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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왕-267화 (267/350)

267화 재회 (2)

“뭐야, 저 자식?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데!”

짧게는 제독의 입에서 내가 사는 곳의 이름이 나왔을 때.

길게는 로만 전자와 계약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만났을 때.

만약 내 신상 명세를 캐는 이가 있다면, 어차피 계속 숨기기는 힘들 거로 생각했다.

아니, 굳이 더는 숨고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통합 랭킹 1위인데…… 누가 날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겠어?’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두말할 것 없이 타연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회적 반향까지 일으키며 새로운 역사를 기록 중인,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최정상급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못지않게 유명세를 떨치는 극소수의 프로게이머들.

지금의 난, 그 이상의 위치에 올라섰다고 자부해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저 ‘가상현실’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여태껏 그들과 달리 ‘익명’ 상태로 머무를 수 있었단 게 달랐을 뿐.

삑!

-현관문이 열렸습니다.

“야! 문을 왜 열어 줘? 그냥 씹지!”

“만나줘야지. 날 보러 여기까지 직접 왔다잖냐?”

“아, 씨앙! 지금 이렇게 무방비로 만나는 게 맞는 거야? 저 새끼는 뜬금없이 왜 찾아와 가지고 머리 아프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한 번쯤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전부터 쭉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니 녀석을 겁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식의 만남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양호했다.

그동안 잠입이나 청부, 최악의 경우 납치까지 은근히 염려하고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직접 이곳에 찾아왔다는 건, 자신의 행적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었다.

‘이젠 현실 속 박태후도, 철없던 어린 시절과 달리 조금은 정상적인 놈이 된 건지도…….’

난 최대한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현중이와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

* * *

“어이, 이게 누구야? 정말 그 강지환이 맞구나? 이렇게 보는 건 얼마만이지?”

수행 비서로 보이는 남성 둘을 세워둔 채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박태후.

녀석은 내가 다가가자, 마치 자기가 집주인인 양 굴며 인사를 건넸다.

“박태후…… 여기엔 어쩐 일이냐?”

“거의 십 년만에 보는 동창이 찾아왔는데 인사도 없어? 하긴 빈말이라도 반갑다는 말은 안 나오는 사인가? 하하!”

깔끔한 포마드 머리에 반들거리는 피부.

캐쥬얼한 차림이었지만 딱 봐도 명품같이 비싸 보이는 옷.

그리고 특유의 자신감과 거만함이 반씩 섞인 듯한 분위기.

오랜만에 현실에서 재회한 박태후는, 외모는 달라졌어도 어쩐지 기억 속 이미지와 조금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래. 우리가 서로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그나저나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건 실례 아냐?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네 정체를 알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있었어야 말이지! 산드로를 플레이하는 베일에 싸인 유저가…… 나하고 게임 대결도 했던 그 강지환이었다니! 하하핫핫!”

저녁이라 조용하기만 한 로비.

또한 높은 천장고 때문인지, 녀석의 웃음은 크게 공명하며 울렸다.

“말씀 나누는데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조금만 음성을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여긴 공용 장소라서 입주민분들이 불편해하실 수도 있어서요.”

그래서 로비 데스크에 앉아 있던 관리 직원이 소란에 놀라 다가와 말했다.

“응? 뭐라고? 입주민이 지금 어딨어, 당신 말고 아무도 없는데? 당신이 직원이지 입주민이야?”

“……네?”

“지금 여기 누가 있다고 나보고 지랄이냐고! 내가 내 입으로 웃지도 못해? 도대체 누가 시끄럽다고 너한테 컴플레인 걸었는데!”

순간 눈빛과 태도가 돌변한 박태후.

녀석은 갑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중년의 남성 직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들었다.

“아, 아니, 물론 지금 돌아다니시는 분이 안 계시지만, 언제 다른 분이 드나드실 줄은 모르는…….”

“미친 새끼네.”

“……그래서 조금만 조용해 주시,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끄럽다고 난리더니 이번엔 안 들려? 지금 니 말은, 아무도 없긴 하지만 니가 시끄러우니까 나보고 닥쳐달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미친 새끼지.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죄송합니다만 손님. 정말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래, 박태후! 갑자기 남의 집에 찾아와서 이게 무슨 행패야!”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 없어 나서려 했지만.

