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신의 가호 (1)
“맞다, 맞아! 지금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뿌연 회색 안개만큼이나, 이곳 천계 필드엔 심연 몬스터들이 넘쳐났다.
하나같이 강력하고 거대한 체형을 자랑하는 놈들.
그만큼, ‘몹몰이’를 해서 잡아내기란 당연히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그럼 바로 끌고 올게요!”
새로운 타이탄이 원거리 범위 공격 평타뿐만 아니라 강력한 광역 스킬까지 갖고 있다 보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왔어요, 왔어!”
“현중아, 몹들 좀 이쁘게 모아 봐! 간격 유지 잊지 말고!”
“옥케이!”
몇 명이 몰아온 10여 마리의 심연 몹들의 어그로를 스킬로 전부 먹은 현중이.
녀석이 사람들이 공격하기 좋도록, 이리저리 날렵한 무빙으로 몹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팅이 완료되자 축볼 누님의 공격이 개시됐고, 나머지 길드원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원딜을 날려 댔다.
“암석 폭풍!”
쾅! 쾅! 콰쾅!
하지만 그 무엇도, 타이탄의 화력을 따라갈 공격은 없었다.
단일 타겟팅으론 라챤이가 앞설진 몰라도, 모든 공격이 광역 피해를 입히다 보니 딜량에선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캬! 시원시원하네요, 누나!”
“오호호! 이게 정말 웬일이니!”
끝끝내 공격을 버텨내고 다가온 놈들은, 도둑 삼인방을 비롯한 우리 근접 딜러들이 마무리했다.
그러자 분명 적잖이 많던 몹들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정리됐다.
[4,328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5,150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3,897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
역시나 거지가 많은 심연 몹들이었지만, 어비스 수치만큼은 쏠쏠하게 들어왔다.
현재 축볼 누님의 레벨은 390 초반.
소환 지속 시간이 근 6분을 훌쩍 넘는 상태라, 쉬지 않고 몹몰이를 하자 꼬박 한두 시간가량 사냥한 것과 비슷한 숫자를 잡아냈다.
이곳에 사냥하는 유저라고는, 오직 우리밖에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라? 이거 몹한테서도 드랍되는 거였네요?”
“어, 그러게? 퀘스트 보상으로만 주는 템인 줄 알았는데. 드랍률이 엄청 낮은 템인가 본데?”
천계에 와서 유일하게 받았던 퀘스트, '심연의 파편 토벌'.
준필드 보스만큼 강한 ‘파편’을 10마리 처치하면 ‘천사의 기도’란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한데 그 템을, 방금 잡은 심연의 몬스터 중 하나가 드랍했다.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작은 구슬.
파티엘이 준 ‘천사장의 기도’나, 일전 도네타의 안식처에서 먹은 '천사의 눈물'과도 비슷해 보이는 재료 템.
비록 용도가 정확히 적혀있진 않았지만, 얼추 예상할 순 있었다.
상위 템인 천사장의 기도에는, 천사의 기도엔 없던 설명이 한 줄 더 추가되어 있었으니까.
* 침식된 신석을 회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카이저 형님의 추측대로 신석 회복이 천계의 첫 임무라면…….
이 천사의 기도란 템 또한 그 수단으로 쓰일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신석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템도 모아야 할 것 같아요. 천사장의 기도만으로는 신석을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신석은 발견 못 했어도 사냥은 쭉 열심히 해서, 기도는 몇 개 받아뒀다. 길드원들 걸 다 합치면 아마 5개는 넘을 것 같은데, 그걸로도 부족할까?”
“모르겠네요. 하지만 파편을 보기 힘들어 반복 퀘가 쉽지 않고 드랍률도 낮은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사냥만으론 얻기엔 힘들겠어요. 당장은 신석부터 찾는 게 우선이니까, 각 잡고 모을 시간도 없구요.”
“어? 방금은 모아야겠다며? 사냥이 아니라면 뭐로?”
반문해 오는 축빙 형님.
지금 우리가 타연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도달해 있는지, 아직까지도 잘 실감 못 하시는 모양이었다.
“저희가 인원도 부족하고 시간은 없어도…… 돈은 있잖아요?”
부자가 됐더니 확연히 체감할 수 있었던 좋은 점.
