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배신자 (1)
“말해 봐. 대체 뭔 얘기를 했길래 이러는 거야? 그렇게 오래 대화 나눈 것도 아니던데!”
“…….”
“나한테도 하지 못할 얘기가 있어? 갑자기 왜 입을 꾹 다무는 건데?”
대화는 길지 않았다.
딱 할 말만 하고 돌아간 박태후.
녀석은 선택은 내 몫이라는 말을 남기고, 올 때처럼 갑자기 떠났다.
‘놈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조금은 안일했다.
아니, 줄곧 축빙 형님이나 현중이 보고 변화된 위상을 자각 못한다고 지적해왔는데…….
정작 내가 가장 모르고 있었다.
“에휴.”
“자꾸 짜증 나게 한숨만 쉬지 말고 말 좀 하라고! 그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고 갔는데?”
“다 내 실수야. 타연에서 잘 크고 유명해지면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야 건드릴 수 없게 됐을지 몰라도, 주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걸 간과했어. 아무리 그래도 사회적 신분이 있는 놈이라, 이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그래도 나름 위상이나 명예도 있는 놈인데 설마 이 정도까지 미친놈인 줄 몰랐던 게 첫 번째 실수.
그리고 녀석이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하게 될 줄 몰랐단 게 두 번째 실수였다.
망나니긴 해도 평소 이미지 관리에는 힘쓰는 모습을 봐왔던 터라, 게임 속에서 일어난 일 가지고 뒤끝은 크게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근 2년 넘게 태성과 싸워왔던 4강 길드에 대한 보복이 없었던 것.
또한 자신을 배신했던 멀린이 멀쩡히 게임 해오던 걸 보고는 방심한 것이다.
그래도 이 자식이 상식은 있는 놈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놈에게는 참을 수 있고 없는, 자신만의 미묘한 경계선이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타연 속 적들은, 현실에서 건드릴 만큼 선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
지옥불이나 제독, 아리스토 등이 함께 힘을 합쳐 대관식 날 테러를 했던 것은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서지 않았던 것.
하지만 직접 길드 부하로 들어와 결정적 순간에 뒤통수를 친 멀린은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멀린은…….
-그 자식이 어떻게 됐는지는 니가 직접 알아보든가? 모르긴 몰라도 다신 타연에 접속 못 하는 몸이 됐다곤 들었다. 뭐,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연우인가 하는 애도 곧 그렇게 될지도?
차마 알아보기도 두려울 정도의 보복을 받게 됐다.
‘아무리 알아듣게 해명하려 해봐도…… 녀석은 듣지 않을 거야. 이미 전부 단정 짓고 있으니까.’
물론 그 선을 넘어버린 가장 1순위는 당연히 나겠지만, 난 내 계획대로 쉽게 건들 수 없는 몸이 돼버렸다.
랭킹 1위이자 국가를 건국한 유명 유저, 거기에 굴지의 대기업인 로만 전자의 스폰도 받고 있는 몸이 됐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유명 유저도 아닐뿐더러 공식적으로 케어받을 만한 기업 스폰이 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박태후가 연우에게 진심으로 원한을 품게 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죽게 만든 배신자이자 내게 지속적으로 정보를 빼돌린 내통자로!
“약속한 게 있어서 전부 다 말해줄 순 없어. 일단 넌 태규 형님이랑 서진 누나 좀 불러 줄래? 연우와 연석이는 내가 부를게. 전부 모여서 의논부터 좀 해봐야겠다.”
“뭘 또 전부 다는 안 된다는 건데? 알겠다. 일단 다 모이긴 해야 할 것 같으니 전화부터 해보마.”
* * *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예요? 진짜 오랜만이죠?”
“오! 두 분 형님끼리만 살기엔 너무 좋은 집 아니에요? 이렇게 현실에서 보니 확실히 성공하셨다는 게 확 느껴지네요!”
“어서 와라. 축빙 형님과 축볼 누나도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다.”
“갑자기 웬 집들이에요? 건국 기념 급 파티예요?”
“그랬다면 좋겠지만, 아쉽지만 그건 아니네.”
