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황실 창고 (2)
어그로에 가장 민감한 직업.
또한 전투마다 ‘동선’과 ‘무빙’에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캐릭.
그건 누가 뭐래도, 역시 ‘힐러’일 수밖에 없었다.
힐링 스킬의 사정거리를 유지하면서 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어그로가 끌리지 않을 정확한 거리 계산이 필수였기 때문.
보기에는 쉬울 것 같아서 초보들이 많이 선택하지만, 고레벨 지역으로 갈수록 고난이도 콘트롤과 뛰어난 전황 파악 능력을 요구했다.
“고생하셨어요, 축빙 형님. 황실 창고 앞까지 다녀오신 건 맞죠?”
“어. 카이저 님이 안내해주셔서 헤매지 않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직접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역시 형님이세요!”
그래서 이번 체크를 맡을 인물에는, 우리 길드의 간판 힐러 ‘축복받은무빙’ 형님이 최적이었다.
처음 이번 계획을 구상할 당시에는, 가장 먼저 지옥불 형님과 피닉스 길드가 생각났다.
분명 많은 난관이 있었을 황실 창고의 위치 파악과 접근 방법.
그건 의외로 카이저 형님이라는 사기 유저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되었기에, 제국군의 어그로 문제만 처리하면 됐기 때문이었다.
지옥불 형님이 대규모 병력으로 제국군의 어그로를 끄는 동안, 우리가 잠입한다.
그러면 가능할 법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 민폐였다.
아무리 형제 같은 동맹 사이라 해도, 우리의 이득을 위해 자꾸 지옥불 형님의 길드원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부탁하는 건 염치없는 행동.
그래서 우리는, 이번 잠입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손수 시험해보았다.
-어그로 감지 범위가 20배나 늘어났으니 답이 없어요. 적당히 했어야지 뭘 그렇게나 늘려 놔서, 들어가 볼 엄두조차 못 내게 만들어 둔 건지…….
-좀 너무하긴 하지?
-이건 뭐 저희보고, 제국엔 두 번 다시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근데 라챤아. 만약 20배나 늘어났다면…… 일단 한 명이 먼저 들어가면 전부 다 그 사람만 본다는 뜻 아니냐?
-그게 뭔 의미가 있겠어요. 그만큼 여기저기서 순식간에 몰려와서, 단숨에 죽여버릴 텐데요!
-만약에 말야. 그 어그로를 전부 먹은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그러면 어떨 거 같아?
-어라? 이 형님 설마?
어느 필드나 인던을 가도, 지금의 NPC 병사들보다 어그로 범위가 넓은 몹은 없다.
그만큼 감지 범위 20배 증가는,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나 또한 8성 은신 덕에 오스타그 시내는 들어가 봤어도, 은신 감지 병사가 있는 황궁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잘하면 잠입이 가능할 것도 같았기에!
-그래 맞아. 그 왜…… 인던에서도 잡몹 안 잡고 보스룸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
필드와 달리 인던 속 몹의 배치는 거의 변함없이 일정하다.
그래서 몇몇 보스룸으로 향하는 루트가 평이한 인던에서는, 탱커 한 명이 모든 어그로를 먹고 무작정 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사이 다른 파티원들은 보스룸 앞까지 뒤따른 다음, 구석에서 죽어버린 탱커를 부활시키는 공략법.
최대한 빠른 보스 반복 킬을 위해, 중간의 몹들에게 허비하는 시간을 생략하는 편법이었다.
우리 길드원들에게도 인던의 템을 얻기 위해 이런 플레이를 직접 해본 경험들이 다들 있었다.
그래서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거 정말 될지도? 일루전도 병사 스펙은 올릴 수 없었으니까 감지 범위만 조정했을 거 아냐? 그럼 드로라면 버틸 수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20배면 수백, 수천 명이 몰려올 텐데…… 설마 그걸 버틸 수 있을 유저가 있을 거라곤, 개발자들도 생각 못 했겠죠!
-만약 그걸 버텨내는 유저가 있고, 그사이에 다른 파티원들이 잠입하게 된다면?
-저희같이 수배 중인 유저라도, 황실 창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이번 작전을 계획했고, 마침내 확인까지도 무사히 마쳤다.
우리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을!
“그럼 드로야, 우리 언제 들어가 볼래?”
“시간 끌 거 있을까요? 회의 좀 하고 이따 바로 들어가 보죠!”
