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259화 (259/350)

259화 대격변 (5)

“지금 한가하게 대화나 나눌 시간이 없어서, 그럼 이…….”

“잠깐만! 많이도 필요 없다. 내게 1분만 다오!”

우연히 근방에 떨어진 것과 별개로, 그와 난 방금 몇 초전까지만 해도 검을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안전지대인 마을 안에서 마주쳤다 해도, 안부나 물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럴 사이도 아니란 뜻.

하지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렇게 눈앞에서 대화를 청하는데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이래 봬도 그는 타연 최강자 중 한 명이자, 영향력 또한 한 손안에 꼽히는 유저였으니까.

“뭐 때문에 그러세요?”

“잠시 차단 좀 풀어봐라.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독’의 귓속말 차단을 해제했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갑자기 몰린 탓에 은신을 쓰고 차단을 풀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며 귓속말로 말을 건네왔다.

(제독: 먼저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맙다.)

(나: 옛정을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지금도 다들 절 애타게 찾고 있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제독: 역시 산드로답다고나 할까? 초반의 선전. 아무리 신의 가호인가 하는 버프가 있더라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개나 먹었으면 차고 넘치지 않나? 뭐든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않았다간,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거다.)

(나: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는데.... 했던 말 또 하기예요? 지난 공성에서도 그렇게 겁주셨던 거 잊으셨어요? 근데 제가 뭐 변한 게 있었나요? 다리우스도 뭐 없던데요?)

(제독: 정말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구나? 내가 괜한 소리 하는 것 같으냐?)

(나: 괜한 소리든 걱정이든 간에, 신경 좀 꺼주세요. 이제 전 예전의 매그넘도, 산드로도 아닙니다. 버닝 스타의 길마이자 오늘 공성의 총사령관이에요! 다리우스 따위가 겁났다면, 시작은커녕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1분이란 시간은 짧았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서로의 골만 깊다는 걸 재차 확인했을 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한 마디에, 나는 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독: 랭킹 1위가 되고 벌 만큼 벌었는데도.... 각오가 여전하구나? 강남 테라팰리스에 거주 중인 강지환. 다리우스 또한 이 정보를 알고 있는데도, 그 생각은 그대로냐? 여전히 겁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나: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거죠?)

(제독: 질문에 대답부터 해라. 이대로 후환은 생각 않고 계속 밀어붙일 생각이냐고?)

(나: 물론이죠. 예전이든 지금이든, 제 다짐은 변함없습니다.)

다시 돌아본 그의 표정은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그 속을 전혀 모르겠단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누구지? 로만 전자 측? 아니면……?’

결국 알려질 거로 생각하곤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새삼 걱정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내가 상상해왔던 것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다리우스가 아닌 제독이…… 날 위협하고 있다고?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날 협박하려던 게 아니었다.

(제독: 그렇군... 좋다, 좋아! 사실 다리우스는 아직 네 신상에 대해 모르고 있다. 나도 우연찮게 알게 된 거라서 말이지.)

(나: 뭐죠? 방금 했던 말들은 절 떠보기 위해 그랬단 건가요? 제가 태성과의 전쟁에,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해 보려고?)

(제독: 그저 너의 선전과 각오, 그리고 의지를 다시 한번 보고 있자니 마음이 동했다고나 할까? 어쩌면 이렇게 바로 옆에 떨어진 게, 운명 같기도 하고... 그러니 내가 제의를 하나 해도 괜찮을까?)

(나: 시간이 없습니다. 말하고 싶은 본론이 대체 뭡니까?)

그는 현재 태성 라인의 주요 멤버.

또한 나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거나 죽임을 당한 적도 있었다.

지금 말하는 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 때문에 제독을 신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제독: 그럼 원하던 대로 본론을 말해 보마. 당장 다음 목표로, 우리 신화국의 성을 계속 공격해라. 막는 척 시늉은 하겠지만, 너희에게 성을 순순히 내주마.)

(나: 네? 어째서....?)

(제독: 전에 너한테 말한 적이 있지. 세상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이번엔 내 뜻도 한번 따라 봐라. 나의 성을 먹고, 그다음에....)

(나: ....다음에는요?)

(제독: 건국을 해라. 네 버닝 스타의 이름으로!)

* * *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레디치 성.

올림푸스의 메인 성답게 주성 옥상에는 천 명이 넘는 원딜러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난 뜬금없게도 저곳에서 있었던 만남이 떠올랐다.

앞으로 태성 라인에 서기로 했다고…….

그러니 내게도 자존심 버리고, 함께 라인에 들기를 권유했던 제독.

그와 대화를 나눈 곳이 바로 저 옥상이었다.

‘왜 그렇게 줏대가 없냐고. 쪽팔리지 않냐고 닦달했었지. 생각해보면, 날 생각해서 굳이 마련한 자리였을 텐데…….’

