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공성 준비 (2)
잠시 몸 주변이 일렁였던 것 외에는, 전직은 다른 아무런 이펙트 없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녀석의 자신만만해진 표정에서, 슬그머니 차오른 만족감을 읽을 수 있었다.
“어때? 맘에 들어?”
“……네. 무척이나요.”
사실 이래 봬도 당당이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도둑 랭킹 1위를 유지해온 초고수다.
원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업적들을 획득한 유저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내가 갖지 못한 ‘만인살’ 업적을 진작 얻었을 정도로 최강의 데미지 딜러로 이름 높았다.
그런 녀석이 더욱 강력한 공격력을 뽐낼 수 있는 ‘암살자’로 전직했다.
그러니 타연 최고의 히트맨이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배울 수 있는 건?”
“스킬북 2개를 얻을 수 있네요. 전직 기념으로 준 거니까, 바로 익혀볼게요. 전직에 대비해서 스킬 포인트를 5개 정도 안 쓰고 모아뒀거든요.”
잠시 스킬을 익히느라 번쩍인 당당이.
일단 함께 아베르 성으로 귀환해 전직에 관한 정보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어때, 소감은? 달라진 게 느껴져?”
“뭐 별다른 건 없는 거 같아요. 확실히 타연은 다른 게임과는 좀 다르다고나 할까요? 이번 전직도 역시나, 뭔가 일루전 특유의 고집 같은 게 느껴지네요.”
“없다고? 그리고 고집이라면 어떤……?”
“힘들게 전직했으니까, 기존 스탯에 추가 가중치를 준다거나 보너스 스탯 같은 걸 조금이라도 주는 게 맞지 않아요? 근데 단순하게 직업 스킬 몇 개만 추가되고 땡이잖아요.”
“그래서. 네 말은 맘에 안 든다는 뜻?”
“아뇨. 그래서 맘에 쏙 든다고요. 사실 전 현질과 레벨 빨로만 밀어붙이는 게임은 극혐해서, 이런 보상 방식이 훨씬 더 좋거든요! 흐흐, 역시 타연은 제 입맛에 딱 맞는 게임이에요!”
이 게임을 개발한 게 당당이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저 흘려들을 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언제가 좋을지 모르겠네…….’
그런 아버지가 현재 식물인간 상태란 것도.
테오시스가 실은 그와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소식도.
차마 아직 말해주진 못했다.
나도 극비리에 전해 들은 것이라 온전히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당당이에게 성급하게 충격을 안겨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테오시스의 진실을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당당이마저 의심하고 있다는 기색을 내비쳐서는 안 됐다.
“……드로 형? 갑자기 왜 말씀 없으세요?”
“아, 미안. 더 말해 봐. 새로 배운 스킬은 뭐야?”
“이동기 하나랑 공격기 하나예요. 이것들도 ‘고유 스킬’에 속해있네요.”
미완성 스킬북으로는 각인할 수 없다고 적혀있던 2차 직업의 스킬들.
당당이가 링크 걸어주고 혼자 시전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그럴 만했다.
먼저 ‘그림자 걷기’란 이동기.
5초간 자신의 그림자로 몸을 숨긴 채 이동하여, 회피기로도 사용 가능한 스킬.
그림자 상태일 땐 이동 속도가 200% 증가하기 때문에, 공격이든 도망이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배운 ‘혼신의 일격’.
이름이 풍기는 느낌과는 다르게 패시브 스킬이었는데, 언제든 2초간의 차징을 통해 300% 공격력의 평타 공격을 먹일 수 있었다.
“캬! 전직이 좋긴 좋네. 전부 어지간한 심화 스킬들과 동급 수준이거나 더 좋아 보이는데?”
“좋은 것도 좋은 건데, 확실히 제 맘에 드는 스킬들뿐이에요. 저랑 궁합이 잘 맞을 것 같거든요.”
“응? 어떤 궁합이?”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전부 까다로운 컨트롤이 필요한 스킬들이에요. 400레벨이 돼야 익힐 수 있는 전직 스킬답게, 마치 일부러 고수들이 실력 발휘 좀 마음껏 해보라고 만들어 둔 것처럼요.”
순간 잠시 잊고 지냈던 당당이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이제는 타연에서 고수 소리 듣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녀석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유저는 없었다는 것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타고난 감각과 컨트롤.
그야말로 타연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은 천재!
아니, 마치 타연이 녀석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이 안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줬던 게 당당이였다.
‘이런 녀석이 이제 날개를 달게 됐으니…….’
그간 우리 길드에 애착도 많이 갖게 된 당당이.
앞으로 암살자로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암만 전직했어도 형과 결투는 좀 그렇고…… 함께 사냥이나 나가볼까요?”
