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세계수의 회복 (3)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이토록 쉽게…… 세계수의 수호령을 되찾아 오실 줄이야!”
“어…… 쉽게 찾아온 건 아닌데 말이죠……?”
많은 엘프들을 만나본 건 아니지만, 그들에겐 한결같은 특징이 있었다.
희로애락(喜怒哀樂).
마치 이 감정들을 뺀 것과 같이 표정에 변화가 없어, 아름다운 외모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메치아실은 극도로 격앙된 표정으로 내가 내민 세계수 묘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탄성에 대답이라도 하듯, 수호령이 묘목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리웠던 나의 메치아실! 오랜만에요, 이게 얼마 만인 거죠!”
“가이아……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죠? 제국을 비롯한 대륙 곳곳을 몇십 번이고 찾아봤지만, 당신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 한시도 그날의 회한을 잊어본 적이 없었고요…… 흐흑!”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마는 메치아실.
엘프가 아닌 인간이더라도, NPC로부터 이 정도 감정 변화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라스트챤스: NPC가 눈물 흘리는 건 오랜만에 보네요. 개발자들이 확실히 여기다 힘 좀 썼나 봐요?]
[축복받은얼굴: 그나저나 엘프가 우니까 왜 이렇게 이쁘냐... 아무리 가상이라도 진짜 장난 아니구나ㄷㄷ]
[축복받은파볼: 좋냐?]
둘의 대화가 방해되지 않도록 채팅을 나누는 도중, 메치아실이 두 손으로 묘목을 들고는 이동했다.
퀘스트 담당 NPC답지 않게, 머무르고 있던 방을 성큼 나선 것이었다.
“숲의 어린 가지들이여! 드디어 우리의 마더 트리가, 다시 새싹을 피울 날이 도래했습니다!”
그리고는 집 앞 나무 중턱에서 사방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세계수를 둘러싼 거대 나무들의 옹이와 지상 곳곳에서, 엘프들이 나와 모였다.
“루루 룰루루!”
“루루 룰루루!”
메치아실의 선창으로 시작된 합창.
가사가 없어 정령들의 허밍음에 가까운 노래에 엘프들이 호응하기 시작하니, 고요하던 숲은 금세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찼다.
“와…… 이런 건 처음 보네요!”
숲엔 어느새 사슴, 곰, 여우, 토끼 등등 각종 동물 오브젝트들이 모여들었고, 하늘엔 각양각색의 새들이 날아와 가지에 앉았다.
메마르고 반응 없는 NPC들과 퀘스트만 봐왔던 내게는,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광경이었다.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유저들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다. 다른 유저들도 비슷하게나마 간접 경험할 순 있지만, 아무래도 첫 클리어 때만큼의 연출은 재현되지 않더군. 내가 주로 퀘스트에 몰두하는 이유도, 다 이런 감동을 잊지 못해 그런 것도 있지.”
카이저 형님의 말씀.
하지만 그게 전혀 거짓이나 과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현실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쭉, 타연의 풍경이나 공성전 등에나 감탄하곤 했는데…….’
나는 그동안 타연이란 게임의 반쪽만 즐겼던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누군가는 힘들게 제작해서 만들어둔 것인데, 다른 누군가가 그걸 독점하듯 누려왔는데도 모른 채 지내왔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번 일이 타연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인지.
또한 이 퀘스트를 클리어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유저들이 플레이에 영향을 받게 될는지…….
지금껏 현실에서건 게임에서건, 늘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지만…….
이제 난 타연에서 그 누구보다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
“이대로 계속하고 싶다. 이 타연의 스토리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보고 싶어. 누군가 만들어놓은 타연의 모든 걸, 내가 다 경험해보고 싶어! 지금 함께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매 순간 내려야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부담될 때도 있지만…….
이런 일들을 벌이고, 경험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아직은 훨씬 즐겁고 재밌기만 했다.
“응? 방금 뭐라고 했냐?”
“못 들었으면 됐어. 그냥 저거나 지켜봐라.”
다 들었으면서 괜히 못 들은 척하는 현중이에게 핀잔을 주며, 엘프들의 행사를 지켜봤다.
몇 분에 걸쳐 이루어진 이벤트는, 어느덧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메치아실이 묘목을 든 채 세계수에 다가가자, 마침내 수호령 ‘가이아’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오랜 친구들……, 그리고 나의 집……. 드디어 이곳에 돌아오게 되었어!”
그렇게 가이아가 메마른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바로 스르륵 흡수되고 말았다.
