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신석 (1)
예전 어느 연예인의 인터뷰를 읽었던 게 문득 생각났다.
스타가 됐더니 SNS에 평범한 글 하나만 적어도, 금방 기사가 되어 올라오게 됐다고.
일거수일투족.
누굴 만나거나 무슨 일을 벌이거나…… 혹은 말 한마디만 해도 그게 바로 이슈가 되는 삶.
지금의 나 또한,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리온티비: 중단했던 무차별 PK를 다시 자행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올타김태훈: 산드로님! 정말 태성 길드와의 싸움이 목적인 겁니까? 혹시 천계를 독식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견제하시는 건 아닌지요?)
(김석용: 안녕하세요, 산드로 님. 언제 시간이 좀 나시면 오랜만에 인터뷰 좀 괜찮을까요? 최근 로만 전자와 관련된 흥미로운 소식을 들은 게 있어 확인도 드릴 겸 뵙고 싶군요.)
접속한 이후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귓속말들.
그중 태반은 일부러 차단해놓지 않은 타연의 게임 기자들이었다.
‘난리가 났구나, 난리가.’
전부 접속 전에 내가 짧게 올린 글.
그 경고 글 하나로 비롯된 야단법석이었다.
사실 언플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내 의사를 직접적으로 밝힌 글은 단숨에 핫이슈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내 광오했던 선포는, 금세 모르는 유저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미친 산드로 개관종 새끼. 천계를 대신 오픈해줘서 칭찬 좀 해줄까 싶었는데…… 역시나 개자식이라니까? 웃기지도 않아 진짜. 무슨 지 혼자서 우리를 통제하겠다고…….”
“쉿! 조용해. 그 자식 여기 어딘가에 숨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 우리 숫자가 몇 명인데…… 오라 그래! 달려들면 오늘 내가 신검 먹는 거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너보다 먼저 온 선배들도, 다들 그런 소리하다가 벌써 오백 명이나 지상으로 돌아갔단다.
“너 길드 공지 안 읽었냐? 백 명이 몰려있어도 외곽만 치고 빠진다잖아!”
“아 몰라. 우리가 이렇게 사리면서 겜하려고 태성 라인에 들어왔냐? 뭔 소린지 알겠으니까 작작 좀 해라. 응?”
한 번 죽으면 48시간 동안 다시 올라오지 못해서 그런지…….
이곳에서 마주치는 태성 라인의 유저들은 하나같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는 수 없었다.
‘너희들 한 명 한 명 전부에게, 내 경고가 농담이 아니었단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켜주는 수밖에!’
난 차고 있던 제사장의 머리 장식을 요정왕의 서클릿으로 스위칭했다.
그리고 연신 입을 놀리고 있던 녀석들 앞에서, 조용히 은신을 풀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오, 수고 많았다! 그래, 잡을 만큼 잡았고?”
“네. 태성의 엔간한 거물들은 한 번쯤 거의 다 잡은 거 같아요. 이젠 잔챙이들밖에 남지 않아서 이리로 넘어왔죠.”
“고생하셨습니다, 드로 형님!”
“와, 이 자식 아이디 새빨개진 거 봐라. 이러다 게임 접는 날까지, 머더러를 쭉 못 푸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
같은 라인이라고 다들 한 길드로 통합된 건 아니다.
수많은 길드들이 ‘태성 라인’이란 이름 하에 모였지만, 사실 시스템적으로 뒷받침되는 건 없었다.
그저 태성 길드와 동맹을 맺고, 길드 마크를 통합해서 아군으로 구분하고 있을 뿐.
그렇다 보니 당연히 나도, 우리 길드와 전쟁 중인 태성 놈들만 골라 죽일 순 없었다.
분명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단 유저만 죽였지만, 머더러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나저나, 여기엔 몹이 참 많기도 하네요.”
“그렇지? 그리고 공틈처럼, 하나하나 강력한 놈들이라 파티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곳이야. 오죽하면 필드 보스인 천사장이, 몸집은 더 작다니까.”
라시엘을 통해 테터리욜 지역으로 넘어온 후, 마중 나온 당당이를 따라 이곳 폐(廢)도시에서 동료들과 합류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근 10시간 가까이 이 지역을 탐사 중인 길드원들.