“미안. 형이 좀 가볼 곳이 있어서. 다음에 함께하고, 넌 일단 내일 공성전에 대비해서 새로 익힌 스킬부터 몸에 익히고 있어.”
“네? 네, 알겠어요. 그간 전투를 못 해서 답답했었는데……. 내일은 몸 좀 풀 수 있겠네요.”
“그런 말은 하지 말고, 당당아. 이젠 형도 네가 무서울 지경이니까.”
당당이를 통해 대략적으로 전직의 콘셉트에 대해 가늠할 수 있었다.
전직했다고 무턱대고 압도적인 스펙 업이 주어지진 않는다.
다만 새로 제공되는 스킬들은, 확실히 활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저들이 좀 더 타연에 몰입하게 만들고.
남들보다 타연에 좀 더 진심인 사람들이 반길 만한 시스템.
앞으로 타연을 휩쓸 이 변화가 널리 퍼지기 전에, 역시 이번 공성전에 사활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 * *
“으악! 이 자식이 왜 여기 있…… 컥!”
하나.
“그레이터 힐! 뭐야, 힐 받기도 전에 죽었어? 커헉!”
둘.
“천상의 방패!”
무적을 써?
이건 잠시 보류.
“돌았잖아 진짜!”
“이 개자식!”
그리고 셋, 넷.
“대체…… 저희한테 뭔 죄가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
“…….”
도망가는 것도 포기한 채, 이글대는 눈으로 내게 항의하는 성기사.
하지만 필드전을 벌일 땐, 되도록 대화는 자제하는 편이기에 그저 말없이 무적이 풀리기만 기다렸다.
“말 좀 해보시라고요! 고렙이면 이렇게 막 죽여도 됩니까?”
처음 PK 시작했던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난 꾸준히 경고해왔다.
태성의 마크를 단 채로 제법 레벨 대가 높은 사냥터에 올 때는, 어느 정도 죽을 각오는 하고 나오라고.
한데 내가 없던 틈을 타 우리 앞마당이나 다름 없는 시공의 틈새에서 사냥 중이라니?
이건 내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간주해도 무방한 짓이었다.
“……다섯.”
태성 파티 중 마지막 유저가 사라지는 것을 본 다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본, 흑풍단으로 보이는 유저가 감탄하며 반겨줬다.
“대, 대박이다…… 감사합니다, 산드로 님!”
“제 일인 걸요, 뭐. 그나저나 태성 놈들이 제법 많아졌나 보네요?”
“맞아요. 며칠 전부터 확 늘었어요. 피닉스 라인의 고레벨들이 죄다 천계에 가 있다 보니까, 태성 라인이 조금씩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더라고요. 덕분에 사냥할 거리가 계속 줄어들었어요. 워낙 소수라 통제는 못 하더라도, 비매너 짓은 전부 골라서 하고 있었거든요.”
방금 내가 죽인 태성의 파티 또한, 안 그래도 원딜러들이 모인 흑풍단에게 향하던 몹을 스틸하던 중이었다.
내가 천계를 통제하다 보니, 그간 발을 못 디뎠던 공틈에 틈새 사냥을 노리고 온 모양이었다.
‘하여간 위나 아래나 전부 양아치 새끼들뿐이라니까……. 머더러 되기는 무서우니까, PK 대신에 깽판을 놓고 있구나.’
모든 사냥터는 그곳에 맞는 사냥 매너가 자연적으로 생기는 법이다.
또한 어느 게임에서나 통용되는, 게임 속 기본 매너라는 게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스틸 금지’.
선공했거나 선 어그로가 끌린 몹을, 다른 유저가 중간에 가로채지 않는 행동.
인던과 달리 드랍템이 직접 드랍되는 필드 몹 사냥에서는, 이런 매너가 법처럼 신봉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 보니 유저 간에 사소한 원한이 쌓이거나 길드가 통제를 하는 데는, 이런 매너를 지키지 않았거나 지키기 싫어서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태성 라인은, 역시나 이런 매너들을 지키지 않고 제 맘대로 사냥 중이었다.
설사 그렇다 한들, 이곳에서 자기들에게 선공할 수 있는 유저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천계에서 내려올 때마다 종종 들를게요. 이 자식들이 여기서 사냥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도록요!”
“네, 감사합니다! 우리 흑풍단주님, 역시 든든하네요. 선물도 정말 감사하고요. 자나 깨나 충성!”
“하핫!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이동하다 눈에 띈 김에 잡은 거였지, 사실 태성 라인을 정리하겠다고 여길 찾은 건 아니었다.
