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정령왕 (3)
내심 번개의 정령왕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른 배리어가 동일 속성 마법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처럼, 새로 익힌 라이트닝 배리어엔 그게 적격 같아 보였기 때문.
하지만 반지엔 어떤 정령이든 담았다가 삭제할 수 있었으니 가릴 필요가 없었다.
정령왕은 필드 보스답게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특정 조건을 갖추며 가두는 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
한시가 바쁘고 해야 할 건 산더미 같은 나로선, 일단 속성 상관없이 아무 정령왕이나 가둬서 스펙부터 확인해보는 게 우선이었다.
난 빠르게 마을 공간이동술사를 찾은 다음, 중립 왕국인 페이센에 위치한 테네시 지역으로 이동했다.
휘잉!
“훼라리 소…… 아 참, 여기선 소환해봤자 날 수가 없었지?”
이동 후, 습관적으로 훼라리부터 소환하려다 멈췄다.
몇 번 찾지 않았던 터라, 이곳의 특성을 잠시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테네시 벼락 언덕.
일명 유저들로부터 ‘폭풍의 언덕’으로 불리는 지역.
항상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태풍과 같은 강풍 때문에, 이곳은 특이하게도 비행이 제한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센츄라 화산 지대와 같이 필드 보스가 리스폰되기를 기다리며 순찰만 도는 인원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물론 레드 드레이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리스폰 텀이 길었지만 말이다.
“이쪽이에요!”
“오, 땡큐!”
언덕으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서 라챤이와 현중이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합류하며 물었다.
“여기엔 번개의 정령왕도 번갈아 뜬다고 알고 있는데 아깝네……. 아무튼, 뜬지는 얼마나 됐어?”
“이제 막 3분도 안 지났을 거예요. 피닉스발 제보라 확실해요.”
“끝나면 제보비 좀 두둑하게 챙겨드려야겠네. 일단 한시가 급하니까 다들 어서 붙어!”
비록 날 수는 없을 지더라도, 이곳에서 나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유저는 없었다.
왜냐면 나에겐, 어지간한 비행 탈 것보다 빠른 이속을 자랑하는 최고급 지상용 펫도 있었으니까.
“램보 소환!”
탐스러운 은빛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 늑대.
남들은 갖고 싶어 안달이겠지만, 훼라리 때문에 늘 찬밥 신세인 램보를 소환해 올라탔다.
서둘러 내 뒤로 탑승하는 라챤이와 현중이.
둘을 뒤에 태운 채, 곧바로 필드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옷! 저거 프로스트 울프 아냐? 뭐지, 펫인가?”
“버닝스타잖아! 갑자기 여기엔 왜 왔지??”
“킁! 정령왕 떴나 보네!”
제법 험준한 비탈길.
언덕 중턱에 있는 광산에 제법 큰 인던 하나가 있어, 지나다니는 유저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를 발견한 몇몇 파티가 뒤따라왔으나, 날듯이 뛰어 올라가는 램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전부 낙오됐다.
“형님, 여기서 오른쪽이요!”
휙!
“저기 저 바위 너머요!”
폴짝!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을 뚫으며, 다른 유저라면 한참을 돌아서 올라갈 길을 단숨에 뛰어오르고 가로질렀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짧은 시간 만에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오! 다행히 아직이네!”
“그러게. 확실히 우리가 뜨자마자 왔나 보다!”
세찬 바람의 근원지.
사냥할 몹들이 없어 원래라면 유저들이 잘 찾지 않는 이곳 정상의 돌무더기 사이로…….
언제 봐도 멋지고 황홀한 외형의 보스 몹 하나가 배회하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로키네>
날개를 느릿느릿 펄럭이며 저공 중인 하얀 매.
십수 미터는 거뜬히 넘어가는 거대한 몸체와 반투명한 몸 위에 떠올라 있는 ‘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태어나 처음으로 득템했던 레전더리 템의 이름이 선명했다.
홍당무와 같은 바람 테크를 탄 마법사들이 가장 애정하는 반지.
무려 2억 가까이에 팔려, 초창기에 내게 아주 커다란 도움을 줬던 템에 분명 저 이름이 적혀있었다.
‘피닉스 길드원이 둘, 나머지는…… 전부 합쳐 열 명 정도인가? 다행히도 태성은 없구나.’
다른 필드 보스들과 달리, 모든 정령왕들은 선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유저들은 가까이에 붙어서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아마도 함께 잡을 유저들을 불러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
램보로 추월한 유저들이 분명 적지 않았으니,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바로 붙을게! 라챤이 넌 여기서 내려!”
“넵!”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나는, 다시금 램보를 조종해 실로키네에게 달려들었다.
운 좋게도 아직 누구도 레이드에 도전한 상태가 아니었으니, 되건 말건 일단 선공부터 때려 놓는 게 최우선이었다.