또옥!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줄기를 중심으로, 마치 물결이 퍼지는 것처럼 나무의 위아래로 푸른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테론 대륙의 세계수가 새싹을 피웁니다. 앞으로 테론 대륙에는 다시금 마나의 축복이 깃들게 됩니다.]
“엇, 전체 알림창!”
“확실히 이번에 깬 게, 메인 중의 메인 스토리였던 모양이네.”
푸른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군데군데 벌써 새싹이 피어올랐고, 우리의 눈앞에는 자주 볼 수 없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지난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유저들이 단서를 찾고 있는 ‘천계’와 ‘마계’가, 드디어 눈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전체 알림’을 통해 이번 업적의 중요성이 강조하는 것을 보고 나니!
“인간 영웅들이여……. 그대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우리 생명의 숲 엘프들은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되었고 대륙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이에 우리도 제국과의 오랜 은원을 잊고, 인간들과의 교류를 재개토록 하겠습니다.”
띠링!
[테론 대륙에 숨겨진 네 번째 금지, ‘생명의 숲’의 출입 제한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 알림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바대로, 세계수의 회복과 동시에 이 숲이 유저들에게 오픈된 것이다.
물론 몇몇 입장 퀘스트들이 존재하겠지만, 이곳은 금세 많은 유저들로 북적이는 지역이 될 게 분명했다.
“또한, 앞으로 그대들을 우리 일족의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감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메치아실의 길고 긴 감사 인사가 끝나자, 마침내 이번 퀘스트를 퍼스트 클리어한 보상이 지급되었다.
[업적 ‘숲의 친구’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세계수의 보살핌’을 획득했습니다.]
[메치아실로부터 ‘태초의 약속’을 건네받았습니다.]
“오, 업적이 2개!”
“S급 퀘스트였으니 이 정돈 받아야지!”
비록 물질적 보상은 내게만 주어졌지만, 업적은 이례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
[업적: 숲의 친구(A)]
* 엘프들에게 깊은 은혜를 안긴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방어력 +750, HP +1500)
* 업적 효과로 숲에서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숲 지역 이동 속도 +10%)
[업적: 세계수의 보살핌(S)]
* 세계수의 회복을 이끈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마법 방어력 +2000, MP +5000)
* 업적 효과로 항상 마나가 풍요롭게 됩니다. (초당 MP 회복 +50)
* 모든 엘프들로부터 깊은 호감을 받게 됩니다.
“와! S급 업적은 처음인데…… 이거 정말 대박이네요! 업적 주제에 이 정도 스펙 업을 해주는 게 말이 돼요?”
“맞아 맞아! 이 정도면 어지간한 레전더리급 악세 정도를, 하나 더 낀 수준인데? 꺄아, 쩔어!”
이런저런 모험을 많이 해본 대탐이도, 막상 S급 업적을 얻은 건 처음인지 호들갑을 떨었다.
곁에 있던 축볼 누님도, 이번 업적은 마법 계열에 특히 좋은 업적이라 그런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괜히 업적 사냥에 나섰던 게 아니죠. 어때요, 이 정도 업적이니까 강해진 게 확 느껴지죠?”
보통 비율로 올려주는 업적의 가치가 더 높은 편이지만, S급답게 올라간 절대 수치가 무척이나 높았다.
그러니 다들 자신의 캐릭이 단숨에 급성장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을 터였다.
“우리야 알겠으니까, 메치아실이 뭘 줬는지나 좀 공유해봐. 업적만 해도 이 정도 급인데, 도대체 무슨 템을 받은 거냐?”
“……어? 아아, 그래. 처음 보는 옵션이라 잠깐 좀 집중하느라. 바로 링크 걸어드려 볼게요!”
현중이가 옆에서 재촉하느라, 몇 번이나 다시 읽던 걸 멈추고 공유부터 했다.
S급 업적도 훌륭하긴 했지만…… 사실 난 이 템의 설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초의 약속(디바인, 반지)>
* 방어력: 120
* 마법 방어력: 480
* 모든 속성 내성 +5%
* 모든 능력치 +20
* 최대 HP 및 MP +2000
* 초당 HP 및 MP 회복 +150
* 특수 스킬 ‘정령 봉인(!)’ 사용 가능
* 이 아이템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생명의 신 텔로라가 엘프족을 축복하며 세계수의 가지와 태초의 돌을 엮어 만든 반지입니다.
* “일족에 전해지는 이 반지 덕분에, 난 늘 나의 친우와 함께할 수 있었어요. 이제 곧, 그와 헤어져야 한단 사실이 아쉽지만…… 늘 감사하게 생각했답니다.” - 신마전쟁의 영웅, 하이엘프 레이븐실 -
“우왓, 디바인 반지!”
