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다크 엘프 (1)
“뭐? 다크 엘프?”
“그건 또 뭐야? 처음 듣는데?”
“아…… 이거 또 복잡해지네. 도대체 천계에는 언제 가는 거야?”
예상이 틀릴 만도 하건만, 후속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는 역시나 S급이었다.
길드원들의 한탄만큼이나 내 마음도 착잡해졌다.
무려 3년 만에 이루어진, 그것도 개발사 스스로 ‘2.0’이라 부를 만큼 대규모 업데이트란 건 알겠다.
하지만 이제는 좀 알면서도 지치는 기분이었다.
‘물론 천계와 마계 외에, 이런 대규모 필드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니 고생한 건 인정해.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얼마나 더 굴려야만 천계에 발을 디디게 해줄 건데?’
사실 지금 시점에 이곳에 도착한 건, 개발사도 당황할 만큼 상당히 이른 타이밍일 게 분명했다.
공틈에서 아직 주나스를 찾지 못했거나, 영웅의 전당에서 하이 엘프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이 숲엔 아직 들어올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400레벨을 달성한 보상으로, 그냥 쉽게 좀 천계로 보내줬으면 덧나나?
“그래도 설명을 읽어보니 이거 하나만 깨면 천계는 거의 확정인 것 같은데요? 세계수가 회복된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보상으로 템도 주네요!”
서둘러 공유받은 퀘스트부터 살펴본 라챤이가, 다운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수의 회복(연계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S
* 숨겨진 존재 다크 엘프로부터 ‘세계수의 정령’을 되찾아 오십시오
* 퀘스트 클리어 조건: 메치아실에게 ‘세계수의 정령’ 전달
* 퀘스트 클리어 보상: 세계수의 회복, 엘프족의 보물
설마 세계수가 회복됐는데도 마나가 부족하다 어쩐다하며 우릴 또 굴리지는 않을 터.
차분히 설명을 재차 읽고 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S급 퀘스트니까…… 어쩌면 디바인 템을 줄 수도?’
어쩌면 짜증 부릴 일은커녕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주고 세계수라는 거대한 오브젝트의 변화를 이끌어낼 퀘스트라면, 그에 걸맞은 막대한 보답이 주어질 테니까!
어쨌든 이런저런 생각으로 바쁜 와중에도, 메치아실의 이야기는 덤덤히 이어졌다.
“신마전쟁 당시, 마기에 물든 엘프들이 일족을 배신해 마족에게 협력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배신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죠…….”
“바로 어제 일 같이 선명하군요……. 그들, 다크 엘프가 마더 트리를 폭발시키던 때가……. 현재 테론 대륙에서의 마나 불균형은 문제는, 그날 이후 누적된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었고 결국엔 앗아간…… ‘세계수의 정령’을 찾아와 주세요. 정령만 되돌아온다면, 말라 비틀어진 세계수에서도 다시금 잎이 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여러 정보를 쏟아내던 메치아실이, 마침내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힌트는 이제 다 끝난 건가?”
“그런가 봐요. 대체 다크 엘프는 뭐고, 그들은 왜 세계수를 부러뜨린 걸까요?”
앞으로 메인 퀘스트를 깨다 보면 알게 될 스토리려나?
원래라면 알 수 없을 내막들.
하지만 의외로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 곁에는, 워낙 유능한 인재들이 한데 뭉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대 황제였던 제논이 다크 엘프들과 손을 잡았던 거구나!”
“그럼 제논이 세계수를 부러뜨린 이유는…… 설마 엘프들을 종족 연합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그야 모를 일이지. 옛 12영웅의 전설과 진실이 어떻게 다른지는, 이 게임의 메인 스토리 중 하나가 될 테니까.”
“세계수가 폭발해서 부러졌다는 거로 보아…… 세계수를 감싼 거대 나무들은 원래 세계수의 가지였나 봐요!”
마치 문제를 푸는 학생들과 같이, 족족 자신만의 해답을 던져보는 길드원들.
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타연 스토리에 관한 깊은 이해도와 해박한 지식들이 담겨 있었다.