로그아웃이 늦어져 다소 연락이 지체된 연우 남매까지 도착하자, 우리 집에 길드 원년 멤버들이 전부 모였다.
그래서 모두 앞에서 박태후가 찾아와 했던 말들을 전해 주었다.
“그런……!”
“그럼 누나가 원래 피닉스 측 유저란 게 들켰으니 이제 태성에서 나와야겠네요? 잘됐네 누나. 이제 그 짓 좀 그만하고 얼른 나왔으면 싶었는데!”
“연석아.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많이 좀 심각한 일 같아.”
“네, 태규 형님. 그래서 뵙자고 한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싶어서요.”
“응? 이게 왜요? 누나는 말만 스파이지, 피닉스 길드에 들었던 적도 없고 태성에서도 뭐 배신 같은 건 저지른 게 없잖아요. 설마 예전에 드로 형 한 번 들여보내 줬다고,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이미 그 자식한테 정확한 사실관계는 의미 없어. 그저 지가 생각하는 대가 답인 거지. 원래부터 내가 연우와 알고 지낸 사이였고 자기를 노린 거라고 말한 순간, 연우는 배신자인 거야. 어쩌면 멀린 한테보다 더 큰 악감정을 갖게 됐을지도…….”
“멀린? 아! 그러고 보니 멀린은 멀쩡하잖아요! 비록 랭커에서 내려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게임하고 그랬던 거로 아는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선이 흡수된 올림푸스가 태성 라인에 합류하기 전까지였었지. 그 후에는 무슨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 우리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배신 후 고조선 길드로 넘어갔던 멀린.
멤버들이 모이기 전 잠시 접속해서 그의 소식을 찾고자 하니, 의외로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저희 길드에 친한 유저가 있었습니다. 멀린은 주로 걔하고만 거래했거든요.
고조선 길드의 메인 성이었던 토레노.
현재의 아베르 성으로 이주하기 전, 그곳에 오랜 기간 터를 잡고 있었던 상인 길드가 호박 마켓이었으니까.
-멀린 템은 거의 다 제가 세팅하고 매매해줬으니까, 잘 아는 편이긴 하죠. 진짜 컨도 좋고 게임 센스도 좋았는데, 안타깝게 됐어요.
-네?
알바마스터로부터 소개받은 한 젊은 장사꾼.
그에게서 멀린의 최신 근황을 듣게 되었다.
-보름 전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어요. 한국 타연은 접고 조만간 이민 가서 미국 서버로 할 거라고 들떠 있었는데, 다신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캡슐에 들어가기도 힘들겠죠.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는 사고.
가해자는 음주운전도 아니었고, 사고 장소는 제한 속도가 높은 곳도 아니었다고 했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는 말까지 들은 뒤, 로그아웃해서 길드원들을 기다렸다.
“그게 정말이야?”
“네. 놈은 반년 가까이를 기다린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멀린이 잊혀질 때까지요. 정말 집요한 새끼인 거죠.”
“지환 오빠…….”
멤버들에게 자초지종과 방금 알아낸 것까지 말해주자, 그제야 연석이는 물론 연우까지도 심각성을 인지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 연우야. 너가 태성에서 하고 싶다던 복수는 그만 포기하고 돌아와. 아니,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됐어. 박태후가 다 알게 됐으니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잖아.”
“아……. 하지만 이대로 시도도 못 해보고…….”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놈이니 위험하기도 하고!”
“…….”
“이렇게 된 건 정말 미안해. 괜히 날 도와줬다가 놈한테 찍히게 돼서……. 그러니까, 내가 다 책임질게!”
“무슨 소리예요. 어차피 나중에 연석이가 유명해졌으면, 지금처럼 알게 됐을 건데요. 저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죠.”
타연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뽑으라면 이제는 한 손으로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을 꼽으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눈앞에 있는 연우였다.
아무 조건 없이 베푼 친절에 신검을 줍게 돼 내 인생이 바뀌게 만들어준 장본인.