“오늘?”
“네. 방금 전 일로 저희가 여기 나타났다는 게 알려질 테니까, 더 눈에 띄기 전에 후딱 해치워버려요!”
마을과 달리 성이나 궁전 안은 전투가 가능한 지역.
괜히 꼬장 부릴 유저들이 모이기 전에, 얼른 해치워버리는 게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나: 형님, 아직 창고 입구에 계시죠?)
(카이저: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나: 잠시 회의 좀 한 다음, 딱 10분 후에 들어가겠습니다. 좀만 기다려 주세요!^^)
* * *
[라스트챤스: 와.... 저 웬만하면 안 떠는데, 엄청 떨리네요.]
[축복받은무빙: 언제는 겁나지 않은 적이 있었냐? 그냥 죽기밖에 더하겠냔 마인드로 하는 거지 뭐.]
[축복받은얼굴: 그럴만도 하죠. 이젠 우리도 예전이랑 다르잖아요? 혹시 장비를 떨구기라도 하면, 다들 타격이 큰 상태니까요.]
[축복받은파볼: 현중이가 가장 걱정이지. 디바인 템을 갖고 있는데 건물 안에선 타이탄 소환도 안 되니까... 그니까 넌, 움직일 때 항상 가운데에 있어! 알겠지?]
[축복받은얼굴: 누나도 참ㅋㅋ 암만 어그로는 안 끌어도, 탱커가 그럴 수는 없죵]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적진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단 사실에 모두 긴장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 가장 떨리는 건 나였다.
‘그림자 밟기를 연속하면 어떻게야 되겠지만……. 만약 친위대장급이 막아서면 어떨지 모르겠네.’
위험하면 바로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은 메인 주성의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일반 기사단원조차도 네임드였던 황제의 친위대.
건물 안에서 그들 다수나 친위대장이라도 맞부닥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인자에 오르고 난 뒤, 난 이 모든 것들은 감수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그래서 떨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출발 신호를 내렸다.
“가겠습니다!”
“고고, 고우!”
슈슉! 슉! 슉!
그리고 동시에 지상을 향해 고꾸라지는 훼라리.
길드원 모두도 공중에서 저마다의 비행 펫을 탄 채, 그런 내 뒤를 따라 강하했다.
띠딩! 띠딩!
조금 전과 같은 상황임을 알리는 어그로 감지음.
역시나 제국의 그리폰 라이더들이 나를 향해 가장 먼저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이동 궤적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한번 해봤다고, 그래도 좀 익숙하네. 아, 지금인가!’
피핏! 핏! 핏!
지상이 가까워져 오자, 제국군의 화살 공격도 조금 전과 같은 타이밍에 쏘아져 날아왔다.
[그림자 밟기!]
같은 방법으로 지상에 착륙하자, 역시나 둘러싸서 공격해오는 대상과 방향까지도 똑같았다.
시뮬레이션 때와 완전히 똑같은 동선과 지점으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유저들과 다른, NPC들의 한계지!’
하지만 이번엔 곧바로 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빈 정원을 크게 돌았다.
안에서 뷔잔드와 친위대들을 마주치는 것보단, 그들이 나왔을 때 들어가는 편이 더 수월하고 안전했다.
[라스트챤스: 입구 착지!]
[라스트챤스: 지하로 진입 중!]
[라스트챤스: 지하 2층 도착!]
그사이 신호를 맡은 라챤이의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황실 창고의 위치는 지하 2층.
지금이 바로, 창고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파티원들을 뒤따라 주성 안으로 진입할 시점이었다.
“속박의 손길!”
역시 비슷한 타이밍에 또다시 나타난 뷔잔드.
놈의 속박을 그림자 분신으로 풀고는 양팔을 맞부딪쳤다.
아끼다 똥 된다는 속담처럼, 지금부터는 내가 가진 전력을 전부 사용해야 할 순간이었다.
[스킬 가속 상태가 되어 60초 동안 모든 스킬의 사용 대기시간이 10%로 줄어듭니다.]
곧바로 차오른 그림자 밟기의 쿨타임.
난 곧바로 재빠른 몸놀림을 쓴 다음, 주성 안에서 나오는 친위대 중 한 명을 향해 이동기를 사용했다.
팟!
그리고 안으로 입장.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이 보였으나, 숨 돌릴 틈도 없이 가장 멀리 있는 놈을 향해 다시금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정신없다 정신없어!’