그건 바로,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 * *
『드디어 2.0 업데이트의 진정한 콘텐츠라 할 수 있는 천계가 오픈된 하루였습니다! 타연이 이토록 소란스러웠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죠?』
『네, 맞습니다! 이른 새벽에 오픈된 탓에 많은 분들이 잠결에 접속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덕분인지 새벽부터 온종일 전투들이 이어졌다는 소식이 있네요. 혹시 김석용 아나운서는 천계라는 새로운 필드에 진입해 보셨나요?』
『네. 다행히도 평소 틈틈이 레벨업해둔 탓에 간신히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룬몬에 수직으로 세워진 빛의 기둥, 천문! 그곳을 통해 천계로 올라가는 과정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양민아 앵커를 비롯한 많은 유저분들께서도, 열심히 레벨업하셔서 반드시 경험해 보시길 추천 드리겠습니다!』
『아직 350레벨이 한참 남은 저로선…… 정말 부러운 일이네요! 아무튼 새로운 필드 지역인 천계! 다들 이곳에 관해 궁금하실 게 많으실 텐데요. 지금부터 오늘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들과, 이제껏 밝혀진 정보 및 분석들을 공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러 시간에 맞춰서 나온 건 아니었는데, 마침 딱 맞춰 저녁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뭘 이런 걸 다 보고 있냐. 안 자냐? 안 피곤해?”
“당연히 피곤하지, 인마. 그래도 이건 보고 자야 해. 내 유일한 힐링 타임인데…….”
새벽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이어진 강행군.
물론 중간중간 조금의 휴식 시간은 있었지만, 다들 이 힘든 스케줄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버텨내 주었다.
하지만 하루만 하고 끝낼 건 아니기에, 다들 동시에 로그아웃했다.
아무래도 천계란 곳은, 혼자서 사냥하기란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였길래 그래?”
“한 400명 정도?”
“뭐? 진짜로?”
“어. 웬만한 유저는 두세 방이면 킬이라서 거의 '학살'을 해버렸지. 지금 누적 PK 횟수가 2천을 넘어섰으니까…… 아마 그 정도가 맞을 거야. 태성 1군 애들은 전쟁 상태라, 죽여도 카운팅이 안 올라가서 정확하진 않지만.”
“와, 이 자식……. 이젠 진짜로 전설이 돼 가고 있…… 아니, 전설이 된 게 맞네! 혼자서 하루에 천명을 죽이는 유저라니? 그것도 중저렙은커녕 고렙들만 올 수 있는 지역인데!”
“오죽하면 PK 하다가 레벨업할 기세다. 다들 레벨이 낮은 편도 아니라서 그런지, 경험치도 얼추 10퍼센트는 오른 것 같고. 크크!”
“켁! 이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왜, 부럽냐? 형님만 즐기는 거 같아서?”
“부럽긴 자식아. 네가 가장 힘들 걸 뻔히 아는데 무슨……. 말은 쉽게 해도 쉬운 일이 절대 아니잖아. 오후부터는 망토랑 타이탄을 전부 사용한 뒤라, 긴장도 많이 됐을 텐데…….”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현중이.
굳이 내색하지 않아 모를 줄 알았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쭈? 그래서, 지금 형님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은 무슨. 그냥 너무 혼자만 짊어질 필욘 없으니까 적당히 하라는 거지. 뭐든 무리하다가 탈 나는 법이니까.”
“우리가 선점 효과를 최대한 누리려면…… 태성 라인을 한 놈이라도 더 막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정 미안하면 얼른 신석이란 놈 좀 빨리 찾아 줘라.”
“오늘 개고생한 너한텐 진짜 미안한데…… 도대체 어딨는지를 모르겠다. 가뜩이나 맵도 넓은데 안개까지 껴있어서 자꾸 길만 헤매고. 뭐, 덕분에 레벨업은 실컷 했다만.”
“아, 그래? 확실히 경험치는 짭짤한가 봐?”
“장난 아니야. 가뜩이나 공틈 몹들보다 레벨도 높은데, 테터리욜 지역은 우리만 있으니까 몹들이 넘쳐 나잖아? 진짜 경험치가 미친 수준이야. 오늘 쌓은 어비스 수치만 가지고도, 공틈에서 경험치로 바꾸면 거의 1레벨업은 될걸?”
“오, 역시 대박이었네! 400레벨 찍으면 진짜 스펙이 급성장하는데, 다들 곧 엄청 강해지겠어! 확실히 지금이, 우리한테 중요한 순간이 맞긴 맞나 보다.”
사실 좀 전에 말한 것과는 달리.
온종일 필드전을 벌이다 나온 것치고는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었다.
신검을 얻고 난 후 지금까지…….
근 반년이란 시간 동안, 난 단 하루도 사냥을 허투루 한 적이 없었다.
