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일인 통제 (1)
“어라? 드로 형님?”
갑자기 기대도 않던 내가 큰 날개의 반응을 이끌어내자, 사람들이 놀라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빠, 빨리 키워드 좀 다양하게 말해 봐!”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잠자코 좀 있어 봐요!”
설레발치는 현중이와 말리는 라챤이.
반면 이런 일엔 선수일 당당이나 카이저 형님은,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내가 잘 해낼 거라고 믿고 맡겨주는 것이었다.
“그곳은 이미 ‘심연’에게 ‘잠식’된 상태인 겁니까? 저희가 천계의 ‘회복’이나 ‘복구’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테터리욜은 가장 최근에 침식당한 텔로라 님의 도시…….”
“그리고요?”
“만약 심연에 잠식된 신석(神石)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위대하고 거룩한 분들의 은총과 우리 날개들이 힘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띠링!
하고, 퀘스트 획득 알림음이 울릴 만도 한데 잠잠했다.
분명 메인 퀘스트급 부탁이었는데 말이다.
“냄새가 나네 냄새가. 님도 그렇죠, 지옥불 님?”
“동감입니다, 카이저 님. 과연 천계는 단순한 필드가 아니었나 보군요.”
“네? 두 분 무슨 말씀이세요?”
스토리 공략이나 대화 스킬이 성장한 걸 은근히 뽐낸 것 같아 으쓱했는데, 바로 사그라들었다.
두 거물이 나누는 대화의 의미를, 짐작하기 힘들어서였다.
“테터리욜이란 지역이 침식당한 걸 탈환해 달라는데, 퀘스트는 주지 않는다? 이쯤이면 감을 잡아야지, 산드로.”
“넌 모를 만도 한데…… 이미 타연에 이같은 경우가 한 번 존재했었다. 바로 ‘공성전’이지. 매달 이루어지는 이 전투를 맨 처음 유저들에게 언급했던 것도, 바로 NPC들이었다.”
“그럼 두 분의 생각은……?”
“그래. 아직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이곳에도 공성전과 같은 점령 전투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확률로!”
랭커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점이 아이템과 업적이었다면…….
선두 길드가 누린 최고의 혜택은 성 점령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점령 성의 방어는 NPC들의 몫.
초창기 성을 점령한 길드들은 지금과 달리 훨씬 더 수월하게 성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미 전례가 있던 일.
천계 지역이 업데이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일회성 지역이 아니라면, 이렇게 지속적이면서 대규모인 콘텐츠가 있을 만도 했다.
그리고 타연에서 천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스토리적으로나 규모면으로나 한 번만 거치고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신석이라는 게?”
“아마 틀림없을 거다. 각 천계 지역의 중심에, 마치 각 성의 오벨리스크처럼 저런 돌들이 있는 거겠지. 이 탑에 있는 ‘저것’처럼!”
카이저 형님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
이 층의 한가운데에는, 웅장한 석상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쌍의 날개를 펼친 채 화려한 갑주를 걸친 천사 셋.
그들이 떠받치듯 머리 위로 올린 손들이 감싼, 새하얗고 커다란 ‘돌’이!
“놀랍게도 그대는 이미 심연에 물든 날개를 한 차례 정화한 적이 있군요. 어쩌면 위대한 분께서 말씀하신 자일지도…… 이곳은 우리 빛의 날개들이 힘겹게나마 지켜내고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테터리욜을 수복해줄 수 있겠나요? 제 힘으로…… 그 근방까지는 바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테터리욜 외곽 지역으로 순간이동하시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것이야말로 천문을 개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혜가 분명했다.
세계수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도네타의 인던을 클리어해야만 했는데, 엔젤 슬레이어 업적은 그곳의 보스를 잡고 얻은 보상이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천계의 첫 단계는 모두와 공유할 수밖에 없지만, 두 번째 단계만큼은 우리에게 먼저 허용해 주겠단 의미.
심연의 파편 조각도 아닌 파편.
그리고 천사들이 힘겹게 방어하고 있다는 심연의 몬스터들을 뚫는 게 결코 쉽진 않을 텐데…….
바로 중간을 건너뛰게 해준다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리가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제가 먼저 넘어가보겠습니다. 파랑이와 함께요.”
자진해서 먼저 나서는 대탐이.
시간이 많지 않은 터라, 일단 허락부터 하자 곧장 기파랑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곧 채팅창을 통해 정보를 전달해왔다.
[대탐험시대: 안전지대는 아니네요. 루네아 같은 도시 안은 아닌데, 아직 몹은 안 보여요. 일단은 안전한 것 같은데요?]
[산드로: 그래? 그럼 귀환 주문서가 캐스팅되는 지도 한 번 확인해 볼래?]