아직도 여전히 그의 진심을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지.

정말 내게 호의가 있어서 이러는 건지……?

뭐가 됐건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이상, 결국 확인할 수 있는 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저 드러난 결과를 토대로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려 애쓰는 수밖에.

그리고 그가 말했던 대로, 지금 레디치 성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공중에 있는 우리 비행 부대를 견제하는 세력이 없어, 자유롭게 포격 중이었기 때문이다.

-토레노는 이미 먹어 버렸으니…… 피넬리 다음은 우리 신화국의 세마 성을 치거라. 우리 페가수스 부대는 다른 곳의 수성을 돕는 척 빠져주고, 지원군도 실수인 척 다른 곳으로 돌려주마.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인 거예요? 저보고 건국하라는 게?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지만, 되돌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 일부러 성을 내준다는 걸, 눈치챌 사람도 없을 거다. 세마 성 다음은 레디치다. 그 정도는 먹어줘야 네가 건국할 국가에 도움도 좀 되겠지. 아, 될 수 있으면 흑풍단인가 하는 세력이 먹으면 좋겠군. 길드 합병을 해야 할 테니까.

원래부터 ‘신화’국을 건국할 정도로 세력이 컸던 올림푸스.

따라서 태성 라인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길드는 당연 올림푸스였다.

허나 아무리 볼품없는 성이라지만 토레노에 이어 세마까지 쉽사리 빼앗겼다.

그리고 그들의 메인 성인 레디치 성마저, 이대로면 점령당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제독의 급작스러운 제의로 인해, 적의 비행 부대 대부분은 우리 아베르 성을 치기 위해 빠진 상황이었으니까.

‘이쯤 되면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믿어 줄 수밖에……. 암만 그래도, 그렇게 치열하게 게임하고 욕심 많던 제독이 성의 절반을 내준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어진 보고에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카시아: 막 내성문이 뚫렸습니다! 웬일인지 타이탄이 나타나지 않아,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아기코끼리: 흑풍단 6개 부대 전진하겠습니다!]

[산드로: 레디치는 최강흑풍단이 점령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길드들은 최대한 디펜하면서 함께 공격해 주세요!]

[유머스트다이: 예압!]

[검객: 알겠습니다!]

레디치 성까지 먹는 것은 목표한 바를 한참 초과한 성과!

따라서 세마 성을 비롯한 눈앞의 레디치 성 또한, 우리 측 흑풍 길드가 먹을 수밖에 없었다.

피닉스 길드는 진작 점령 한계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고, 우리 측의 거대 중립 길드들은 이미 성을 하나씩 전부 차지하게 됐으니까.

‘이 성마저 흑풍단이 먹는다면…… 흑풍단 소유만 해도 3개. 이러다간 정말, 내가 국왕이 될 수도……?’

공성 시작 전까지만 해도, 성이라곤 아베르 단 한 개만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을 최대한 뺏겠단 작전은 세웠지만, 내가 그 성들을 가지고 건국하겠단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세히 말하긴 곤란하지만, 태성 라인에 든 것이 자발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이렇게 성을 내주고 태성 라인을 약화시키는 건, 나한테도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지. 그러니 내가 널 도와주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무조건 네가 건국을 해서 세력을 키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엇보다 그의 강요가 아니었다면 건국은 스스로도 꺼렸을 행동이었다.

사실 알게 모르게 리더 취급을 받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국왕’이란 감투를 쓰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그런 자격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핫! 타연 최초의 국왕이 누구였냐? 다리우스나 나도 국왕이 되는데, 네가 뭐 어떻다고!

어느새 예전의 관계로 돌아간 듯 호탕하게 말한 제독.

여하튼 공성은 계속 진행 중이었기에, 고민은 뒤로 제치고 서둘러 세마 성부터 차지했다.

그리고 원래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이곳, 레디치 성 상공으로 날아왔다.

[축복받은무빙: 아베르 비상! 적들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온다!]

[산드로: 인원은요?]

[축복받은무빙: 계속 병력을 모아서, 대략 2만은 넘어 보인다! 공중에는 올림푸스의 비행 부대도 수백 기 새로 도착해서 엄호 중이야!]

[산드로: 알겠습니다! 이곳만 금세 점령하고 바로 지원 가겠습니다. 3분만 기다려주세요! 아참, 비행 부대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내성문 방어에 집중해 주세요!]

[축복받은무빙: 어? 어 어, 알겠다!]

어느덧 공성이 시작된 지도 절반이 훌쩍 넘긴 시각.

원래 공성이 시작되면 어디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지 간을 보는 단계기에, 이쯤부터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태성의 볼품없는 성들을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처럼, 태성 역시나 이번 공성전의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타연 최고의 알짜배기 성으로 떠오른 아베르 성.

