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신석 (4)
-네? 이오네스가 아니라, 테오시스 님을요?
-물론 저희 또한 어떤 증거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저 심증일 뿐……. 하지만 때론 심증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 법이죠.
사실 난, 굳이 로만 전자와 스폰 계약을 맺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타연 랭킹 1위 유저이자 성길의 수장.
몇억을 호가하는 아이템이나 골드들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위치.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이루게 됐지만…… 항상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 자리까지 급속도로 올라왔기에, 눈 깜짝할 새에 저 밑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게는, 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이…….
태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운영자’란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즉 로만 전자가 제시했던 정보 공유 조건만 아니었다면, 난 다른 어떤 기업이 스폰 제의를 해왔어도 무시했을 터였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오네스는 젠티스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평소에 진심으로 존경하며 잘 따르던, 절친한 후배였단 사실만 재차 확인하게 되었죠. 하지만 반면 테오시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귀국한 과정을 살펴보다 알게 되었는데…… 확실히 미국에 있을 당시 행적은 노출된 바가 적어, 이 사실을 아는 이가 국내엔 없더군요.
-어떤 사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눈앞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
잠시 관우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 흥분했지만, 지금 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리고 또한, 로만 전자 측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만도 없었다.
그저 그동안 그녀를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하고 있었다는 것.
그걸 깨닫게 해준 것만으로도, 로만과의 계약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중요한 업데이트 지역이라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곤 해도…… 직접, 그것도 저희가 모르는 상태로 숨어서 살펴본 건 잘못된 일 아닙니까? 개인정보 보호법과 게임 약관을 어긴 건 아닌지 따져봐야겠는데요?”
“아…… 산드로 님. 다행히 그것관 상관없답니다. 새로운 지역이 잘 구현됐는지, 혹은 버그 같은 게 발생된 건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저희의 고유 업무니까요. 혹시 제 부탁이 부당하게 느껴지셔서 언짢으신 건가요?”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저희도 상당히 고민하고 모험을 감수하며 도전한 레이드였는데, 그 정당한 대가로 오게 된 이곳의 출입을 자제해 달라니요……? 안타깝지만,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받아들이기엔 우리만 손해.
그걸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뭐가 됐건 부탁이란, 요청하는 사람이 을일 수밖에 없는 법.
일방적인 ‘부탁’을 ‘협상’으로 바꿔보기 위해, 난 그녀와 세우게 된 각을 굳이 무르지는 않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뭔가 저한테 바라시는 게 있나 보네요?”
“당연히요.”
“아무리 운영자라 해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거의 없답니다. 지금의 산드로 님이시라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뭘 해주실 수 있는지 또한…… 제법 잘 알고 있는 편이죠.”
“네? 산드로 님, 설마……?”
“맞습니다. 만약 저희에게 경험치 축복을 걸어 주신다면, 테오시스 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요.”
그랬다.
그녀는 분명 몇만 명이 넘는 유저들은 물론, 남들 몰래 나와 지옥불 형님에게만 경험치 축복을 걸어줬던 전적이 있었다.
“왜 이러세요, 산드로 님? 본인께서도 말이 안 되는 소릴 하고 계시단 걸 아시죠? 저레벨 유저. 아니, 최대한 재량을 부려 본다 해도 랭커급이라면 모를까, ‘랭커’인 분들한테 어떻게 경험치 버프를 걸어 드릴 수 있답니까?”
“예전엔 주셨잖아요. 저는 해당 없었지만, 함께 받았던 지옥불 형님은 그때도 분명 랭커셨는데요?”
“그땐 단둘뿐이었고, 지옥불 님은 레벨 다운으로 랭커 밖으로 밀려나실 예정이었죠. 지금은 언뜻 봐도 이 자리에 랭커분들만 열 명이 넘는데, 절대 허용할 수 없답니다.”
“그러면 하는 수 없네요. 저희도 테오시스 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는 수밖에요.”
“산드로 님……. 정말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
“왜라니요? 지금 착각 중이신 것 같은데요…… 전 이제 엄연히 한 길드의 수장입니다. 저 혼자만 생각하고 독단으로 판단 내리는 일은 이젠 할 수 없어요. 길드원들의 손익을 철저히 생각할 수밖에 없단 겁니다. 그리고 방금도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혹시 모를 버그 같은 게 있는지 살펴보는 게 업무시라고요. 근데 저희가 뭐, 어떤 버그라도 사용했나요?”
“…….”