‘뭐, 300 중반 렙들도 잡는 걸 내가 못 잡을 리 없겠지만!’
보통 이렇게 거대한 필드 보스는 레이드에 대규모 인원이 필요했다.
피통이 많을뿐더러, 오크 로드 줌바카와 같이 대규모 광역 스킬을 난사하는 까다로운 패턴을 보이기 때문.
하지만 고작 이놈을 상대로 겁을 먹기엔, 지금의 난 너무도 강해져 버린 상태였다.
“간만의 나들이를 방해하는 이여!”
워낙 몸집이 커서, 당장은 때릴 부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붙자마자 녀석의 다리를 공격하자, 놈이 안광을 붉게 밝히며 외쳤다.
“그래? 그럼 어쩌면 이게 마지막 나들이겠네. 넌 오늘부로 나한테 잡혀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놈이 뭐라 반응하건 말건, 3인 레이드가 시작됐다.
픽! 픽! 픽!
거리를 띄운 채 연속으로 날아오는 화살.
하나하나가 강력한 데미지를 품고 있는 라챤이의 원거리 공격이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날아왔다.
“키잇!”
그러자 잠시 날 공격하던 실로키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라챤이를 향해 날아갔다.
“어? 드로가 어그로를 뺏겼어?”
처음 보는 상황에 당황한 듯 외치는 현중이.
분명 레이드 초반이라 랜덤 타겟팅 때문은 아니었다.
나도 속으론 놀랐으나 침착하게 자버프를 사용하고 녀석의 꽁무니를 향해 공격했다.
“재빠른 몸놀림!”
순식간에 증폭된 공속으로 평캔 공격을 섞어 넣자, 다행히도 어그로는 바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로키네의 스펙을 살펴보고자 평타만 쳤다 하더라도, 이렇게 DPS가 딸려서 누군가에게 어그로를 뺏기게 된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암만 라챤이가 6드라코닉 보우에 랭커라 해도…… 어그로를 뺏기다니? 이대론 진짜 안 되겠구나!’
원래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한 번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사실 400레벨을 찍은 다음, 의외로 새로 익힐 도둑의 고유 스킬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것이 뜻하는 건 하나.
더는 1차 직업으로 얻을 수 있는 고유 스킬은 앞으로 없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했다.
- 더 강력한 스킬을 얻고 싶으면 전직을 하거나, 다른 직업의 고유 스킬을 배워야 한다.
막 400레벨을 달성한 내게 이 사실은, 마치 은연중에 일루전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쉬쉭! 쉭! 쉭!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통감했던 일.
난 당장 눈앞에 있는 실로키네에 집중하기 위해, 양 손의 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애써 그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
“휘돌아라!”
[마나 쉴드가 6,553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상태 이상 ‘넉백’에 저항합니다.]
유저가 사용하는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토네이도.
갑자기 녀석이 사용한 광역기에, 곁에 있던 현중이는 물론 조금 떨어져서 구경 중이던 다른 유저들까지 전부 넘어져 버렸다.
하지만 내게 마나 쉴드가 있는 한, 넉백과도 같은 물리 상태 이상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레벨 차이가 나나? 이 정도면 배리어를 켜도 괜찮을지도……?’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는 라이트닝 배리어.
그래서 배리어를 활성화한 상태로 레이드하는 건 너무 허세 같아 자제했는데…….
생각보다 정령왕의 공격과 마법들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한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 녀석은 본래의 스펙이 아니라, 상당히 ‘너프’ 당한 채로 현신한 상태였다.
[산드로: 분명 다 잡아갈 때면 볼텍스 수십 개를 소환하고 사라진다고 했지?]
[라스트챤스: 맞아요. 그때 많이들 죽는다고 들었어요. 공식적으론 잡히는 게 아니라 정령계로 역소환된다는 설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산드로: 알겠다. 그럼 딱 그때 맞춰서 잡아넣으면 되겠네.]
아직 정령술사인 유저는 최상급 정령도 소환하지 못하는데, 벌써부터 정령왕이 등장해 잡히는 건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투 메르타스의 케이스처럼…….
일루전은 다소 약화된 버전이라는 설정을 가미해, 원래라면 세계관 속 강자에 속하는 몬스터들이 일찍 등장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령왕, 피닉스, 히드라, 드래곤 등을 비롯해…… 최근에는 마계의 군단장에 이르기까지.
유저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멋진 외형과 스킬을 선보일 보스 몹들을, 초반부터 아낌없이 풀었다.
‘괜히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쥬얼 쇼크란 소리를 달고 다닌 게임이 아니라니까.’
특히 오픈된 지역 곳곳에서 뜨는 각 속성의 정령왕들은 인기가 높았다.
선공을 하지 않는 터라, 1년 전까지만 해도 유저들이 구경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보스 몹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
레벨이 많이 상향평준화된 지금은, 그저 동네북이자 걸어 다니는 보물 상자에 불과했다.
