데, 그냥 제국 황제와 연관된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럼, 저희가 알게 된 것들에 관해 말씀드려 볼게요.”
그렇게 형님에게 주나스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드렸다.
그러자 언제 전투했냐는 듯이, 형님은 곧바로 내 말에 집중하며 빠져들었다.
‘이런 게 형님의 진면목이기도 하지.’
퀘스트 킬러이자 타연 콘텐츠의 최다 포식자.
막대한 길드원들을 거느린 다리우스나 지옥불 형님과 쭉 경쟁해왔지만, 카이저 형님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뒤처지기는커녕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집중력도 집중력이지만, 애초에 이런 플레이를 가장 즐기는 유저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어떠세요? 모르시던 내용들을 제법 많이 알아냈죠?”
“흠…… 엘프와 세계수가 있는 생명의 숲이라……. 확실히 천계나 마계는 곧바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군. 이렇게 깨야 할 선행 퀘스트가 여러 개나 존재하는 걸 보니…….”
“혹시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으세요? 저희 길드원들 전원 다, 지금도 타연 구석구석을 뒤져보고 있는데 찾질 못하고 있어요. 그 숲이 어디고, 어떻게 가는지를요.”
분명 내가 받은 ‘천계를 향하여’라는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는 B등급에 불과했다.
클리어 조건에 적혀있는 ‘메치아실’이라는 엘프를 만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뜻.
하지만 이 평범한 퀘스트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조금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응? 하긴…… 너희라면 충분히 모를 만도 하겠군. 아니, 이건 나라서 쉬운 일이려나? 아직 미오픈 지역으로 남아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번 업데이트 후에 풀리는 곳 중 하나였나 보구나.”
“네? 뭐 아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럼! 더 시간 낭비하기 전에 찾아와서 다행이다. 너, 그리고 버닝스타 길드로는 한참을 뒤져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아무리 대탐험시대가 있더라도!”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왜요?”
“생명의 숲. 그곳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려면 제국의 NPC들부터 만나봐야 한다. 지난 퀘스트나 원로원장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보면, 거긴 분명 제국 국경 너머에 있는 것 같구나.”
“네? 제국이요? 아하, 그래서……! 근데 방금 국경 너머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플레이하고 있는 테론 대륙.
타이탄 연대기 속에는 일명 중앙 대륙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말고도 다른 미지의 대륙이 두 개 더 존재하고 있다.
이미 타이탄 에이지라는 전작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었고, 인게임 내에서도 NPC들에게 언급되는 곳이라 유저라면 다들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그건 일루전이 이 게임을 향후 몇십 년은 우려먹기 위해 던져놓은 떡밥과도 같은 것.
당장 그곳들이 업데이트되거나 필드로 오픈될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아직 우리가 있는 이 테론 대륙만 해도, 밝혀지지 않은 미개척 지역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맞아. 제국 반대편인 동부 지역도 그런 곳 중 하나였지!’
대륙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데스라 사막을 기점으로, 대륙은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눠진다.
우리가 치열하게 공성전을 하며 영토 전쟁을 하는 곳은 주로 서부 지역으로, 노스랜드도 여기 속해 있었다.
반면 동부의 북쪽은 하늘 산맥이 길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온전히 제국의 영토였다.
공간이동술사 덕분에 유저들은 대륙 전역을 쉽게 오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동부 지역을 제대로 탐사해보지도 못했다.
제국군들이 통행금지라는 명목으로 제한하고, 국경 너머에는 유저들이 갈 수 없는 미오픈 지역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정확히는 제국의 동북부 끝, 하늘 산맥과 맞닿아 있는 국경지대가 의심된다. 북부 야만족들이 쳐들어오는 곳으로 알려진, 진입 불가 지역 데미지에 막혀 갈 수 없던 지역이지.”
“혹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제국 깊숙한 곳까지 가는 일은, 저희로서도 모험이니까요.”
“제국의 동쪽과 남쪽 끝은 결국 바다와 맞닿아 있다. 차후 신대륙과 연관된 지역이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은 북쪽 국경이 유력해 보일 수밖에. 그중 숲이 있을 만한 곳은…… 산맥과 맞닿아 있는 그곳뿐이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확실히 제국 깊숙한 곳이었다면, 저희가 왜 단서도 못 찾고 있었는지 납득이 가네요!”
“한데 드로야, 거기까지 가는 건 너희만으로는 힘들 거다.”
“네?”
“제국군과 마주치면 선공당하는 몸으로, 제국의 국경을 뚫을 수 있을 것 같냐? 아무리 비행 탈 것이 있어도, 훼라리라면 모를까 나머지는 힘들다. 도시나 마을 안보다, 오히려 국경 부근에 제국의 정예들이 훨씬 더 많거든. 아마 오스타그 황궁을 뚫는 난이도와 비슷할 거다. 그러니 그들을 뚫고 숲에 다다르는 건, 상당히 위험할 거다.”
“이런…….”
혼자라면 그냥 불도저처럼 도전이라도 해볼 텐데, 이번 퀘스트는 하필 연계 퀘스트였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아무래도 전원이 시작부터 함께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국 귀족들을 죽이지 말 걸 그랬나? 업적 하나 얻자고 너무 제약이 많아진 게 아닌가 싶네……. 제국군과 전투하다 보면 유저들 눈에도 띌 텐데, 어떡하지?’
하지만 내 이런 고민이 무색할 만큼, 카이저 형님은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셨다.
“일단 형만 믿고 길드원들 전부 소집해라. 국경 따위는 내가 얼마든지 통과시켜줄 테니까.”
“네? 그러실 수 있겠어요?”
“그럼. 내가 누구냐? 바로 제국의 사령관이 아니냐?”
문득 형님의 머리 위에 있는 수식어.
‘제국 8군단 사령관’이라는 칭호가 유달리 간지나게 보였다.
* * *
[산드로: 다들 준비되셨으면 공간이동술사 타세요!]
[축복받은무빙: 그래. 얼른 가자! 빨리 끝내야 자지, 벌써 자정이 넘었다!]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날이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 길드원들은, 단 한 사람도 로그아웃하지 않고 전부 성안으로 집결했다.
‘타연러라면…… 아니 어떤 게임의 유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잠들 수 없는 법이지.’
무려 미개척 지역을 탐험하는 일.
아무런 정보도 없는 퀘스트와 필드를 찾아가는 일을, 내일로 미룰 유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헤비 유저라면 더더욱!
[산드로: 다들 절 따라오세요!]
그렇게 우리는 제국과 국경을 맞댄 로젠타스 성의 테라 마을로 공간이동한 후, 각기 은신을 쓰고 필드로 나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국과의 국경 지역을 향해 이동하자, 곧 약속했던 곳에서 카이저 형님과 라푼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왔군! 여기다!”
미리 파티를 맺어둔 탓에 우리를 먼저 발견한 형님.
그 옆에는 우리를 제국의 국경까지 편안히 모셔다 줄, 무려 8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거대한 마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