“없었죠? 그저 이미 제작된 게임 속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진행한 레이드였습니다. 차후 패치를 하시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때까지는 저희가 이룬 것들을 온전히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저희가 기를 쓰고 피 터지게 경쟁한 끝에 획득한, 선두에 선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니까요.”
“…….”
“드로 형님…….”
“가만있어 봐. 지금 네가 껴들 땐 아니니까.”
내 단호한 태도에 테오시스와 안면이 있는 당당이가 당황해했지만…….
지옥불 형님이나 카이저 형님도 가만히 지켜만 보시는데,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
갈 길이 먼 우리로선, 지금은 사를 더 우선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토록 단호하시다니 더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어차피 이곳부터는 레벨 차이 때문에 사냥도 어려우실 텐데, 별 메리트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은…… 말씀하신 부탁은 철회하신다는 뜻인 건가요?”
“경험치 버프를 드릴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걱정하시는 대로, 사냥은 조심스럽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온 건 아니겠지만.
그녀는 잠시 머뭇대면서도 끝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드로야, 왜 그런 거냐? 굳이 그렇게 척을 질 필요가 있었니?”
그리고 날 믿고 한마디도 하지 않던 지옥불 형님이, 가장 먼저 물어 왔다.
“무려 운영자가 직접 나타나 손수 부탁할 정도라면, 이곳을 선점한 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반증 아니겠어요? 그래서 욕심 좀 한 번 부려봤습니다.”
(나: 이 자리에서 전부 말씀드리긴 곤란해서 귓말드립니다. 앞으로 전, 테오시스를 태성의 배후에 있는 운영자 중 하나로 간주하겠다고 생각을 고쳤습니다. 잠시 후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지옥불: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일단은 알겠다.)
그리고…….
다른 피닉스 길드원들도 있는 자리라 모든 걸 밝히지는 않았다.
이젠 가진 게 많아진 만큼, 게임 플레이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또한 최대한 조심해야만 했다.
“운영자님이라니.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 뵈는 건 처음이야. 신비스럽긴 한데…… 우리 드로한테 꼼짝 못 하는 걸 보니, 또 별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네.”
“저래 봬도 테오시스 아니면 타연이 제대로 안 돌아간단 소리도 있잖아요. 그나저나, 이곳에 뭐가 있길래 저흴 막으려 들었던 걸까요? 죄다 심연 몹들밖에 안 보이는데.”
이테른 지역.
아직 결계 밖을 제대로 살펴본 건 아니지만, 이곳 또한 테터리욜 지역과 별반 차이 나는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해 봤자 몹들 레벨이나 조금 더 높은 편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녀가 이렇게나 급하게 우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 나타날 때 들으셨잖아요. 카이저 형님이 신석 얘기를 하고 있으니 박수 쳤던 거요. 무의식중에 한 거겠지만 아마 그것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요?”
“오호.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신석이라는 건……?”
“네, 축빙 형님. 역시나 지역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마 우리가 여러 개를 독점할 것이 걱정돼서, 미리 손써두려던 거겠죠.”
“그런 것 같다. 아니,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일리 있는 추측이야.”
카이저 형님마저 동의한 이상, 잘못 짚었을 확률은 낮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이러면 테오시스가 오히려 저희에게 힌트를 준 셈이니까요.”
“힌트라고?”
“네, 형님. 신석이란 걸 회복하는 게 어려웠다면, 당장 저희를 찾아왔을 리 없잖아요? 그냥 놔둬도 당분간은 상관없었을 테니까요. 근데 부리나케 찾아와서 이테른에 오지 말길 부탁한 걸 보면 뻔한 거죠. 신석을 회복하는 일이란 게…… 생각보다는 쉬운 일이란 사실이요!”
“오, 그렇구나! 우리가 텔로라의 신석은 선점할 것까진 예상했지만, 파티엘을 이렇게나 빨리 잡을 줄은 몰랐던 거야! 그렇다 보니 이리아의 신석까지 선점하게 될까 봐 염려된 거지!”
“맞습니다, 지옥불 형님. 그러니 서둘러야겠어요. 신석이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이렇게 견제하려고 했을 정도인지 확인해 보려면요. 어쩌면 단숨에 태성과의 전쟁을 역전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드로다. 좋았어.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더니 힘이 나는구나!”
천계가 오픈된 지금.
점차 벌어지던 태성과 피닉스 라인의 격차가 줄어들려면, 천계 콘텐츠를 통해서 갭을 메꾸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놈들의 진출을 최대한 막는 동안, 아군은 천계에서 폭업하면서 콘텐츠마저 독점한다.