그 후 중요한 순간마다 태성의 고급 정보를 아낌없이 공유해, 나를 비롯한 우리 길드가 급성장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드로…… 아니, 지환이 너도 알지 않아? 우리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신 거? 아무리 태성이라고 우릴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지환아. 너 몰랐지? 누나 외할아버지하고 외삼촌이 장관 출신이라는 거? 아무리 재벌 가문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한국에 알게 모르게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 말씀 못 드렸는데, 놈과 저 사이에는 어릴 적에 악연이 하나 있었어요……. ”
태규 형님과 서진 누나가 애써 안심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박태후가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알려드리기 위해 과거에 녀석과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이것 때문에 제가 더 복수에 열 올렸던 것도 있어요. 근데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놈은 정말 하나도 안 변했더라고요. 멀린 건도 그렇고 정상적으로 생각할 놈은 아니에요. 그나마 지금까진 당해도 게임 속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았는데, 던전 스틸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당한 게 전부 연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문제예요.”
“지환 형님. 일이 심각한 거 같은데…… 지석 형님도 모셔서 의논해 볼까요?”
“응? 지옥불 형님?”
“네. 아무래도 제일 큰 형님이시니까,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요?”
“뭐가 됐건 현실에서 잠수타고 조심하는 게 제일인 것 같다만…… 일단 전화 드려봐. 연우도 원래는 피닉스 소속이었으니까 형님도 아셔야겠지.”
“네.”
타연은 물론 게임계 전반에 많은 인맥을 쌓고 있는 지옥불 형님.
갑작스러운 박태후의 방문으로, 그간 보지 못했던 얼굴들을 만나게 된 긴 밤이 이어졌다.
* * *
“오면서 들었다. 연우가 들켰다고?”
게임계의 살아있는 전설, 헬파이어 신지석.
이런 일로 형님을 뵙게 될지 몰랐는데, 현실에서 처음 뵌 형님은 게임 속 모습만큼이나 듬직하고 강인해 보였다.
“죄송해요. 연우를 좀 더 신경 써줬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를? 그리고 다들 너무 다운돼있는 거 아닙니까? 저희가 죄지었어요? 그깟 스파이쯤이야 우리 리버스나 흑풍단에도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을 텐데요! 다들 기운 내시지요!”
지옥불 형님은 오시자마자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로만 전자 측엔 연락해봤어? 분명 스폰 조건에 경호 관련도 있었던 거로 들었는데……?”
“아직이요. 그쪽에서 정보가 샜으니 내일 조심히 연락해 보려고요. 근데 연우는 우리 길드원이 아니라서 계약 당사자가 아닌 것도 문제예요.”
“그게 왜 문제야? 새로 가입받아서 추가 계약에 넣으면 되지.”
“네?”
“이렇게 된 이상 연우도 빨리 랭커가 되고 유명해지는 게 중요해졌다. 물론 멀린 얘기를 들어보니 현실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놈이긴 하다만, 달리 생각하면 멀린이 유저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기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일지도 모르지. 한데 지환이 너처럼 타연에서 유명 인사가 되면, 그때도 박태후가 연우를 건드릴 수 있을까?”
“아, 그 방법이 있었네요!”
“그러려면 너희 길드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이제 와 피닉스에 돌아오기엔 조금 늦었어. 분명 좋지 않게 생각하는 길드원이 있을 수도 있어 정붙이기도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희 버닝스타는 소수 정예에다가 연우와 아는 사람이 많으니 최적이지. 무엇보다 가장 최고의 사냥터와 장비들을 구하기 제일 좋은 길드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형님의 제안에, 나는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연우에게 물었다.
“정말 저희가 연우를 데려가도 괜찮으세요? 연우야 네 생각은 어때?”
“저도 지석 오빠 의견에 동의해요. 이렇게 된 이상 버닝스타로 들어가는 게 제 운명인 거 같기도 하고요.”
때론 고난은 피하는 것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옳기도 한 법.
연우를 우리 길드에 가입 받고 키우는 편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법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태후, 감히 또다시 내 동생들을 건드리려 들었겠다? 그 자식이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더는 나도 가만있을 순 없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국이란 나라에서 언제까지 제멋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게임 속에서 하던 망나니짓을 현실에서도 하려고 들었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줘야지.”
“형님. 도대체 뭘 어쩌시려고요?”
“타연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녀석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마침 얼마 전, 히캬와 연락이 닿게 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