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천계 입성 (1)
‘새 출발이라…….’
어감부터가 좋았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줄곧 앞서나간 태성의 뒷모습만 쫓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직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
시공의 틈새와 같이 다리우스가 맛조차 봐보지 못한 곳.
드디어 우리는 신규 필드 ‘천계’에 입성해, 새 역사를 써 내려갈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정말 하루하루가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요…….”
“버티기 쉬웠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되니까, 누가 진짜 우리 편이었는지 결국 다 드러나더구나. 새 술은 새 자루에 담는다고…… 큰일을 앞두고 그런 놈들을 쳐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헉, 형님. 갑자기 그런 말 쓰시니까 진짜 나이 차가 확 느껴지네요. 겜 속이라 잘은 못 느끼고 있었는데 말이죠.”
“뭐라고? 허헛, 이 녀석이?”
태성 라인이 탄생한 직후에도, 아직 노선을 명확히 정하지 못한 세력들이 있었다.
놈들이 굳이 예비 작업할 필요를 못 느꼈던 애매한 수준의 유저들.
선택받지 못한 그들은, 결국 하는 수 없이 피닉스 라인의 밑으로 들어오게 됐지만…… 당연히도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태성에게 초대받지 못했단 것은, 그들이 그은 선 밖으로 내몰렸다는 뜻.
그래서 억지로 반대편에 선 것에 불과했으니까.
소수지만 태성을 상대로 큰 활약을 벌이는 우리 버닝스타.
그리고 전통 있는 명문 길드이면서 최근 들어 무섭게 급성장한 피닉스 길드.
그들은 이 둘의 조합과 선전을 믿고, 하는 수 없이 우리에게 합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닉스 라인에만 혜택을 주기는커녕, 개척한 모든 콘텐츠를 공유하고 심지어 세금마저 풀었다.
또한 내세웠던 기치와 달리, 버닝스타는 태성과의 필드전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콘틀랑에서 거하게 붙을 뻔하긴 했지만 불발.
필드 곳곳에서 피닉스 라인이 태성 라인에게 처참히 당하는 매 순간에도, 태성의 대적자인 ‘산드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깜도 되지 않을 쌈 같으니까 접으려는 거 아냐?
-그러게. 이미 번 돈만 해도 어마어마할 테니 가진 템만 팔아도 미련 없겠지. 힘들게 싸움할 필요가 뭐 있겠어?
-지들이 시작한 싸움도 안 하는데 우리만 계속할 필요 있어? 난 피닉스에서 빠질래. 엊그제 태성이, 앞으론 중립들은 안 건들겠다고 공표했잖아!
-또 태성 놈들 분탕질이 시작된 거냐? 버닝스타가 잠수타면 얼마나 탔다고ㅉㅉㅉ
하지만 그 모든 건, 전부 ‘일부러’ 한 행동들이었다.
물론 앞서 신규 콘텐츠를 차지하고자 잠시 성장에 집중한 면도 있었지만, 애초에 지옥불 형님과 전부 합의됐던 일.
덕분에 우리는, 이번 기회에 끝까지 함께 갈 ‘옥석’을 가릴 수 있었다.
-저희 길드는 이제 그만할게요. 매일같이 필드전만 벌이다 죽고 템도 떨구고……. 더는 못 버티겠어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해볼 만은 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상대도 안 되는 줄은 몰랐어요. 네임드들은 다 어디 가고 잔챙이들만 가지고 뭔 쌈을 하겠어요?
-오늘부로 저희 통천 길드는 태성 라인에 서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게임인데…… 좀 아니꼽긴 하지만, 이제부턴 좀 편하게 놀아보려고요.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건 미안합니다.
얼마 전부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닉스 라인을 떠나간 길드들.
단 몇 주의 필드전도 버티지 못할 각오였다면 이렇게 빠져주는 편이 나았다.
이런 부류는 잠재적으로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언제라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피닉스 따위는 주저 없이 버리거나 이용해 먹을 테니까!
“아무튼, 괜히 시간만 낭비한 건 아니었어요. 그동안 저도 재정비하고 새 캐릭에 적응할 시간을 벌었고, 길드원들도 충분히 레벨업했으니까요. 이제야 저희 쪽에 합류한 보상을 나눠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런 놈들까지 챙겨주는 건 다행히 예방했잖아요! 특히 태성으로 넘어간 놈들은 무척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래. 더 미루는 건 무리였는데 잘된 일이지. 보름 사이에 거의 1/4은 떨어져 나간 것 같은데…… 괜찮다. 한 번 나간 놈들은 다신 우리 라인에 합류할 수 없을 테니까. 함께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자.”
“형님…….”
“응? 왜 그러냐?”
