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정령왕 (2)
처음엔 아리송한 듯싶었지만, 이내 현중이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쨌든 녀석과 맞춤인 스킬도 정해졌으니 거칠 게 없었다.
동선에 맞춰 각 직업의 마스터를 빠르게 들리던 도중, 마침내 차례가 돌아왔다.
얼마 전, 내게 숙제를 하나 안겨줬던 NPC와의 재회가!
“대륙 제일의 도둑 산드로가 아니신가? 허허! 얼마 전에 본 것 같은데 다시 이곳을 찾았군?”
“오, 마스터 님. 기억하고 계시네요?”
조금 달라진 말투로 인사를 건네는 그.
바로 도둑 직업의 마스터, 알 쿠자드였다.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책에 스킬을 새길 수는 없지. 일단 이 책을 복원시킨 후에 다시 찾아오게.”
일단 미완성 스킬북의 노가다성 방문 도장부터 찍자, 그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대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난 그가 냈던 숙제를 모두 끝내, 아직 그에게 볼일이 남아있었다.
조용히 인벤토리에서 한 물건을 꺼내 들자, 그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반응을 보였다.
“아니, 이건……? 산드로 자네, 혹시 황실 창고에 다녀온 겐가?”
“오, 바로 알아보시네요?”
“이런 대담한 도둑 같으니라고! 윌리펑 사후 이래로, 그곳에 다녀온 도둑은 자네가 처음일 거야! 뭘 가져오려나 싶었는데, 설마 황실의 물건을 가져올 줄이야……!”
그는 NPC답게, 내가 꺼낸 물건의 출처를 한눈에 알아봤다.
‘앞으론…… 개나 소나 그곳을 드나들 게 될 것 같은데요.’
제국 황실의 보물 창고가 인던인 이상…….
그리고 차후 그곳에 전직 퀘스트 템 중 하나가 있단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수십만이 넘는 도둑들이 보물 창고를 방문하게 될지도 몰랐다.
“여하튼! 가져온 물건을 보니 자네가 걷고 싶은 길이 무언지, 잘 알겠네!”
띠링!
[퀘스트 ‘알 쿠자드의 시험’을 클리어했습니다.]
“자네는 윌리펑과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도적’을 목표로 하고 있군. 그 길이라면 내가 조금은 인도해줄 수 있네.”
[상급 직업 ‘대도적’으로 전직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전직하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뜬 선택 창.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두 개의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오호라…… 역시 어느 정도 편의는 봐준다 이거구나?”
“왜? 뭔데 그래?”
“전직 조건을 다 갖추니까, 고를 수 있는 전직 루트를 전부 보여주네. 하긴 한 번 정하면 돌이킬 수 없는데 이 정도는 알려 줘야 맞지.”
정말 다행히도, 하나의 전직 조건만 달성했음에도 다른 선택지의 정보도 함께 주어졌다.
쉬쉭, 쉭, 쉭!
단검을 빠르게 휘두르고 제자리에서 텀블링하며 공격을 회피하는 도둑.
동시에 가상의 벽을 타고 박차고 오르다가 품에서 여러 개의 폭탄을 꺼내 들어 흩뿌리는 모습이 연출됐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하나의 홀로그램이 함께 재생되고 있었다.
스으윽, 푹!
적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켜 힘껏 차징한 검을 찔러넣는 암살자.
옆의 빠른 공속의 도둑과 대비되는 느린 공격이지만, 한 방 한 방의 공격이 전부 묵직해 보였다.
모든 공격을 멈춘 그는, 땅으로 스르륵 스며드는 것을 끝으로 홀로그램은 재생을 반복했다.
“결국 전직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2가지 루트로 제시되는구나.”
“오, 그래? 그럼 난 뭐가 뜨려나?”
“힐링과 버프에 특화된 루트와 개인 스펙 증가에 치중된 루트. 이렇게가 아닐까? 도둑이 암살자와 상급 도둑으로 제시되는 걸 보니, 딱 그럴 삘인데?”
“그렇군. 그럼 역시 난 전직을 택하는 게 맞으니까 스킬북은 정한대로 그밟으로 배워야겠다.”
전직을 통해 추후 찍을 수 있는 고유 스킬 등의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홀로그램 영상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영상을 유심히 살펴보니 어떤 종류의 스킬이 주어질 것이고, 어떤 캐릭으로 성장하게 될지가 예상된 것이다.
따라서…….
난 한 톨의 미련도 없이, ‘전직’이란 선택지를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울 수 있었다.
