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세계수의 회복 (2)
“뭐야? 드로 너, 벌써 잡고 온 거야?”
“네, 형님. 신창이 영 시원찮은가 봐요? 아직 못 잡으신 걸 보니요?”
“어쭈, 요놈 봐라? 내가 좀 편해졌나 보지?”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얼른 끝내게 도와드릴게요!”
카이저 형님의 신창은 생명의 신이자 대지모신인 텔로라의 것.
빛의 신 루이튼과 달리 ‘땅’ 속성의 무기였다.
따라서 신검처럼 암 속성 및 악마 계열 몹 추가 데미지가 따로 부여된 건 아니었다.
사실 디바인 무기가 제법 풀리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내 장래가 밝은 이유는 신검이 ‘빛’ 속성 무기란 부분이 컸다.
보나 마나 타연의 메인 스토리는 마계의 재침공으로 이어지게 될 예정.
그러면 놈들을 상대로 가장 큰 활약을 벌일 수 있는 건, 결국 이 ‘신검’을 가진 유저가 될 게 뻔했다.
파지직- 파지직!
다크 엘프 궁수에게 가까이 다가갔지만, 다짜고짜 나를 공격해오진 않았다.
* 각 뇌전 줄기는 3m 내의 적을 자동으로 공격합니다. (공격 시 10%의 확률로 ‘감전’ 상태 이상)
하지만 근처에만 가도 번개 공격과 감전 디버프를 내뿜는 8개의 뇌전 줄기 덕분에, 궁수 로메크실은 갑자기 맥을 못 추리게 되었다.
“뭐야, 이거 완전 사기 아냐? 보스 몹한테도 이 정도라고?”
“제가 괜히 하나뿐인 스킬북으로 번개 배리어를 선택했겠어요? 다 나중을 생각해서, 머리 빠지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는데요!”
다른 이들과 달리, 타연에서 오직 나만이 갖고 있는 특성.
난 모든 스킬을 ‘8성’까지 성장시킬 수 있는 사기적인 템을 갖고 있었다.
‘뭔들 8성까지 키우면 안 좋겠냐만…… 사냥할 때나 전투할 때, 공방에 이렇게나 잘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은 찾기 힘들지!’
비록 0.5초에 불과한 짧은 디버프지만, 적이 감전에 빠지면 하던 공격을 멈추게 된다.
즉, 그사이에는 공격이 들어오지 않으니 한편으론 최고의 방어 스킬이기도 한 셈.
더불어 뇌전 줄기 하나하나의 라이트닝 데미지도 상당했으니, 지금처럼 한 명에게 8개의 줄기가 집중될 때는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오, 나왔네요! 마지막 페이즈예요!”
<최상급 암흑 정령>
이미 상당한 공격이 누적됐던 탓에, 내가 가담하자 로메크실은 바로 정령을 소환했다.
이븐실 때와 마찬가지로, 체력이 얼마 남지 않자 마지막 공격 패턴이 추가된 것이었다.
평범한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 정령.
그것도 상급의 정령이라 데미지가 상당히 강력하고, 정신계 광역 디버프 공격도 해왔지만…….
[상태 이상 ‘혼란’에 저항합니다.]
워낙 미친 듯이 높은 내 마법 방어력을 뚫어내진 못해, 조금의 위협도 주지 못했다.
“크흑! 너희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할 날이, 곧 찾아오리라……!”
그렇게 암흑 정령은 무시하고 계속 딜을 넣자, 결국 녀석은 금세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두 마리 클리어!”
“오, 굿! 다 잡은 거네!”
3마리의 보스 중 2마리를 한 명의 리타이어도 없이 해치웠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이건 아직 깨지 않았어도 클리어한 것이나 마찬가지.
함께 딜을 먹이던 파티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들 뭐 해요! 잡았으면 얼른 이 자식 좀 어떻게 해줘요! 아, 계속 무빙하고 회피하느라 죽겠단 말예요!”
하지만 죽는시늉을 하는 현중이 때문에, 우리는 마저 검방 엘프 수리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무난히 녀석을 정리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쉐도우 나이트들을 물리쳤다.
“크아악! 너희의 만행에 피눈물을 흘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다크 엘프가 사라진 자리 위로, 보물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가 남지 않길래 어떻게 루팅을 하나 싶었는데, 황실 창고답게 보물 상자가 드랍되는 인던이었던 모양.