현중이가 나보다 먼저 박태후와 직원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이건 또 누구야? 아아, 강지환과 같이 산다는 그 꼬봉 성기사구나?”

“뭐야? 나도 알아?”

“그럼! 나한테 칼을 겨눴던 놈을 내가 몰라볼까 봐? 절대 못 잊지.”

아무리 봐도 정상인 놈은 아니었다.

날 만나러 왔단 놈이 엄한 사람한테 시비나 걸고 있다니.

그래도 게임 속에선 어느 정도 젠틀한 척을 하길래 상식이 있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미친개잖아?’

상식은커녕 살면서 한 번 만나보기도 힘든, 개차반 중의 개차반이었다.

“그만해라 박태후! 죄송합니다, 아저씨. 잠깐만 조용히 대화하고 올라갈 테니 양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좀 취해서 그런 것 같네요.”

“네? 아, 네……. 그럼 주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속상한 눈치셨지만 그래도 맞서기보단 피하시는 걸 택했는지, 직원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혹시나 해서 나와봤는데…….

이런 놈과는 대화를 길게 나눠봤자 좋을 게 없어 보였다.

“본론을 말해. 날 찾아온.”

“응? 지금 기분 나쁜 건 난데, 왜 네가 더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잡소리는 제발 그만하고, 어서 본론이나 말하라고!”

누가 계속 무례하게 굴고 행패까지 부렸는데, 오히려 불쾌해하는 태도라니?

만난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눈곱만큼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워우! 뭐지 이 자신감은?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대체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여긴 현실이지, 타연 속이 아니라고?”

“아니, 박태후. 난 정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이해가 안 되는데…… 설마 나한테 이딴 헛소리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지?”

“하하! 물론 아니지. 그래, 서로 조금만 진정하고 잠시 얘기 좀 해볼까? 네 친구나 내 비서들은 빠지고 단둘이서만. 다들 비켜 봐!”

“넵!”

“…….”

서둘러 뒷걸음질 치는 두 사람과 달리, 현중이는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어차피 이미 불쾌해질 대로 불쾌해진 상황.

빨리 녀석을 보낼 생각에 눈짓하자, 현중이도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안 거지?”

“아, 여기? 당연히 로만 전자 쪽을 통해서지. 떡하니 스폰 마크를 달고 나타났는데, 조사를 안 해볼 수 없잖아?”

“그냥 확인차 물어봤다. 그럼 여기 온 이유는?”

“하하! 오냐오냐해주니까 이거 좀 어이없는데? 정신 차려, 강지환……. 너 내가 누군지 잊었어? 보니까 예전에 집안이 고생 좀 한 거 같던데, 그런 건 벌써 다 잊은 거냐고?”

아직 여기 온 진짜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 정도는 알 만했다.

그간 타연에서 실컷 당한 굴욕을, 어떻게든 현실에서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걸.

하지만 지금의 난, 그걸 굳이 감수해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너야말로 바깥에 나왔다고 다 잊은 건 아니지? 나한테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빌었던걸? 뭐라고 생각하든 자유지만 지금 이러는 건 명백히 실수하는 걸 텐데? 너가 이렇게 나올수록 타연 속에선 더 힘들어질 뿐이란 건 생각 못 해?”

“오오, 주제에 네 번째 국가의 국왕이다 이건가? 랭킹 1위도 하고 건국도 하다 보니, 정말 뭐라도 된 것 같은가 보지? 감을 제대로 잃은 걸 보니?”

“네 어설픈 도발이나 협박에 넘어갈 일 없으니까, 하고픈 말이나 말해. 한 번만 더 헛소릴 지껄이면, 이대로 그냥 올라가 버릴 테니까.”

재수 없는 말투.

그리고 지독히도 오만적인 태도.

무엇하나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큰 소리 친 것과 달리,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게임 속에서도 대단한 다리우스지만…….

현실 속 박태후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정말 엄청한 배경을 가진 놈이었으니까.

“그래, 말해 줄게. 일단 폰이나 좀 꺼내 봐.”

“갑자기 폰은 왜?”

“내가 왜 손수 여기까지 찾아왔겠어? 기록이 남아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툭 터놓고 얘기나 좀 해보자고.”