그러다 보면 중립이던 유저들도, 점차 우리 측에 합류하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테터리욜이나 이테른 어딘가에 있을 신석을 찾아주세요. 그동안 전, 다시 루네아로 돌아가 태성 놈들을 막아내고 있을게요.”
“그래. 앞으로의 며칠이, 우리 라인의 존속과 성장을 가를 며칠이 될 것 같구나! 그러니 다들…… 죽을힘을 내, 힘내 봅시다!”
“네! 길마님!”
언제나 든든한 피닉스 길드와 카이저 형님 커플.
그리고 그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우리 버닝스타.
이들과 함께라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곳의 콘텐츠를 선점하는 것도.
그리고 태성 라인을 정말로 무너뜨리는 것도!
* * *
테오시스가 떠나간 직후, 우리는 이테른을 조금만 둘러보고 다시 테터리욜로 복귀했다.
아무래도 그곳의 몹들이 조금 더 레벨이 높은 터라, 사냥하며 맵을 살펴보기엔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됐다.
또한 무엇보다, 아직 테터리욜 지역의 반도 살펴보지 못한 상태인지라 굳이 욕심낼 필욘 없었다.
-테터리욜에 넘어오지 못하는 길드원들이 많아. 그러니 일단 엔젤 슬레이어 업적부터 획득하게, 영웅의 전당 인던 공략부터 지시해야겠다.
-파미엘을 잡아내는 게 어렵진 않을까요?
-처음 우리가 잡을 때 보다는 약화된 상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화랑과 피스메이커 등등에도 랭커분들이 계시니, 공략법만 알려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우리 피닉스에서도 정예들만 추려서 그곳에 보낼 테니까.
이곳 천계 지역을 제대로 탐방하기 위해선, 일단 영웅의 전당 인던부터 먼저 클리어하는 게 순서였다.
메인 스토리와 연관된 곳이라 그런지, 어지간하면 퀘스트나 인던 클리어와 상관없이 이동이 가능한 타연치고는 보기 드문 제약이었다.
문제는 그 인던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물론 이제는 피닉스 길드원들이 클리어해야 해서 공유되겠지만, 상관없었다.
태성도 차츰 클리어해서 넘어온다 해도, 놈들만큼은 내가 지속적으로 ‘통제’할 생각이었으니까!
“누나, 이제 소환 한번 해 보죠? 어차피 지금 다른 타이탄들도 전부 쿨타임이니까, 지금 스펙이나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하, 그럴까?”
일단 신석 발견이 우선이었기에, 우린 다시 두 팀으로 나누어 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다시 루네아로 넘어가기 전에, 이번에 새로 얻은 타이탄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로파티엘.
이미 정보창을 통해, 확실히 다른 양산형 타이탄들보단 좋은 스킬과 스펙을 갖고 있는 것은 확인했다.
디바인급 무기답게, 줄곧 착용 중이었던 투 메르타스의 눈동자보다 훨씬 더 화려한 빛깔을 내뿜는 보옥.
두 손 사이에 맴도는 그 보옥을 바라보던 축볼 누님이 외쳤다.
“로파미엘 소환!”
지잉-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나이트급 타이탄.
지옥불 형님의 로파미엘과 비슷해 보이는 갑주.
같은 녹색을 띤 타이탄은, 흔히 우리가 봐왔던 강철 기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갑옷은 비슷했지만 장착한 무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와! 이거 무기가 보옥이야!”
“진짜 법사용 타이탄인가 본데요? 대박!”
흥분해 소리치는 축볼 누님과 현중이.
잠시 기체를 둘러보던 누님이 무언가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보옥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구체에서, 녹색 빛이 쏘아져 나갔다.
콰광!족히 100미터는 넘게 날아간 끝에 지상과 부딪힌 빛은 굉음을 터뜨리며 폭발했다.
“우와, 평타가 원거리 공격이야. 타이탄인데?”
“누나! 그것보다 그거 단일 타겟팅 맞아요? 피격 이펙트를 보니까, 아무래도 스플레쉬 뎀 같은데요?”
어느새 로파티엘의 어깨 갑주까지 뛰어 올라간 라챤이의 말대로, 기본 공격 타입이 얼핏 범위 공격으로 보였다.
신이 나서 계속 빛을 뽑아내는 누님.
공격 속도가 다소 느려 보이긴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타연에 최초로 등장한 마법사형 타이탄.
그게 바로 우리 버닝스타의 전력이란 사실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어쨌든 그런 것들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볼 문제.
난 연신 마법을 내뿜는 타이탄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는 길드원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시간 아깝게 뭐 하세요! 소환이 끝나기 전에, 몹 몰이라도 한바탕해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