“그런 노땅 같은 말투 좀 고치실 수 없나요. 요즘 누가 땅을 쳐요, 땅을 치긴!”
“하핫! 요 녀석이 자꾸? 알겠다. 앞으론 고쳐볼 테니까 시간이나 좀 말해 봐라. 언제가 좋겠니?”
“언제나 그렇듯 새벽이 좋겠죠. 다들 한숨 푹 자고 4시에 뵙기로 해요. 그때부터 다이렉트로 쭉 달려야 할 테니까요!”
“인원은 전에 말했던 대로?”
“네. 12인 한도로 최정예로만 부탁드려요.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진 몰라도…… 진입 초반은 보안이 생명이니까요.”
퀘스트가 완료되면 생명의 숲과 같이 모든 유저들에게 오픈될 천계 지역.
하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그 사실을 숨길 수만 있다면, 많은 것들을 선점할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예상만 적중한다면, 그 후에도 우리가 한동안 앞서나가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그렇게 세부 사항들을 조율한 뒤 각자 할 일을 마치고, 우리는 평소보다 빠르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꿈틀이가 파티에 초대되었습니다.]
[산드로: 오늘의 특별 게스트로 한 분 더 모셨습니다.]
[꿈틀이: 안녕하세요, 버닝스타 여러분.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됐네요! 반갑습니다ㅎㅎ]
[축복받은얼굴: 어서오세요~~]
[대탐험시대: 꿈틀이 ㅎㅇㅎㅇ]
[라푼젤: 또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시간에 맞춰 우리 성을 찾아온 꿈틀이를 초대하자, 마침내 모든 멤버가 모였다.
인원은 모두 12명.
지난번과 같이 카이저 형님 커플뿐만 아니라 꿈틀이까지 부른, 풀 멤버였다.
핑크래빗도 부를까 했지만, 레벨이 상대적으로 워낙 낮은 편이라 그러지 않았다.
[꿈틀이: 새로 좋은 채집 장소를 찾으셨다고 부르셔서 온 건데.... 역시 오늘이 그날이었나 보네요?]
[산드로: 맞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올라가기만 하시면, 전혀 터치하지 않을게요!]
[꿈틀이: 뭐가 죄송해요? 이렇게 절 잊지 않고, 항상 챙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데요!]
이곳에 모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 중에 꿈틀이뿐.
다들 단단히 일러두어 푹 쉬고 접속한 탓에, 앞으로 10시간을 쉬지 않고 플레이해도 거뜬한 컨디션들로 보였다.
(나: 준비되셨죠 형님? 저희 이동할 테니 피닉스도 지금 출발하시면 됩니다.)
(지옥불: 알았다. 그럼 교황 앞에서 보자)
양측은 모두 준비 완료.
우리는 다 함께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페이센 왕국의 수도인 룬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각자 은신과 은신 망토 등을 활용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성지인 루이튼 교단에 들어와, 교황의 방 앞에 다다랐다.
여전히 인기 없는 곳에다 새벽인지라, 유저들이 더더욱 찾지 않는 교황의 방.
덜컥.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피닉스 라인의 유저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엇, 산드로 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감사합니다, 산드로 님. 오늘 갑자기, 이렇게 천계에 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네요!”
우리와 같이 소수로 이루어진 12인 파티.
이젠 한 길드 같이 느껴지는 피닉스의 두바이나 슈바이쳐, 댜크홀스 등의 모습.
그와 더불어 낯익은 얼굴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피닉스 라인의 든든한 두 축이 된, 화랑의 국선과 피스메이커의 유머스트다이가 각각 길드원 한 명씩을 대동하고 참여한 것이었다.
“여기서 두 분을 뵐 수 있어서 참 다행이네요. 혹시나 다른 길드들처럼 떨어져 나가셔서 못 뵀다면…… 정말 서운했을 거거든요.”
“피닉스 라인 탄생의 순간을 함께 했는데 그럴 수야 없죠. 아무튼 우리만 빡세게 싸우는 거 같아서 은근히 열 받았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군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드로 님.”
“아닙니다, 국선 님. 충분히 섭섭하실 만했죠. 대신 오늘부터는…… 다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도록, 태성 놈들을 열심히 잡아 족치겠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드로 님의 백대일 신화를, 직접 구경할 수 있는 건가요?”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려고 칼을 갈고 큰 희생을 치른 거니까요.”
“희생요? 무슨……?”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제루티안의 축복. 큰맘 먹고 그걸 사용했거든요.”
“네에?”
“헉!”
우리 길드원들밖에 모르고 있던 사실인 터라, 피닉스 측 유저들은 내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자 자, 혹시 누가 올 수도 있으니까 얘기는 천계에 가서 나누도록 할까? 드로야, 바로 시작하지?”