한데 하나가 아닌 무려 셋이나 되었다.
“와우, 상자가 세 개야?”
“뭘 놀라고 그래. 보스가 세 명이었으니 이 정돈 돼야 맞지 않아?”
“인던에서 템이 그렇게 후하게 나올 리가요? 아마 퍼스트 클리어라서 이런 거 아닐까 싶은데요?”
현중이와 라챤이의 말처럼, 인던에서는 어지간하면 고급 템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편하고 안전하게 사냥하는 메리트가 있어서 망정이지, 원하는 인던 템을 먹으려면 최소한 수십에서 수백 번의 반복 클리어 정도는 각오해야만 했다.
다리우스 패밀리가 차고 있는 풀 고강화 레전더리 인던 세트는, 수많은 태성 길드원들의 무한 인던 사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거야 앞으로 이 인던을 돌 유저들이나 신경 쓸 사정.
제국의 수배를 받는 우리로선, 어지간하면 이 인던에 다시 올 일이 없었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라? 하나가 색이 좀 다른데요? 테두리도 묘하게 좀 더 고급스럽고요!”
“뭐? 정말?”
우리가 웃고 떠드는 사이, 먼저 상자에 다가가 살펴본 대탐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자, 정말 가운데 상자의 케이스가 조금 더 고급 재질에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 퍼클 보상인가 보네요. 딱 봐도 랜덤 보상인 것 같은데…… 누가 열까요? 역시 드로 형님이?”
“오, 난 아냐! 항상 운빨이라곤 지지리도 없었어.”
“……말조심하세요, 드로 형.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다간 사람들한테 맞을 수도 있어요. 능욕한다고…….”
“아무튼 난 아냐. 이건 딱 정해져 있잖아. 강화의 신이자 운빨의 신, 라스트- 챤스!”
무려 처음 제작된 드라코닉 보우를 단번에 +6까지 강화해버린 행운의 사나이.
당당이가 날 추천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상자를 여는 건 라챤이가 적격이었다.
“그럼 열겠습니다. 꽝이 나오더라도 원망하진 마세요!”
이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괜한 실랑이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라챤이가 바로 상자를 열었다.
“엇, 이건?”
“뭔데? 디바인 템이도 나왔어?”
“아뇨, 레전더리긴 한데……. 전에 얻었던 게 나왔네요!”
[라스트챤스: <미완성 스킬북(레전더리)> 이게 나왔네요. 나름 잘 뽑은 건가요?]
“나름이라니! 대박을 뽑아버렸잖아!”
“오, 진짜! 이걸 언제 또 줍나 싶었는데, 벌써 얻었네!”
라챤이가 뽑은 아이템.
그건 투 메르타스가 드랍했던 미완성 스킬북이었다.
난 이미 한번 써버렸기에 더는 사용할 수 없지만, 이게 얼마나 좋은 템인지는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던에서 나온 템치고는 상당히 대박이라고 할 만한 아이템이었다.
그에 고무되어 연달아 다른 보물 상자도 열어보았으나, 더 이상의 대박은 없었다.
둘 다 평범한 유니크급 무기.
그래도 인던치고는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역시 라챤이네. 이 정도면 금손 인정이다.”
“헤헤. 그러니까 뽑기만 아니라 강화하실 일도 있으면 절 찾아주세요. 공짜로 대신해드릴 테니까요.”
[산드로: 이 템은 의논해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갖는 걸로 하겠습니다. 스킬을 각인하는 건 제가 대신할 수 있으니까, 아마 당장이라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누가 가져가시게 될지 기대되네요.]
[카이저: 그래. 근데 득템으로 기쁜 건 알겠는데,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건 아니지? 이제 그만 나무로 다가가서 퀘스트를 깨보자. 그건 드로, 네가 해야지.]
형님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난 진작부터 중앙의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느티나무처럼 풍성한 나뭇가지를 자랑하는 모양새.
가지 사이마다 얼핏 열매가 보이는 이 나무에는, 분명 생명의 숲 세계수에 깃들여있던 수호령이 갇혀있을 터였다.
난 조심스럽게 나무 앞으로 다가가, 인벤토리에서 세계수 묘목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 현중이 때와는 다르게, 갑자기 나무가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줄기 사이에서 무언가가 쑥 튀어나왔다.