‘난 정말 대단한 유저들을 동료로 둔 거야. 감히 타연의 어느 누가, 몇 가지 정보들만을 토대로 이런 추측들을 할 수 있겠어? 내가 이런 사람들이 모인 길드의 마스터라니…….’
간혹 TV나 너튜브에 나와, 타연 전문가랍시고 이런저런 예측들을 내놓는 유저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명성 있는 사람을 모셔와도 여기서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베일에 싸여있던 황제의 호위대, ‘쉐도우 나이트’의 정체가…… 사실은 다크 엘프들이었던 건가?”
하지만 우리 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유저의 추측은 확실히 무게감이 달랐다.
카이저 형님.
대체 다크 엘프의 종적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찾아봐야 할지 막막한 우리에게, 형님은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형님, 쉐도우 나이트라뇨? 황제한테 그런 게 있었어요?”
“현 황제인 제피르 3세는 굉장히 호전적인 성격이자 전쟁광으로 설정되어 있지. 그런 놈의 곁엔 항상 직속 친위대와 비밀 호위대가 있다. 특히 호위대는 대대로 황제를 호위하는 비밀 조직으로 알려져 있지. 황궁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일명 ‘쉐도우 나이트’라고 부르더군.”
“뭐죠……? 그렇다면 지금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래. 다크 엘프를 찾기 위해선 ‘제국의 황제’부터 조사해봐야 할 거다.”
* * *
“후아! 진짜 길고 긴 하루였다! 안 그러냐?”
“그러게. 나도 중간에 마차 타고 이동할 때는 졸려서 죽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강제 로그아웃 당할 뻔했어.”
캡슐을 나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온종일 사냥으로 400렙을 만들자마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도통하지 못했던 로그아웃.
장장 20시간의 연속 플레이를 마친 나는,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기록 아니냐? 나야 잠깐 낮잠 자느라 잠깐 나갔다 왔지만, 지환이 넌 한 번도 안 나왔잖아. 도대체 뭐야? 이렇게 오랫동안 연속 플레이에 성공한 유저가 있단 소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없긴 왜 없어? 전에 32시간인가 유지했던 사람 있었잖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아…… 머독? 근데 그거랑 같냐? 걔는 그냥 별 하는 거 없이 기록 세우려고 버티기만 했던 거고, 넌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사냥하고 스킬 익히고 퀘스트하느라 바빴잖아!”
듣다 보니 확실히 좀 이상하긴 했다.
타연은 무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무리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캡슐에 내장된 인공 지능이 유저의 바이오리듬을 수시로 체크해서,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로그아웃을 강제로 감행하기 때문.
하지만 이토록 오래 게임에 접속해 있었는데도, 내게는 흔한 경고 메시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몰라. 그러고 보니 캡슐 기종을 TX-PRO로 바꾼 후부터는, 경고 메시지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은데? 컨디션 유지한답시고 미리 알아서 플레이 타임을 조절해와서 그런지, 이렇게까지 오래 플레이할 수 있는지는 지금 처음 알았어.”
“진짜 괴물 새끼가 됐네, 괴물. 하긴 저 정도는 해야 타연에서 통합 랭킹 1위를 하는 거려나? 진짜 이렇게 근성있는 놈인지는 몰랐다.”
“그 말도 이젠 좀 지겹다. 아무튼 고생했으니까 빨리 자라. 난 좀 살펴볼 게 있어서…….”
“응? 뭐하게?”
“올타 좀 뒤져보고 자려고. 업데이트 이후로 매일 새 정보들이 올라왔으니까, 훑어보면 뭐라도 있을지 몰라.”
“아아…… 진짜 성공을 맛보더니 사람이 완전 변해버렸네! 알겠다, 알겠어. 너 계속 1등 해라! 그렇게 형님이 쫓아오는 걸 견제하는데…… 형이 그만 포기할게.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제와 뺏기엔 미안하구나!”
“크크, 잘 자라. 오늘도 형님 따라 다니느라 고생했다.”