아무리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런 정보가 없다 한들, 이들 중에는 타연 최고를 다투는 개척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엄살과 달리 아무런 소득도 없는 건 아니었다.
“침식된 날개. 이놈들은 각 신들의 천사장이었던 놈들이야. 이름에 ‘데아’가 섞여 있는 것들이지.”
“아, 그래요?”
“지금까지 발견한 천사장은 모두 2명. 한번 다가가 보긴 해봤는데, 처음부터 상당히 강력한 공격을 해대서, 제대로 시동 걸어 보진 않았다. 겨우겨우 어그로에서 벗어났거든.”
카이저 형님의 설명.
확실히 일반 몹들이 많은 필드인 만큼, 이곳엔 필드 보스도 제법 있는 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역시, 차후 유저들이 이곳을 선호할 만한 요인이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이미 놈한테 몇 대 맞아봤거든요.”
“뭐? 혼자서?”
“그럼 제가 태성 패거리들한테 어떻게 깽판 쳤던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당연히 보스 몹을 이용했죠.”
“하긴. 그게 네 플레이 방식이었지.”
유저간의 전투에 필드 몹이나 보스 등을 데려와 난장판을 벌이는 짓.
나만의 방식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많은 유저들이 쓰는 전투법이었다.
가만히 유저들끼리만 전투하면, 데미지라든지 스킬 등을 파악하거나 대처하기가 쉽다.
한마디로 서로의 격차가 충분히 예상되고 뻔한 전투가 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몸들이 껴서 의외의 데미지나 상태 이상기, 어그로 등등의 변수들이 추가되면, 개인의 순간적인 판단이나 임기응변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즉, 정말로 호쾌한 전투와 스릴을 즐기고 누가 죽어 나가는 필드전이 하고 싶다면, 필드 보스를 끼고 싸우는 전투만 한 게 없었다.
“근데요, 드로 형. 저희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천사장 급을 퍼킬하면 타이탄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니?”
곁에 가만히 서 있던 당당이가 도중에 껴들며 말했다.
“직전 인던이었던 영웅의 전당에서도 부러진 날개를 깼더니 ‘로파미엘’을 드랍했잖아요. 인던에서도 나오는 걸 필드 보스가 안 줄 것 같진 않아요. 더군다나 놈들은…… 다른 보스들처럼 괴물형이 아니라, 보기 드문 인간형 보스 몹이기도 하고요.”
“흠……. 확실히 일리 있는 추측인데?”
본래 게임 속 설정에서는 타이탄, 즉 ‘마장기’는 신이 만든 게 원류(原流)였다.
그걸 마도 시대의 인간들이 흉내 내 만든 것이 타이탄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거고.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준 최초의 타이탄들.
극소수만 그 기원을 알고 있는 ‘로드급’ 타이탄들 설명엔, 분명 신의 천사장들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똑똑히 적혀있었다.
“내 신창 룬 페이서에도 텔로라의 천사장을 베껴 만들었다는 히스토리가 적혀있다. 필드 보스가 몇이나 있을진 모르지만…… 확실히 타이탄, 그것도 분명 솔저급 이상을 얻을 확률이 높다.”
카이저 형님마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더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세상은 내 뜻대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니까? 진짜 타연에 나만큼 바쁜 유저도 없을 거야.’
다시 본격적으로 태성을 대상으로 한 PK 모드로 전환했지만.
눈앞에 주인 없는 타이탄들이 걸어 다니는 걸 그냥 지켜만 볼 순 없었다.
필드 보스 레이드.
힘들게 천계를 오픈한 보람이 없어 아쉬웠는데, 아직 유저들이 이곳에 건너오지 못하는 새에 퍼킬에 성공한다면 보상은 충분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타이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럼 뭐 볼 것도 없네요. 바로 도전해 볼까요?”
“뭐? 지금?”
“네, 형님. 되든 안 되든 한 번 붙어봐야 각이 서지 않겠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필드 보스를 잡아야지만,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 단서가 주어지는 건지요?”
“그래도 당장은 좀 무리가 아닐까? 거의 평타 수준으로 광역기를 남발하는 데다 데미지도 엄청나던데……. 특히 드로 넌, 이제 마쉴도 없어서 버틸 수도 없을 거잖아.”