『이건 설마 마더 트리? 이 그립고 익숙한 향기를…… 대체 얼마 만에 맡아보는 건지……!』
마치 페어리와 같이, 작은 소녀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날개는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반투명하면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초록빛 때문에, 누가 봐도 그녀가 ‘정령’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유저라면 그녀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세계수의 수호령 가이아>
내가 든 묘목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 위에, 이와 같은 네임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세계수의 정령’이 맞으시죠? ‘생명의 숲’에 있는 ‘마더 트리’는, 천 년 전의 참사 이후로 아직 메말라 있습니다. ‘메치아실’의 부탁으로 당신을 모시러 왔으니, 저희와 함께 세계수가 있는 숲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네? 메치아실의 부탁이요? 하지만 제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응?”
금방 퀘스트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고민하던 것도 잠시, 가이아는 다시금 밝고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해왔다.
“좋아요! 가져온 어린 가지에 들어갈 테니, 절 생명의 숲으로 데려다주세요! 다시 마더 트리와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레네요!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세계수 묘목에 세계수의 수호령 가이아가 깃듭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무에서 반쯤 내밀고 있던 몸을 완전히 꺼냈다.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는 묘목으로 넘어와 흡수되듯 스며들었다.
“어? 다들 나무 좀 봐요!”
그와 동시에, 우리 눈앞에 있던 황실 창고의 나무는 급속도로 메마르며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툭, 툭!
푸르고 울창했던 나뭇잎들이 금세 갈색으로 변했고, 하나둘씩 가지에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나무 주위로 수북이 쌓인 낙엽.
단 몇십 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버린 믿기 힘든 광경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와, 게임이라 가능한 연출이겠지만…… 지렸다.”
“생각보다 수호령이란 존재가 나무에겐 중요한 건가 봐요.”
“이름이 분명 가이아였지? 설마 가이라 제국과 무슨 연관이 있는건가?”
함께 들어온 파티원이 많다 보니, 뭘 하나 진행할 때마다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난 그에 호응할 틈이 없었다.
* 수호령: 가이아(★★★★★★★★★★)
세계수 묘목의 설명이 적혀있던 옵션 창.
현재 수호령이 없다던 그 글귀가, 어느새 바뀌어버린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십, 십 성이라고? 대체 이 정령이 얼마나 희귀한 존재라는 거야?’
타연을 해오면서 처음으로 보게 된 별 10개의 모습.
순간 그 많고 많은 별의 개수에 기겁했지만, 생각해보니 ‘세계수’의 하나뿐인 ‘수호령’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그렇게 볼일을 마친 우리는, 남은 방들은 과감히 무시하고 곧장 아베르 성으로 귀환했다.
그리곤 다시 카이저 형님이 팔두 마차를 끌고 오시길 기다린 다음, 또 한 번의 장거리 여정 끝에 생명의 숲에 다다랐다.
“미쳤다, 미쳤어! 여기 올 때마다 이 짓거릴 해야 하는 거야?”
“생명의 숲이 오픈되면 공간이동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말처럼.
온통 제국에 둘러싸인 이곳을 편히 오갈 수 있으려면, 하루빨리 인간과 엘프의 단절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루하긴 했지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다들 항상 바쁜 터라, 서로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오손도손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덕분에 미완성 스킬북을 누가 가져갈지도 바로 정해졌다.
“역시 축굴이가 가져가는 게 맞아. 우리 길드의 메인 탱커답게, 길드원들이 팍팍 좀 밀어줘야지!”
“그래. 디바인 템을 가져서 축굴이의 생존도 중요한데, 항상 우리는 드로한테만 너무 의존했던 것 같아. 축굴이가 좀 더 세져서 스스로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동안 다들 현중이가 길드를 위해 어떻게 헌신해왔는지 지켜봤다.
그래서 미완성 스킬북은 만장일치로 현중이의 몫으로 결정됐다.
물론 어떤 걸 익히게 될지는, 녀석의 선택으로 남게 됐지만.
“다 왔네요!”
그렇게 웃고 떠들며 걷는 사이, 어느덧 생명의 숲 중앙에 있는 세계수 초입에 도착했다.
그리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메치아실이 있는 나무에 오른 뒤, 그녀에게 말했다.
“메치아실 님, 말씀하셨던 ‘세계수의 정령’을 되찾아 왔습니다. 제국과 다크 엘프들로부터요!”
[퀘스트 ‘세계수의 회복’을 클리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