“이거 뭐야? 정령 봉인? 완전 개사기잖아!”
다들 고수답게, 링크를 걸자마자 금방 이 템의 가치를 알아차리곤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넋을 놓고 설명을 읽고 또 읽은 이유.
그건 스펙도 스펙이었지만, 이 디바인 템에 들어있는 스킬이 너무도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 정령 봉인: 어떤 정령이라도 이 반지 안에 가두어 소환할 수 있습니다.
……………………
느낌표를 터치하자 나열된 추가 정보.
밑에 몇 가지 수치와 제한 사항들이 적혀 있었지만, 대충 테이밍 몬스터 스킬의 조건과 비슷해 보였다.
아무 정령이나 보이는 족족 가둘 수 없도록 만들어둔 시스템적 한계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템을 얻은 난 타연의 랭킹 1위이자 유달리 강력한 테크트리를 보유한 터라 그것들이 통하지 않는 유저였다.
“혹시 이거…… 제가 가져도 될까요?”
“또 그 버릇 나왔어? 네가 갖는 거에 토 달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 그나저나 정령이라니……. 마검사 스킬을 익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령술사 흉내도 내게 생겼네?”
“그러게 말야. 원래도 그랬지만…… 진짜 나날이 타연 최고의 잡탕 캐릭이 돼가는구나.”
“하핫! 템의 등급이 높을수록 옵션이 많으니까, 점점 특이해질 수밖에 없네요, 흐흐.”
“그냥 네가 특이한 거야. 이제는 누가 널 도둑이라고 보겠어?”
아무래도 디바인 템이 주어져서 부담이었는데, 다들 워낙 좋은 업적을 얻게 되어 그런지 또다시 양보를 받게 되었다.
사실 마나 흡수 반지 한쪽을 빼야 해서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거야 생각해둔 바가 있었으니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퀘스트의 보상은, 특정 직업보다는 전 직업군이 찰 수 있는 템으로 주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반지에는 뭘 잡아넣을 거야?”
곁에 있던 카이저 형님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 막 얻어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번개가 좋겠죠?”
“하긴 라이트닝 배리어를 배웠으니 그게 좋겠지? 그렇다면 급은 역시나……?”
특정 지역에서 랜덤으로 뜨는 보스 몹.
잡기도 힘들지만 마주치기는 더 힘들어 고생할 게 훤히 예상됐지만, 이 템을 얻은 이상 포획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네, 맞아요. 어떤 정령도 봉인할 수 있다는 데 아무거나 할 순 없잖아요? 디바인 템에 어울리게, 정령왕 정도는 잡아넣으렵니다.”
* * *
많은 선행 퀘스트를 비롯해 대륙 전역을 활보하도록 만든 연계 퀘스트.
그 퀘스트도 어느덧 끝이 보이고 있었다.
“여기는 여전하구먼?”
이제는 정말 타연에서 가장 핫한 사냥터가 돼버린 것 같은 시공의 틈새.
시공 포탈을 넘어오자마자 보이는 넘쳐나는 사람들을 뚫고, 우리는 북쪽 환영의 마탑으로 향했다.
“주나스 님. 드디어 ‘세계수’도 ‘회복’시키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천계’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주시죠!”
우리를 이토록 고생하게 만든 NPC.
하지만 이제는 반갑기만 한 주나스의 얼굴을 보자, 곧바로 본론부터 튀어나왔다.
“편지를 써주긴 했네만, 정말 세계수 회복에 성공할 줄이야. 대단한 일을 해냈구먼……. 메치아실 님이 아주 기뻐했겠어…….”
“그럼요! 이제 본토에 마나도 풍부해질 테니, 천계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주실 수 있는 거죠?”
“클클……. 물론 이제는 자격도 갖췄을뿐더러 마나도 부족하지 않을 테니 열어줄 순 있네. 하지만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는 심연의 존재들 때문에, 잠시라도 이곳을 비울 수가 없네.”
“네? 그럼…….”
바로 포탈을 열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진 주나스의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이편이 더 좋은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걸 줄 테니 본토의 여러 성지 중 하나를 찾아가게나. 그곳의 교황을 만나 이 스크롤을 사용하게 되면, 마나가 감응해 천계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될 것이네. 이젠 대륙에, 더는 마나가 부족하지도 않을 터이니 말일세.”
[주나스로부터 ‘고대의 스크롤’을 건네받았습니다.]
마치 시공 포탈을 열었던 카오스 스톤과 같이…….
천계로 향하는 포탈의 위치 또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