8성 그림자 밟기의 쿨타임은 30초.
스킬 가속으로 인한 급격한 마나 소비는 오직 3초마다 사용되는 그림자 밟기에만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급격한 위치 변동과 시점 변화에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이미 황실 창고까지의 동선은 완벽히 숙지한 상태였다.
팟! 팟!
그렇게 메인 주성 안으로 들어온 지 10초도 되지 않은 시점에 지하로 진입했고, 다시 2번의 그밟 사용만으로 지하 2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황실 창고를 지키고 있던 제국 병사들이 올라오며, 오히려 그밟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어 거리를 단축해줬기 때문이었다.
“드로야, 여기다!”
“뭐야? 아직 안 들어가 있었어? 빨리 들어가!”
“옥키!”
원래라면 굳건히 닫혀있었을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입구와 그 안의 관문들.
하지만 제국 사령관 신분인 카이저 형님이, 이미 몇 차례의 퀘스트를 진행했던 탓에 황실 창고까지의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끝, 거대한 묵빛 철문 앞에 현중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창고 안으로 입장한 것이었다.
“아이스 월!”
그리고 내가 막 계단 입구를 지나친 순간.
내 뒤로 거대한 얼음벽이 생성됐다.
진작에 캐스팅을 완성 시킨 후, 줄곧 풀차징을 하고 있던 카이저 형님의 마법이었다.
“어서 들어가라. 몇 초 못 막아주고 깨질 테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콰쾅! 쾅!
그런 형님의 말처럼, 얼음벽은 갑자기 길이 막히자 공격한 제국군들에 의해 바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난, 놈들과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해 철문에 손을 댄 상태.
놈들의 광폭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외쳤다.
“입장!”
[오스타그 황궁의 인스턴트 던전, ‘가이라 제국의 황실 창고’에 입장했습니다.]
“성공이다!”
“대박!”
“역시 드로야!”
실내지만 라이트 마법이 걸린 듯 환하고 넓은 내부 공간.
인던에 들어오자,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헉헉……. 막다른 길이어서 진짜 식겁했네요. 다행히 성공했지만요.”
“진짜 타연에 너 같은 놈은 없을 거다. 이런 일을 벌이고, 결국 또 성공하다니!”
“다들 목숨을 걸고 시도한 끝에 이룬 거죠, 뭐. 아 참, 일단 카이저 형님부터 초대하겠습니다.”
[카이저가 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라푼젤이 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혹시 시스템이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직 파티를 맺지 않던 두 사람을 초대했다.
그러자 인던 앞에 있던 터라, 둘은 금세 따라 들어왔다.
“역시 드로야. 넌 정말,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걸어가는 녀석이구나.”
“별말씀을요 형님. 이제 막 들어 온 거라 아직 성공한 것도 아닌데요. 물론 인던이니까 이제 좀 한숨 돌리고 여유롭게 하면 되겠지만요.”
거칠게 쫓아오던 제국군들.
하지만 인던은 시스템상 독립된 공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카이저 형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기에, 우리가 이런 과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실 창고는 사실 인던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내가 했던 몇몇 퀘스트…… 그리고 네가 얻은 메인 퀘스트와 연관된 곳이라서 그랬나 보군. 퍼스트 클리어 이후, 많은 유저들이 찾아올 인던으로 만들어 둔 모양이야.
아무리 내가 타연의 주인공 같은 기분이 든다지만, 당연히 이 게임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따라서 타연의 중심 스토리와 연관된 메인 퀘스트는, 많은 유저들이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대부분 인던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생명의 숲, 그리고 제국의 황궁.
이 두 유명 지역을 유저들이 직접 와보도록 개발사가 만들어둔 인던.
제국 황궁에서는, 그곳이 바로 황실의 보물 창고였다.
“오빠, 근데 아마 방금 같은 방법은 또 쓰실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 무조건 퀘스트를 깨야 할걸요?”
“응? 푼젤아, 그건 왜?”
“급히 들어가시느라 못 보셨죠? 오빠가 들어가서 제국군의 어그로가 풀리자마자, 유저들이 들이닥쳤어요. 뭔 일인지 쫓아와 봤던 거겠죠.”
“엇, 그럼 네 말은……?”
“맞아요. 조금 있으면 태성 놈들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만약 이 앞에서 죽치기라도 하면, 다신 오늘 같은 방법으로는 못 들어오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