[NO]
“아쉽군. 자네라면 전설의 어쌔신 영웅 ‘알 사딘’의 길을 잇거나, ‘윌리펑’에 버금가는 대도둑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언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다시 찾아오게. 자네라면 언제나 환영일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알 쿠사드는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퀘스트를 위해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유저들이 있어, 더 머뭇대지 않고 방을 나섰다.
“영 성에 차지 않았나 보지? 결국 전직은 포기한 걸 보니…….”
“아냐. 생각보다는 좋아 보이더라. 심지어 유저들이 400레벨을 찍기 시작해서 전직 캐릭이 늘어나게 되면, 더는 내가 활약하기 힘들 것 같다는 위협도 느껴졌어.”
“응? 그런데 왜……? 더 고민해 보지 않고?”
“이미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마 전직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남들과 같은 길을 가면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까 남들은 절대 하지 않을 만한, 혹은 생각하지 못할만한 길을 택해야만 해.”
내가 처음 마쉴 도둑이란 발상을 떠올렸을 때.
이게 정말 먹히고 통할 건지는, 직접 성장시켜보기 전까진 몰랐다.
하지만 난 과감하게 레벨 10까지 다운한 뒤, 올인하듯 그 캐릭에 도전해서 결국 성공해 냈다.
그리고 이제, 나에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얼핏 보기엔 랭킹 1위라 처음보다는 상황이 훨씬 더 좋아 보이고 수월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신검의 메리트는 반년 전보다 많이 퇴색됐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적들에겐 내 마쉴 도둑을 상대할 무기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상대해야 할 카운터 조합들은 나날이 다양해졌다.
거기에…… 심증뿐이긴 하지만 내 캐릭을 꾸준히 너프시키는 업데이트마저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했다.
이 상황을 해결할 타개책은 하나.
태성 놈들을 무너뜨릴 때까지, 여전히 내가 무쌍으로 활약할 수 있을 만한 압도적인 ‘강력함’이 필요했다.
‘유저들이 점차 400레벨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끝이야.’
어느 정도 예상하곤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해보니 훨씬 더 위급하고 시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전직, 그리고 이중 직업.
많은 유저들이 이 단계에 이르면, 급격히 강해질 뿐더러 생각해야 할 카운터 조합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빨리…….
아직 적들 대부분이 300레벨 중후반에 머물고 있는 이 때!
난 누구도 갖지 못한 조합으로 적들을 몰아쳐야만 했다.
“역시 듀얼 클래스가 답이야.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일루전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조합만이 답이거든!”
“그럼 두 번째 직업을 배우러 바로 가는 거야? 지금?”
“그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 볼 게 있지.”
“또 뭐가? 진짜 과감할 땐 미친 듯이 과감하면서도, 두들길 땐 어지간히도 두들긴 담에 건너는 놈이라니까?”
“새로 얻은 이 반지의 효과를 살펴봐야 할 거 아냐. 디바인이라 평생 템이 될 텐데, 내가 생각한 조합에 영향이 갈 수도 있잖아?”
“그럼……?”
“딱 정령왕까지만 잡은 다음에 선택할 거다. 그러니 일단 어떤 놈을 봉인할 건지부터 알아봐야지!”
* * *
어떠한 정령이라도 제약이 없다.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보스 몹인 ‘정령왕’을 봉인하는 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인기 있는 필드 보스 몹을, 아무 때나 찾아간다고 만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음…… 봉인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식이다, 이거군?”
현중이에게 줄 스킬북에 그림자 밟기를 각인해서 넘겨준 후, 나는 곧바로 센츄라 화산 지대를 찾았다.
내 애룡인 훼라리를 테이밍한 이곳에, 화염 정령들이 몬스터로 리스폰됐기 때문이었다.
* 특수 스킬 ‘정령 봉인(!)’ 사용 가능: 현재 ‘불의 중급 정령’ 봉인 중
- 화염 내성 +5%, 근력 +20
조금 전 길가에 돌아다니는 한 불꽃 도마뱀을 몇 대 때린 후, 곧바로 스킬을 사용해 반지에 봉인시켰다.
테이밍 몬스터와 비슷한 방법이었지만, 구속의 숨결 같은 보조 템이 필요하지 않았고 홀로 잡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제약도 없었다.
상당히 쉬운 조건.
하지만 가둔다 하더라도 아무나 소환할 수 없다는 제한이 남아있었다.