그렇게 씻지도 않은 채 침실로 들어가는 현중이를 두고, 소파에 누워 올타 게시글을 검색했다.
[다크 엘프]
[28건의 검색 결과]
기간을 최근 한 달로 검색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연관 글이 많이 뜨진 않았다.
그래서 금세 전부 읽어봤지만, 타 콘텐츠 속의 존재를 언급했던 거지 타연과 연관된 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쉐도우 나이트]
[0건의 검색 결과]
이 또한 제국 사령관인 카이저 형님쯤 돼야 알 수 있는 정보였는지, 쉐도우 나이트에 관한 내용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역시나…… 이런 데선 단서를 찾을 수 없는 건가?’
처음 타연을 접하고 3년 동안.
나는 늘 남이 먼저 클리어한 퀘스트나 인던 등의 정보를 적은 게시글을 읽으며 플레이 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변변치 않은 장비였지만, 그 템들 또한 남들이 먼저 얻어서 스펙을 분석한 글들을 보고 뒤늦게 획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하는 퀘스트는 전부 어떤 내용으로 연결될지 클리어하기 전까진 알 수가 없고.
어떤 템이 보상으로 주어지는지도 얻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있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이제야 진짜 ‘게임’을 하는 것 같아. 아니, 이제야 진짜 가상 ‘현실’ 게임을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복수를 위해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종종, 타이탄 연대기란 게임 자체를 즐기고 있단 생각이 한 번씩 들었다.
내가 어떤 테크트리로 갈지.
혹은 이번 퀘스트나 레이드는 어떻게 클리어 해야할 지 연구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기대되고 재밌기 그지없었다.
“플레이 타임이 그렇게나 길었는데도 안 튕겼던 걸 보면……. 확실히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느끼지 않아서 그런 거였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와, 결국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생명의 숲의 푸르름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 * *
“어? 형님! 일찍 접속하셨네요? 제가 제일 먼저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왔니, 드로야?”
피곤할 법도 한데 평소와 같이 단 4시간 만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서 습관처럼 곧바로 캡슐로 직행해 로그인하자, 생명의 숲을 돌아다니는 축빙 형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데 어딘가 어제 로그아웃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뭐예요……. 설마 밤새신 거세요?”
“그래. 어떻게 찾게 된 신규 지역인데 그냥 잘 수가 있어야지.”
“아니, 왜요? 어차피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좀 쉬신 다음에 찾아봐도 늦지 않는데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이런 퀘스트 관련된 일에선 형이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더라고. 그래서 너희가 좀 쉬는 동안, 먼저 이곳을 조사해봤지.”
“네? 형님 그럼 설마…… 저 때문에?”
“뭐 그런 셈이려나?”
분명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형님이 계속 타연에 접속해 있었던 이유.
그건 이곳을 빨리 구경하고 경험해보고 싶어서도,
어떤 템이나 퀘스트들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내가 최대한 시간 낭비하지 않게 해주시려고…….’
시시각각 내 진도를 따라잡는 다리우스와 태성들 때문에, 수십 시간씩 쉬지 않고 플레이하는 나를 보고 많이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형님은, 우리가 잠든 사이 이곳에 있는 모든 NPC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곳 주변의 필드를 먼저 훑어보셨던 게 분명했다.
“아니, 형님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잠은 좀 주무셔야죠.”
“나야 이제부터 자러 가면 되잖아. 아무튼, 딴 거보다 먼저 확인해 볼 게 있으니까 들어봐.”
“에휴, 어서 말씀하세요. 그래야 쉬시죠.”
“그 왜 저번에 우리랑 같이 공격대에 참가했던 꿈틀이 님 있잖아. 그분도 에랄루실로부터 하이 엘프의 축복을 함께 받았지? 혹시 지금쯤 채집 스킬이 몇 성쯤 되셨는지 알고 있어?”
“제 도움으로 8성을 달성한 지도 꽤 지났으니까…… 아마 열심히 하셨으면 9성에 도달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럼 당장 연락해서 모셔와라. 그분께서 급히 캐실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