“네, 형님.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옥불 형님의 말에 난 짧은 인사를 마치고 루이튼 교의 교황, 안테로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안테로 님.”
“사명을 간직한 용자이자 신검의 주인인 산드로여. 어인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시네마틱 영상을 비롯한 타연의 숨겨진 스토리들, 그리고 타이탄의 봉인을 해제해줬던 안테로.
그 탓에 다른 유저들과 달리, 내게는 다른 멘트로 인사를 건네왔다.
“현재 대륙 곳곳에선 ‘마계’의 침공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전 대항할 힘을 갖추고자, 천 년 전 ‘신마전쟁’ 때와 같이 ‘신’들께 도움을 요청하려 합니다. 제게 천계로 향할 ‘포탈’이나 ‘길’을 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차 말했듯, 천 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최근 대륙에 다시 마나의 축복이 찾아와 포탈을 열 기반은 갖추게 되었으나, 그 시간 동안 천계로 이어질 방법은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아쉽지만 저로서는…….”
“이거면 되지 않을까요?”
난 교황의 말을 끊음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주나스로부터 받은 ‘고대의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이미 지난번 방문 때 한 차례 들었던 대사인지라, 구구절절 상대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 그건! 설마…… 마도 시대의 유물?”
“맞습니다. 천계와 이어줄 포탈을 열어줄 ‘고대의 스크롤’입니다. 비록 교황님의 ‘신성력’이 필요로 하겠지만요.”
“오오…… 그게 정말 유물이 맞다면, 천계로 향하는 ‘천문(天門)’이 천 년 만에 다시 열릴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아무 때나 드나들 수는 없겠지만…….”
[천계로 이어지는 천문을 개방하겠습니까? 한번 천문이 이어지면 위치를 변경하거나 닫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엔 NO를 터치했던 선택창.
하지만 이번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망설임 없이 YES를 터치했다.
[안테로에게 ‘고대의 스크롤’을 건네주었습니다.]
[안테로가 천문을 개방합니다.]
“어, 어? 얘 어디 가지?”
“그러게? 밖으로 나가는데?”
교황은 내게서 스크롤을 건네받자, 갑자기 항상 머물러 있던 방을 나섰다.
세계수를 회복시키던 메치아실 때와 비슷하게, 특정 조건이 갖춰지자 정해진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교황의 방이 교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는 점.
더불어 대성당 뒤편에 있는 조그만 원형 광장으로 향한 터라, 유저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거룩한 빛의 인도자, 루이튼 님이시여! 부디 이곳에 당신께 향하는 길을 내려 주소서!”
조그만 광장 안, 작고 오래된 오벨리스크 앞에 선 교황.
그가 두 손을 들고 크게 외치자,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내려와 교황을 비추고 사방은 신성한 빛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곧, 이곳에 있는 모두의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천계로 향하는 게이트 ‘천문’이 개방되었습니다.]
[업적 ‘천문 개방자’를 획득했습니다.]
“뭐야, 전체 알림창이 떴잖아?”
“에이, 이럼 암만 새벽이라도 다들 눈치채서 올 거 아냐?”
“그러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고 기껏 새벽에 조금만 모인 건데…….”
우리만 몰래 들어가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전체 알림창으로 천계의 오픈 사실을 공개해 버렸다.
그것도 친절하게, 누구라도 금세 찾을 수 있는 눈에 띄는 모습으로!
“이야…… 멋있다…….”
“포탈이 아니라 엘레베이터 아냐? 뭐야, 진짜 엄청 화려하네.”
하늘에서 내리꽂힌 한줄기 빛기둥.
오벨리스크에서 시작된 하얀 빛은 아무리 올려다봐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솟구쳐,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마나의 파동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어, 초라하던 작은 광장은 장엄하기 그지없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아직은 몰라요. 만약 제가 예상했던 게 맞기만 하다면…….”
“응? 드로야,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일단 서두르죠.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같은 말을 했던 교황.
그의 마지막 대사에서 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했고, 그걸 토대로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물론 아무 때나 드나들 수는 없겠지만…….
여러모로 시공의 틈새로 이동할 때와 비슷한 방법.
‘만약 천계란 필드 또한, 공틈과 같이 이동에 어떤 제약이 있는 곳이라면……?’
그렇다면 그곳은…… 태성 놈들에게 ‘천계’가 아닌 ‘천국’이 될 수도 있었다.
올라오는 족족, 내가 전부 죽여버릴 테니까!
[천계로 이동하겠습니까? 이동에는 정제된 마력석 2개가 필요합니다.]
[YES]
[천계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연달아 뜬 안내창은, 내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천계 재입장에는 48시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