“녹취 걱정이나 하는 놈이 여기엔 잘도 찾아왔구나…….”

폰을 꺼내 녹음 기능이 꺼져있다는 것까지 확인시켜주자, 녀석은 마침내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아직 네가 산드로란 사실은 나밖에 모른다. 양단이나 다른 길드원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처럼 신사적으로 굴 리 없거든. 워낙 똘끼가 강한 놈들이라, 뭔 사고라도 칠까 봐 알려주지 않았지.”

“…….”

“그러니까 지금 정도에서 끝내라. 이 정도면 너도, 타연으로 충분히 즐길 만큼 즐기고 벌 만큼 벌었잖아? 퇴직금이다 생각하고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인제 그만 떠나. 괜히 여러 사람한테 피해나 입하지 말고.”

“그러니까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나보고 게임 접으란 소리였어?”

“그래. 전에 내가 신검 값으로 200억 준다고 했었지? 거기에 더 늘어난 장빗값까지 챙겨줄 테니까 접어. 아니, 깔끔하게 캐릭까지 삭제해. 그러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다 용서해줄 테니까. 나로선 정말 많은 것을 양보한 제의라는 것만 알아둬라.”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남에게 캐릭 삭제를 종용하는 일이 ‘양보’가 될 수 있지?

만나서 나눈 대화라곤 몇 마디 되지 않았는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고방식을 가진 놈이었다.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해서 미안한데…… 내 목표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너희 태성 길드를 타연에서 없애버리는 거야. 그걸 하려다 보니 랭킹 1위를 하게 됐고 길드는 물론, 국가까지 만들게 된 거지. 그러니 네 양보라는 건 받아줄 수 없겠다. 대화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줄래? 이제 남은 대화는 타연에서만 하자.”

“아아, 네 그 잘난 길드? 그것도 이참에 함께 조사해봤지. 멤버들이 제법 괜찮던데…… 재미난 정보가 하나 있더라?”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아 있어?”

“라스트챤스 서연석. 아주 깜찍하게도 너희 길드의 활쟁이가 우리 길드원 중 하나와 연관이 있더라고? 너도 알고 있지? 서연우란 여자를?”

연우.

결국 박태후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될 이름이 나왔다.

“…….”

“반응을 보니 확실하네. 아니, 역시 당연한 건가? 생각해보면…… 니 자식이 내 대관식 날 신검을 주워 처먹은 거부터가 말이 안 됐거든. 누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하필이면 그 많은 유저들 중에 네가 먹을 리 없잖아!”

한데 녀석은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신검은 그냥 우연히 먹게 된 거다. 연우와는 그 후 나중에 알게 된 거고!”

“놀고 있네. 그 말을 지금 믿으란 거냐? 네가 신검을 주울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것도, 그 여자였다는 걸 이미 다 확인했는데?”

그때 연우와 함께 있었던 전사.

압구정바바란 아이디를 가진 유저가 생각났다.

‘설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줄곧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단 것만큼은 선명히 기억났다.

“이제까지는 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참아왔는데…… 이제는 아니지. 넌 나한테 복수하려고 모든 걸 치밀하게 기획하고 함정에 빠뜨렸던 거야. 그리고 계속 내통하면서 사사건건 날 방해해왔지. 십 년 전 나한테 품었던 원한 때문에!”

“대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뭘 기획했다고 이러는데!”

“증거가 다 나왔잖아. 재수 없게 거머리 같은 놈한테 잘못 걸린 줄 알았는데…… 그 자식이 원래 날 알던 놈이었고 내 길드에 들어온 스파이랑도 한편이었다는 사실이. 그러니 이젠 가만 넘어가 줄 순 없지. 그러면 사람들이 날 얼마나 만만하게 보겠어?”

“억측은 그만하고……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네가 가만 안 있으면!”

이제는 광기마저 엿보이는 눈빛.

오해에 오해를 거듭한 녀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일단 날 가지고 논 연우란 여자부터 처리해야지. 김규태, 그 자식처럼!”

“김규태? 그건 또 누군데?”

“아, 실명으로 말하면 모르려나? 너와도 인연이 있고 한때 랭커까지 했었던 놈이지. 배신자 새끼, 멀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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