[대탐험시대: 캐스팅되네요! 사용 가능합니다! 흠…… 그리고?]
미지의 지역 탐험에 설레어 자칫 방심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가장 큰 화두가 ‘생존’인 것은 여전했다.
아직 몹들의 레벨대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안전 보장이 최우선!
하지만 레벨 제한이 350이란 걸 들었는데, 너무 조심만 하는 것도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돌아 오는 것도 가능하네요!”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대탐이.
그쪽에도 큰 날개라 이름붙인 천사가 하나 있었다고 전해왔다.
“다행히 위험하지도 않고 귀환도 되네요. 그럼 다들 이동하실까요?”
“먼저 이동하거라. 난 길드원들이 더 올라오는 중이니, 함께 이 도시를 더 둘러보마. 화랑과 피스메이커 분들도 업적이 없으셔서 함께는 가지 못할 테니.”
“그러세요? 흠…… 그럼 그렇게 하죠! 아직 이 루네아란 곳도 다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둘로 나눠서 살펴보는 게 낫겠어요.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남들보다는 정보를 더 빠르고 많이 얻을 수 있겠죠.”
“뭐가 됐건, 천계 지역에서는 저 신석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긴 하구나. 그러니 그와 관련된 것부터 중점적으로 조사해 보자.”
“흐음. 신석 쟁탈전이라…….”
어떤 혜택이 돌아갈진 모르지만, 지상의 성처럼 세금은 걷을 수 없을 테니 분명 다른 종류일 것이다.
그 순간, 이곳의 평화를 깨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무슨 쟁탈전이라고?”
저벅저벅.
그리고 뒤이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나의 숙적.
다리우스였다.
“급하긴 했나 보네. 정말 빨리도 달려왔구나, 다리우스.”
“쥐새끼들 마냥 새벽에 이게 뭔 짓거리지? 덕분에 잠자다 말고 접속하느라 화가 좀 나는데?”
“니 말 대로면 쥐새끼는 너 아냐? 남이 흘린 먹잇감에 눈이 돌아가, 자다가도 헐레벌떡 달려왔으니까.”
“산드로 이 개자식……. 여전히 터진 입이라고 잘도 나불대는 구나?”
“하하핫! 뭘 그렇게 화를 내? 정곡이라도 찌른 거야? 예전엔 고상한 척하려고 열심히 애쓰더만…… 이젠 바로 본색을 그냥 드러내네? 저번엔 살려달라고 싹싹 빌던 건, 벌써 잊은 거야?”
“그 입 안 닥쳐?”
간만의 만남인데 욕부터 박고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난 비웃음으로 화답해줬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건 여전하네. 이제 돈 좀 벌었다 이건가?”
“그러게. 신이 난 꼴 좀 봐. 그래봤자 도둑놈 새끼인 주제에.”
이어서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는 태성의 정예들.
일도양단, 홍길동, 홍당무 등의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확실히 단합이랑 기강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해. 이 새벽에 한 놈도 빠짐없이 금세 다 접속한 걸 보면.’
뿐만 아니라, 새로이 합류한 다른 랭커들도 계속해서 뒤따라 올라왔다.
아리스토와 제독, 그리고 바라기와 비상구, 성박휘, 아프지말자 등등.
한 자리에 랭커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인 건, 아마 타연 최초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맙게 됐네, 산드로. 신규 필드를 개척하려면 제법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었을 텐데, 그 고생을 우리 대신 해줘서 말야. 천계를 오픈하자마자 따라 올라와서, 기분은 좀 나쁘려나?”
어느새 다리우스의 앞잡이라도 된 양, 거대 길드의 길마라는 체통도 잊은 채 도발해오는 아리스토.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재수없게 느껴졌던 게, 괜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들 잠도 없나 봐요? 아니구나. 다들 곤히 자고 있는 걸 내가 억지로 깨운 거려나? 암튼 그건 미안하게 됐네요.”
“드로 저 새끼. 애써 침착한 척하지만 어지간히도 열 받았나 보구나? 이 천사들은 또 뭐야? 벌써 퀘스트 주는 NPC들까지 찾아내준 거야? 우리가 헤맬까 봐 친절하게?”
그리고 가장 앞에서 여전히 촐랑대는 홍길동.
어째 전투 때보다 더 치열한 공방전이, 서로의 입을 통해 벌어졌다.
전부 이곳이 ‘안전지대’였기에 가능한 일.
보다 못한 지옥불 형님이 정리를 위해 나섰다.
“지금 이게 뭡니까? 다들 애처럼 이러지들 마시고, 할 얘기가 있다면 필드에서 검으로 나누도록 하죠. 안 그런가, 다리우스?”