지난 공성전과 같이 이번에도 수많은 병력과 타이탄이 투입될 것이기에, 한시바삐 그곳으로 넘어가 함께 싸워줘야 했다.

“미적대지 않고 바로 점령하겠습니다! 마나 아끼지 마시고, 최대 출력으로 폭격하세요!”

“일제 사격!”

“폭격!”

주변의 페가수스 부대에 육성으로 명령을 내린 뒤, 난 곧바로 훼라리에서 뛰어내렸다.

목표 지점은 이제 막 우리 병력과 적의 바리케이드와 맞부딪히는 오벨리스크 인근.

휘이익! 슉!

지상에 도착하기 직전, 그림자 밟기로 낙하 데미지를 없앰과 동시에 혼전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사냥꾼의 춤, 집중 회피, 그리고 짧은 쿨타임의 귀신 발걸음까지.

갑자기 난입한 나를 향해 몇몇이 공격해 왔지만, 소용없었다.

반면 자세를 낮추고 종횡무진 휘두르는 내 공격에, 적의 탱커들은 하나둘씩 순식간에 잿빛 먼지로 화했다.

“누, 누구야!”

“미친 산드로! 보이질 않아!”

대규모 병력이 맞붙은 공방 속 전투.

이런 곳에선 정확한 타겟팅이 무척이나 힘들 수밖에 없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탱커 때문에 시야가 제한된다거나, 공격 궤적이 가로막히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

애써 적중시키더라도, 집중 공격이 아니라면 체력을 회복해줄 아군도 많아 의미 없었다.

괜히 원딜러들이 건물의 상층부나 옥상에 모여서, 아이디를 외치며 타겟팅을 지시했던 게 아닌 것이다.

‘열셋, 열넷, 열다섯!’

또한 나에겐 체력을 흡수하는 +5 루비 반지가 있었다.

쌍 반지를 착용했던 마쉴 때보다 흡수율은 낮아졌지만, 배는 늘어난 공격력 때문에 효과는 별 차이 나지 않았다.

도통 줄어들지 않는 HP.

하지만 눈앞의 탱커들은 급속도로 줄어들어, 곧 우리의 근접 딜러들이 오벨리스크에 다가설 수 있었다.

“막아!”

“우리 메인 성을 이대로 뺏길 수 없어!”

“미친 깜둥이 새끼들, 어디서 이렇게 개떼같이 몰려온 거야!”

팍! 팍! 팍!

난도질을 시전했더니, 4대마다 터지는 치명 공격의 이펙트가 마치 일반 공격과 비슷한 속도로 들려왔다.

그렇게 지상에 내려와 근 오십 명가량 죽였을 때쯤.

[레디치 성의 오벨리스크가 점령당해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최강흑풍단’ 길드가 레디치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무려 3천 명이 넘게 지키던 메인 성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의 주인은 너무도 쉽고 빠르게 바뀌었다.

[산드로: 전부 아베르 외성 마을로 넘어가세요! 당장요!]

남은 시간은 이제 20여 분.

40분 동안 태성 라인의 성을 6개나 빼앗았다.

이 정도면 계획을 달성한 것은 물론, 완벽한 대성공이었다.

남은 일은 가진 성들을 지키는 것.

마을로 튕긴 아군이 빛과 함께 순간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귀환주문서를 사용했다.

그들과 달리 난, 아베르 성의 성주였으니까.

슈웅.

생각보다 조용한 주성 건물 안.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전부 밖에 나가 싸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주변을 가득 메운 검은 물결 사이에 서 있는 짙은 녹색의 타이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양손 사이의 보옥에서 옥빛 광선을 내뿜는 마법형 타이탄.

축볼 누님의 로파티엘이었다.

“왔구나, 드로야!”

“오, 아직도 내성문이 뚫리지 않았네요! 고생하셨어요!”

“축볼이의 타이탄과 성문이 업그레이드된 탓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성문 앞 좀 부탁한다. 성문 체력이 간당간당하거든!”

반갑게 맞아주시는 축빙 형님.

간략히 전해 들은 바와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이 대략 파악됐다.

예상대로 적들은 대규모 인원과 타이탄을 동원해 정문으로 진격해오는 틀에 박힌 전략.

지금부터 우리 비행 부대가 계속 도착할 테니 하늘은 문제없다.

따라서 적들의 타이탄만 막을 수 있다면, 남은 전투는 걱정할 게 없었다.

놈들이 내성 안으로 쳐들어온다 해도, 우리에게도 타이탄은 충분히 준비돼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출격하겠습니다!”

반면 놈들에겐, 우리 측이 보유한 전력이 없었다.

더욱 강하고 날카로워진, 타이탄 킬러란 비대칭 무기(非對稱武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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