* 자신의 총 스탯의 합보다 봉인된 정령의 스탯이 낮아야만 소환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정령왕이 봉인된 반지를 건네받는다 하더라도, 아무나 소환할 수는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었다.
‘랭킹 1위 상태. 거기다 올 스탯을 올려주는 템과 업적을 몇 개나 얻었는데…… 내가 소환 못 할 리가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안 된다면 타연의 그 누구도 소환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일단 정령왕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이 반지의 효과를 먼저 살펴보기 위해 아무거나 잡아 넣어봤다.
그랬더니 봉인과 더불어, 정령 속성에 따른 새로운 옵션 효과도 추가로 부여됐다.
“정령 소환!”
발동어를 외치자, 반지가 붉게 빛나더니 한 정령이 쑥 빠져나왔다.
<불의 중급 정령 살만>
이곳 사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꽃 도마뱀.
내 권속이 되어 소환된 녀석은, 마치 나를 보호하듯 맴돌았다.
[살만(불의 중급 정령), Lv. 310]
* HP: 12500/12500 * MP: 2500/2500
* 공격력: 895 * 물리 방어력: 750 * 마법 방어력: 832
* 전용 스킬: 화염 발사(!)
“생각보다 약하긴 하지만 그거야 정령왕은 다를 테니 상관없고……. 이러면 한 번에 펫을 하나 더 소환할 수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건가?”
소환을 유지하느라 마나가 지속해서 줄어들었다.
하지만 중급 정령답게 전혀 위협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시 소환으로 끝나는 게 아닌, 지속 소환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이 더욱 고무적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마치 펫과 같이 전투뿐만 아니라 사냥 시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디바인이라 서버에 딱 한 명뿐이겠지만…… 정령술사가 이걸 보면 완전 빡치겠는데?”
타 직업이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니?
물론 소환계열 특화 직업인 정령술사에겐 정령을 활용할 수 있는 많은 고유 스킬들이 있다.
하지만 솔플 최강자 중 하나로 만들어준 정령 소환을, 템 하나로 가능하단 사실은 어이없는 일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난…… 정령술사들은 아직 꿈에도 꾸지 못하고 있는,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이었으니 더더욱!
“그나저나 중급 정령을 봉인했는데도 이런 추가 옵션이 주어지는데…… 정령왕을 가두면 어떠려나? 확실히 이걸 먼저 확인해보고 테크를 타는 게 맞다니까?”
하도 정신없는 스케줄을 살고 있느라 놓치기 쉬운 것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분히 돌아볼 줄 알아야만 나중에 후회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그중 하나였다.
[업적: 금지를 개척한 자(S)]
* 타연에 존재하는 금지를 해금시킨 사람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능력치 +30)
* 업적 효과로 새로운 금지를 발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실명’ 면역)
* 금지를 추가로 개척할수록, 이 업적은 더욱 뛰어난 효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혼란’ 면역)
예전에 시공 포탈을 설치하고 얻었던 업적.
이 업적에 새로운 효과가 하나 더 추가됐단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것도 무려 ‘디버프’ 하나를 완전히 면역시킬 수 있는 엄청난 것이!
‘생명의 숲을 오픈한 게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역시 S급 업적이라 그런지 추가되는 수준이 장난 아니구나!’
이 업적을 가지고도, 후에 전체 알림창을 통해서 생명의 숲이 대륙의 4번째 금지였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당시엔 이 사실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다시 확인해보니 업적의 세 번째 효과 때문에 하나의 효과가 추가되어 있었다.
물론 마법 방어력이 워낙 높은 내겐 별 쓸모없는 효과로 볼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모를 일이었다.
‘업적을 통해 이 정도 효과가 주어질 줄이야……. 이건 완전히 나보고 그 테크를 타라고 등 떠미는 수준이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환한 정령을 테스트하는 도중, 갑자기 희소식이 날아왔다.
[라스트챤스: 드로 형님. 어디세요? 지금 당장 테네시 지역으로 가보세요!]
[산드로: 어? 왜?]
[라스트챤스: 아까 부탁해두셨던 리스폰 소식이여! 떴어요 떴어!]
[산드로: 정말? 바로 갈 테니까 시간 좀 끌어줘!]
미리 길드원들과 피닉스 길드에 부탁해둔 리스폰 소식.
그 덕분에 직접 순찰 돌 필요 없이 대기 중이었는데, 바로 연락이 전해졌다.
‘테네시 지역이라면…… 보나 마나 바람의 정령왕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