물론 난 남들과는 좀 다른 목적으로 이놈을 찾아왔지만!
[난도질!]
도통 줄어들지 않는 MP.
그래서 굳이 쓸 필요는 없었지만, 하나둘씩 모이는 유저들이 더 쌓이기 전에 후딱 잡을 생각으로 버프를 돌렸다.
동시에 라이트닝 배리어도 켜서 뇌전 데미지도 추가로 넣었다.
“폭풍 연사!”
“투쟁의 오라!”
내 이런 변화를 보고 현중이와 라챤이도 막판 딜을 먹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실로키네의 주변엔 검은색의 회오리바람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라스트챤스: 볼텍스예요! 곧 끝나요!]
디바인 반지 ‘태초의 약속’에 정령을 봉인하는 방법.
테이밍 몬스터처럼 혼자 할 필요는 없었지만, 체력을 10% 미만까지 깎아야 하는 조건은 동일했다.
어느새 십여 개가 넘어가기 시작한 회오리바람.
난 실로키네가 드랍 템을 남기고 사라지기 전에, 반지를 낀 오른손을 내밀며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오는 동안 먼저 시험해봤던 살만은 삭제한 터라, 모든 조건은 완벽히 갖춰진 상태였다.
“정령 봉인!”
[조건을 충족하여 대상을 반지 안에 봉인합니다.]
쉬이이익!
거대하고 위엄차며 고귀한 존재, 정령왕.
하지만 빨려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려는 듯 날개를 세차게 펄럭이던 실로키네는, 이내 램프의 지니처럼 반지 속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와, 성공한 거냐?”
“어. 타이밍 딱 제대로였는지, 원큐에 성공이다!”
“대박이네요, 형님!”
“야야, 쉿 쉿! 다들 눈치채겠다, 목소리 좀 낮춰!”
“앗, 네네.”
실로키네와의 전투로 떠들썩하던 정상이, 한순간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으로 잠잠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유저들은, 방금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보지 못한 듯 딴소리를 해댔다.
“뭐야, 거진가 본데? 뭘 줍는 모습이 안 보여.”
“잘 뜨지도 않는 필드 보스인데 거지일 리가……. 근데 이번엔 뭔가 좀 다르게 사라진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라스트챤스: 형님, 어때요? 뭔가 좀 변했어요?]
[산드로: 여기는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귀환해서 말해줄게. 제보자 아이디 좀 알려줘 봐. 난 사례금좀 드리고 바로 뒤따라 갈게!]
당장 확인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이미 성공한 상태.
차분히 레이드의 뒤처리를 마무리 짓고, 아베르 성에 귀환했다.
“드디어 정령왕의 주인님이 오셨네요! 와, 대체 보스 몹을 몇 개나 가지시려는 거예요? 이번엔 엄연히 네임을 가진 필드 보스 아니었어요?”
“진짜 아무리 봐도 이 자식은 운빨 터진 놈이야. 암만 디바인 템이라도 정령왕을 봉인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돼?”
반겨주려 기다린 줄 알았더니,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채 줄곧 시샘하고 있었다.
난 그런 둘 곁으로 다가가서는, 무심한 척 시크하게 외쳤다.
“실로키네 소환!”
더 두고 볼 게 있으랴?
테네시 언덕 정상에서 봤던 위엄찬 그 모습을 이곳에서 다시 재현해 놀래켜 주려 했는데…… 실패했다.
“뭐야, 낚은 거야? 제대로 해봐. 가까이서 구경 좀 다시 해 보게.”
그런 내 모습에 현중이가 반응해왔으나…….
“어라, 소환이 안…… 되네?”
“뭐? 왜? 아까 다 정상적으로 되는 거 확인하고 갔던 거잖아!”
“아직 자격이 모자라데……. 미친, 이거 얼마나 센 놈이길래 이 모양이야? 레벨은 낮은 거 아니었어?”
난 멍하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알림창을 보고는 허탈하게 말했다.
[현재 총 스탯의 합이 봉인된 정령의 스탯의 합보다 낮아 소환할 수 없습니다.]
각종 템과 업적 등으로 뻥튀기된 스탯이 얼마인데…….
고작 300레벨 중반들도 잡을 수 있는 보스 몹보다 낮다니?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맞아버려서, 애써 잡은 정령왕을 써먹지도 못하게 됐다.
‘이러면 정령왕은 다시 버리고, 당분간은 최상급 정령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
아쉬운 결과에 망연자실해 멍하니 반지만 보던 순간.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설명 창에, 새로운 정보가 추가됐단 사실을 발견했다.
* 특수 스킬 ‘정령 봉인(!)’ 사용 가능: 현재 ‘바람의 정령왕’ 봉인 중
- 바람 내성 +20%, 민첩 +100, 물리 공격 회피율 +10%
“뭐야?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