“오호…… 지옥불 님. 새로 구한 검이 제법 쓸 만하신가 보죠? 근데 정말 자신 있습니까? 그러다 필드에서 마주쳤다가, 들고 있는 그 검마저 떨구면 어쩌실려고 그러세요, 영감님?”
“저 개새끼가!”
녀석의 도발에 곁에 있던 두바이가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지만, 역시나 안전지대인 터라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형님, 어차피 상대해봤자 기분만 더러워질 테니 자리를 피하죠. 먼저 ‘그’ 지역으로 이동하세요. 이곳보다는 거기가 더 메인인 것 같으니까요.”
“……그럴까? 국선 님, 유머님. 그럼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분명 남겠다고 했던 지옥불 형님께 굳이 넘어가시길 권하자, 형님은 살짝 의아해하시면서도 내 장단에 맞춰주었다.
슝! 슝!
하나둘씩 라시엘을 통해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는 길드원들.
갑자기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건지 몰라,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놈들을 향해 말했다.
“다리우스, 그리고 너희 떨거지들아.”
“……?”
“앞으로도 열심히 해라. 계속 우리 뒤통수만 쫓는 짓을!”
그 말을 끝으로, 나 또한 선택창의 승낙 버튼을 터치해 테터리욜 지역으로 이동했다.
* * *
탓!
순간이동으로 도착하자마자, 서늘한 공기와 탁한 대기가 먼저 느껴졌다.
포근했던 루네아와는 확연히 다른 공간.
주변을 살펴보기도 전에, 먼저 도착해 있던 현중이와 라챤이가 다가와 물었다.
“뭐야, 드로야? 넘어가라고 해서 왔지만, 왜 놈들을 가만 두고 오는데? 어차피 거의 동시에 올라온 거, 뭘 하는지 곁에서 감시라도 해야지!”
“그러게요 드로 형님. 태성 놈들…… 그리고 특히나 다리우스는, 평소에 보기도 힘든 자식이잖아요. 놈을 가만히 놔주시다니, 형님답지 않은데요?”
“니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구나.”
“네?”
그래서 설명해줬다.
보이는 검은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따라서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뻔히 지켜보는 걸 알면, 놈들이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겠어? 필드에 나가면 대판 싸울 게 뻔한데, 놈들이 쪽수가 쌓이기 전에 그러겠냐고?”
“어…… 아마 그러진 않겠죠? 도시나 뒤지면서 부하들이 더 올라올 때까지 시간이나 끌겠네요.”
“그래. 그럼 그동안 다른 일반 유저들도 계속 올라올 텐데, 서로 시간만 버리는 셈이잖아. 우린 한시가 바쁜 몸인데 말야.”
“그러면 형님은 싸움 대신, 빨리 탐험이나 하고 퀘스트를 찾아보시겠단 말씀인 거세요?”
“인마, 다리우스란 월척을 봤는데 내가 그럴 리 있냐? 내가 이렇게 빡세게 겜하는 이유가 뭔데? 그 자식 잡으려고 그런 거 아냐! 근데 이 기회를 어떻게 버려?”
그러자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지옥불 형님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신 답해주었다.
“알겠다. 드로 넌 일부러 이곳으로 넘어온 거구나? 그곳을 떠났다는 걸 직접 보여줘서, 무의식 중에 방심하게 만드려고.”
“맞습니다 형님. 역시 제 맘을 알아주는 건 형님 밖에 없네요.”
내가 아는 다리우스는 누구보다도 쫄보인 자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또 무척이나 많은 놈.
신규 필드인 천계에 올라온 이상, 절대 아무 소득도 없이 내려갈 인간이 아니었다.
“놈들도 올라오면서 재입장 대기 시간을 확인했을 테니 그냥은 안 내려갈 거예요. 그러니까 분명 사냥하려고 필드로 나가볼 겁니다. 도시엔 보셨다시피 뭐 찾아볼 것도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놈들이 필드로 나갈 쯤에 치자는 뜻이냐?”
“타이탄을 갖고 있는 놈이니까 쉽게 죽진 않겠죠. 그래도 틈을 노려서 뒤치기 할 겁니다. 저희가 힘들게 오픈한 천계를, 놈들이 맘 놓고 활보하는 꼴은 못 보겠거든요.”
“그럼 같이 가요. 저희도 함께 싸우죠!”
그러자 곁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당당이가, 당장 은신을 쓰며 말했다.
“아니, 여러분은 다함께 이곳을 공략하고 계세요. 가는 건 저 혼자 합니다.”
“네? 혼자요?”
“그래, 나 혼자. 입만 산 그 자식들한테 제대로 가르쳐 주고 올게. 전투는 어떻게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