아무래도 오늘 처음 본 보스 몹이라 그런지, 다들 잡는다는 생각은 제외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저 더 깊숙이, 뭔가 숨겨진 공간을 찾아 퀘스트를 찾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던 느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천사장이란 놈을 그렇게나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거 의왼데요? 최근에 인던 위주로만 플레이해서, 다들 까맣게 잊고 있었나 봐요.”
“응? 뭐를?”
“필드는 인던과 달리, 타이탄 소환이 된다는 사실을요. 우리만큼 타이탄을 많이 갖고 있는 파티가 타연에 또 있을까요? 조심하실 거 없어요. 그냥 전부 소환해서 잡아버립시다.”
그리고 이곳에 떠 있는 필드 보스는.
아무리 봐도 우리가 잡아내기에 더없이 좋은 먹잇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호, 타이탄으로 몸빵하면 버틸 만하다 이거구나? 근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타이탄 체력이 다해서 역소환되면 어쩔 건데. 어그로를 다 먹어놓은 상태라 잠깐도 못 버티고 죽어버리게 될 텐데?”
나름 타당한 반론을 제시하는 현중이.
하지만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레이드를 주장한 건 아니었다.
천계란 새로운 필드에서 처음 본 특이한 조건.
어쩌면 그걸 꼼수처럼 활용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번뜩 떠올랐기에 말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아이디어가 통할지 먼저 시험해보자. 심연 몹들한테도 이게 통하면, 당연히 보스한테도 통할 테니까.”
* * *
“오, 확실히 강해 보이는데요?”
파티원들을 따라 이동한 도시 중앙 부근.
그곳에 도착하자, 배회하듯 맴돌고 있는 거대한 천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침식된 날개 데아 파티엘>
특이하게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회색 날개의 천사장.
하지만 검게 일렁이는 안광이, 결코 녹록지 않을 보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칼이나 제대로 박힐런지 모르겠다.”
“인마, 주변의 심연 몹들은 잘만 잡아놓곤 그런 소릴 하냐? 같은 지역에 뜨는 보스가 혼자만 훨씬 레벨이 높겠어? 그리고 우리한텐 레벨 보정이 되는 업적도 있잖아!”
“…….”
겁이 나는지 자꾸 약한 소리를 하는 현중이.
혹여 파티원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서 일부러 큰 소리로 핀잔을 줬다.
“다들 겁먹지 마세요! 다들 타연을 오래 해오셔서 아시죠? 400레벨에 진출할 수 있게 만들어둔 맵이니까 절대 못 잡을 수준의 몹을 배치해뒀을 일루전이 아닙니다. 그리고 루네아와 달리, 이곳엔 저희밖에 없어서 뒤치기는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절대 무리한 도전이 아니라, 지금만큼 잡기 좋은 조건도 없어서 도전하는 겁니다!”
“그래, 그래. 이 정도면 아주 최고의 조건이지. 예전에 일곱 명이서 드래곤 잡겠다고 도전할 때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진 거야? 그땐 진짜 무슨 생각으로 트라이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결국엔 성공했지.”
“맞아요. 드로 오빠가 될 것 같다고 한 것 중에 안 된 적이 없잖아요? 다 함께 파이팅해서 이번 보스도 꼭 잡아봐요. 드로 오빠 작전대로만 되면, 못 잡을 이유도 없잖아요!”
인던과 달리, 필드에서 죽으면 경험치는 물론 템까지 드랍된다.
하지만 이 중에 드랍 템을 먹고 쨀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실 크게 걱정할 필욘 없었다.
그저 최악의 경우엔, 전멸할 수도 있단 사실만이 염려됐을 뿐.
하지만 도전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이곳 가상현실에서도…… 개척자라 불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까 도전해 보자. 그럼 시작해볼까?”
[‘지옥불’ 님이 공격대장을 ‘산드로’ 님으로 변경했습니다.]
이윽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지옥불 형님이 줄곧 맡고 계시던 공격대장을 내게 넘겨줬다.
간만의 공격대장.
이 역할을 맡은 이상, 레이드의 성패는 내 오더에 달려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타이탄을 소환할 거니까 시동은 없습니다. 전부 레이드가 끝나는 순간까지, 각자 최선을 다해 집중해주세요! 어그로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넵!”
“그래!”
우렁찬 기합 소리.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한 나는 카이저 형님을 바라봤다.
그러자 작전대로, 형님은 혼자 천사장을 향해 달려나가며 타이탄을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