앞서있는 적들을 따라잡기 위해선, 익숙한 사냥터에서 단순한 몹들을 잡더라도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
최적의 동선으로 최대한의 효율만을 생각하며 매일을 보내왔기에, 이 정도 피곤은 피곤도 아니었다.
또한 몹들을 상대하는 것에 비하면, 주적인 태성 유저들을 때려잡는 건 오히려 즐겁고 기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피닉스와 필드전을 벌이느라 머더러도 심심찮게 껴있던 터라, PK 하다가 먹은 템들 또한 상당히 쏠쏠했다.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번 건데?”
“길동이가 떨군 거 빼고도 레전더리만 2개니까…… 알아서 계산해 봐. 하도 죽이다 보니까, 나중엔 머더러인 놈들은 천계에 안 올라오긴 하더라.”
“진짜? 와, 템 떨구는 게 무서워서라도 그게 먹힐지도 모르겠다. 네 그 '일인 통제'라는 게…….”
“먹힐지도 모르겠다니? 오후에 못 봤냐? 태성 라인 애들 확 줄어들어서, 천계에 태성 마크는 보기도 힘들어졌던 거? 그게 다 형님이 만든 거야!”
“테터리욜에만 있느라 못 봤지. 거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성과가 없었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다만…….”
“그러게. 도대체 신석이란 놈은 어디 숨겨져 있는 건지.”
어째 다른 얘기를 꺼내도, 계속 신석 생각만 났다.
아직 효과가 무언지 모르지만, 우리가 놈들보다 신석을 먼저 발견하고 손에 넣어야만 현 전세를 역전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을 먹는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별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보다 더 좋은 혜택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일 수도 있었다.
띠리리리!
그렇게 현중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렸다.
늘 타연에만 접속해 있는 터라 전화할 사람은 거의 없는 편.
역시나 조금 전까지 함께 게임했던, 라챤이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지환 형님! 아직 안 주무시죠!
-어, 연석아. 웬일이야? 할 말 있었으면 겜 속에 있을 때 하지.
-아직 못 보셨구나? 옆에 현중이 형도 함께 있죠? 당장 올타에 접속하셔서, 자유 게시판 글부터 확인해 보세요! 3번째 페이지쯤에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인데 그래?
-신석에 관한 정보가 떴어요! 루네아에 있는 신석을 발견했단 사람이 나왔어요!
-뭐?
스피커폰이라 함께 듣고 있던 현중이는, 곧바로 올타에 들어가 글들을 검색했다.
그리고 곧, 라챤이가 말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천계에서 뭔가를 최초로 발견한 것 같은데요.
평범한 말투로 적힌 발제 글.
하지만 그 밑으론 벌써 댓글이 수십 개 이상 달려서, 막 핫이슈 글로 옮겨지기 직전이었다.
-다들 천계에 도착해서 심연 몹들만 사냥하느라 바쁘시던데.... 생각보다 실망 아니에요?
이건 천계가 아니라 제2의 공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천계를 회복하고자, 방금 우연히 발견한 ‘신석’이란 놈을 공유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아이디 ‘가을하늘’.
랭커는커녕 어디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유저였지만, 그가 적은 내용만큼은 심상치 않았다.
평소 중소 길드에 가입한 채로 대탐이처럼 타연 속 탐험을 즐겼다는 그.
천계가 오픈되자, 당연히 바로 올라가 온종일 루네아 지역을 둘러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공유한 신석을 발견했단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요즘은 다들 ‘간파’란 스킬을 전투할 때만 쓰시잖아요? 근데 천계에 깔린 안개 때문에 시야가 탁해서, 전 쿨타임이 돌 때마다 여기저기서 써 봤거든요. 그러다 발견했습니다. 빛의 신 루이튼의 신성력이 담겨있는 ‘신석’이란 놈을요!
“미친! 간파를 써야만 신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니! 이게 말이 돼?”
“와, 이 생각을 못 했네? 이제는 맨날 유저들이랑 전투할 때만 쓰느라…….”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헤맸던 이유.
그건 최근엔 내가 주로 요정왕의 서클릿을 착용 중인 터라, 제사장의 머리 장식을 차지 않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안전지대에서는 더더욱 차고 있을 일이 없었다.
아무튼 뭐가 됐건 방법을 알아냈으니 이대로 잠들 순 없었다.
이 사실은 금방 모든 이에게 공유될 터, 최대한 빨리 접속해서 신석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뭐해, 현중아! 얼른 일어나!”
“응? 왜? 아직 다 못 읽었는데?”
“더 읽을 게 뭐가 있어! 당장 접속부터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