다시 훼라리를 소환해 부지런히 이동하자, 곧 목표한 곳에 도달했다.
“와우, 산드로 님이다!”
“하하, 반갑습니다. 산드로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검은 망토를 두른 유저들.
유달리 흑풍단들이 많이 뭉쳐 사냥하는 스팟에 도달하자, 그들이 살갑게 반겨줬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흑풍단 여러분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공성 전날에 염치없지만, 내일도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드리려고요. 별 건 아니지만, 물약값에 보태쓰세요!”
시간을 내 이곳을 찾아온 이유.
난 이번 천계 입장 당시, 정마석을 사재기해서 제법 큰 시세 차익을 보게 되었다.
사실 간이 커진 지금 내 기준에서나 ‘제법’이었지, 평범한 유저들이 봤을 땐 말도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수익.
하지만 빛마석은 몰라도 정마석을 사재기한 건, 태성이 아닌 일반 유저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짓이었다.
그래서 난, 과감하게 이번에 얻은 시세 차익은 전부 환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아무한테나 무작정 뿌릴 순 없었으니,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던 ‘흑풍단’이 그 대상이었다.
“와, 뭘 이런 걸 다!”
“잘 쓸게요, 단주님! 역시 화끈하세요!”
“지존은 다르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정말 감사해요!”
“싼드로가 싸나인 건 내가 진작 알아봤제! 이건 꼭 갚으마, 드로야!”
연신 재빠른 몸놀림을 쓰면서, 사냥 중인 한 명 한 명 앞에 전부 정마석을 하나씩 드랍해서 나눠줬다.
현금 시세로 따지자면 개당 족히 10만 원은 넘어가는 금액.
예전의 나였다면 기겁할 만한 짓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커녕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이들은 검은 망토를 착용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태성 라인에게 온갖 억압과 비매너 짓을 견뎌내며 플레이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필드전을 벌이면서 먹은 템도 있으니까……. 뭐, 이 정도는 괜찮잖아?’
몇천 명에게 나눠준다 해도, 레전더리 템 하나 가격만으로 메꾸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벌인 행동으로 인해 충만해진 지금 내 기분과 보람은, 어떤 금액을 지불한다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어? 혹시 이 원딜팟 길마 아니세요?”
“네? 아, 맞습니다. 제가 흑풍단22의 길마인데…… 절 아세요?”
“잠시만요. 제가 초대 좀 드릴 테니까 수락 좀 하시고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중에 다 모이시면 한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일일이 정마석을 드랍하는 와중에도, 미리 숙지해둔 아이디들을 만나면서 한 분씩 초대를 걸었다.
돈을 벌기도 힘들지만 쓰는 것도 힘들다고.
템을 뿌리며 일일이 인사하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어림잡아 2시간여.
얼추 공틈에 접속해 있는 흑풍단들 대부분에게 정마석을 하나씩 전부 돌렸다.
그러자 내가 만든 공격대의 참여 인원 또한, 대략 서른 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다.
[산드로: 모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흑풍단이란 이름으로 길드를 만드신 분들을 모셨습니다.]
각자 사냥하느라 바쁠뿐더러, 내가 요청하는 입장인데 귓속말로 불러내긴 죄송했다.
그래서 직접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접속해 있는 흑풍단 길마들을 손수 모은 뒤 본론을 꺼냈다.
[아기코끼리: 네, 단주님.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저희가 맘대로 흑풍단이란 이름으로 길드를 만들어서 그러신 건가요? 그냥 팬이여서 그런거였는데요.....]
[산드로: 아아,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항상 감사드리고 있는걸요.]
[마이티: 그럼 어쩐 일로....?]
[산드로: 다름 아니라 내일 공성전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벌써 흑풍단 분들과 공성을 벌였던 게 한 달이나 지났더라고요.]
[일타삼피: 오, 내일 아베르 수성전 때문에 그러신 거구나? 그거라면 저희 흑풍단들이 당연히 참석이죠! 진짜 재밌었던 걸요!]
다행히 여전히 호의적인 흑풍단원들.
사실 그동안 신경 써준 것도 없어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분위기를 보아 한시름 덜어도 될 듯싶었다.
하지만 이 많은 인원들이 수성전만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까웠다.
[산드로: 물론 수성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다들, 다른 것도 한 번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기코끼리: ?]
[땡겨땡겨: 다른 거요? 어떤?]
내일 있을 공성전은…….
이제까지 있었던 그 어떤 공성전보다도, 스펙터클한 하루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산드로: 수성이 아니면 공성뿐이겠죠? 혹시 지금 공격대에 계신 여러 길마님들 중에서.... 평소에 성주가 꼭 한번 돼보고 싶으셨던 분은 안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