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배신자 (2)
“네? 그 자식이랑요?”
히든캬드.
한때 성기사 랭킹 1위이자 부길마로도 활동했던 피닉스의 간판스타.
하지만 길드를 배신해 마신검을 다리우스에게 넘기고 난 후, 타연과 현실에서 종적을 감춘 유저.
지옥불 형님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사라진 배신자의 이름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지석 형님! 그게 사실이에요? 히캬 형님과요?”
“그래, 연석아. 그간 수소문하며 혼자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게 됐다.”
“어, 어떻게요! 아니, 히캬 형님은 잘 지내고 계셨나요?”
“하하! 녀석. 그게 제일 궁금했냐? 그래, 좀 야위긴 했지만 민석이 그 자식은 무사하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가장 먼저, 연석이가 흥분해서 달려들 듯 물었다.
피닉스에 있던 시절, 라챤이가 친형처럼 따랐던 형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벌써 만나보신 거세요?”
“그래. 사실 언젠간 연락이 오겠지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찾게 됐다. 그것도 다름 아닌 타연에서!”
“네? 타연이라고요? 설마 다시 복귀한 상태였어요?”
“복귀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캐릭을 새로 키우고 있더구나. 아이디와 외형까지 전부 다 바꿔서…….”
“와, 진짜요? 그 뻔뻔한 새끼, 결국 다시 하는 걸 보니, 타연 밥은 못 끊겠다 이거네요?”
“지환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진 마라. 히캬에게도 다 사정이 있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오랜 노력 끝에 도전한 신의 선물.
그리고 천운이 따라 뽑혔던 마신검.
그걸 그냥 훔쳐간 것도 아니라 뒤통수를 쳐서 앗아간 놈을, 형님이 두둔하신다니?
내 상식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전부터 우리 길드 내에도 소문이 돌았었다. 히캬가 배신한 게 돈 때문이 아니라 협박 때문이었다고. 물론 아무 변명도 없이 잠적한 터라 진실은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녀석이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왜 타연을 접게 됐는지…….”
소문대로 부모님의 회사가 협박받아 벌였던 사건이라는 지옥불 형님의 설명.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서 놀라지는 않았다.
‘진짜 빌어먹을 자식이네! 이딴 식으로 당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도대체 재벌이 뭔데?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면 남한테 이딴 식으로 굴어도 된다고, 대체 누가 허락해 준거냐고!’
그저 박태후에 대한 혐오와 악감정이 더욱더 깊어졌을 뿐.
놀라운 건, 암만 그래도 지옥불 형님이 히든캬드를 옹호한다는 점이었다.
“꼴에 돈도 좀 챙겨줬다지만, 민석이가 타연에서의 커리어를 전부 포기한 것을 생각하면 껌값이나 다름없었지.”
“…….”
“사실 난 계속 참으려고 했다. 마신검의 가치가 얼마나 되든 말든, 게임 속에서 벌어진 일은 게임 속 일로만 남겨두려고 했지. 한데 박태후 그 자식은 계속해서 타연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그 어떤 게임도 게임 속 일에 현실을 이렇게나 개입시킨 유저는 없었다. 한데 녀석은 랭킹 1위였던 자식이, 그것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상태에서 이딴 짓을 벌였던 거야.”
“맞아요. 아마 라인을 결성한답시고 합류한 4강의 길마들도, 쉬쉬하지만 같은 케이스일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라면 치고받던 길드끼리 한순간에 같은 편이 됐을 리 없으니까요!”
“그래. 그러니 이젠 나도 적극적으로 나서볼 생각이다. 히캬도 나를 도와주기로 했고.”
“그러고 보니 형님. 히든캬드와는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된 거세요?”
“내가 먼저 녀석을 알아봤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집엔 캡슐이 2개 있지? 여러분, 다들 괜찮으시면 지환이와 함께 잠깐만 타연에 접속해도 괜찮을지요?”
뜬금없이 접속을 권하는 지옥불 형님.
갑작스러운 연우의 합류와 잊고 지낸 히든캬드의 소식까지 들은 멤버들은, 잠시 정리할 시간을 갖고자 동의했다.
“싱크가 안 맞으실 텐데…….”
“여기서 뭘 얼마나 한다고. 그럼 들어가 볼까? 보고 놀라지나 마라, 히캬가 누구였는지.”
“네?”
영문모를 말씀을 남긴 채, 지옥불 형님이 접속했다.
그리고 나도 그 뒤를 따라 타연으로 들어갔다.
* * *
사실 그동안 난, 히든캬드에게 그다지 큰 원망이나 실망 같은 게 없었다.
그럴 만한 유대 관계를 쌓을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는 지옥불 형님이 보셨기 때문.
그저 다리우스라는 내 복수의 대상이 강해지도록, 하필이면 ‘마신검’을 넘겨준 일이 밉다면 미운 이유였다.
그래서 다시 그를 만나도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굳이 지금 만날 필요가 있나 싶었을 뿐.
한데 막상 형님의 초대를 받은 그가 여관방에 들어오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와 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다, 당신은!”
“간만이군요, 산드로 님. 사실 제가…… 히든캬드였습니다.”
한계돌파.
타임어택을 통해 새로운 직업의 위력을 알게 된 직후, 내 요청으로 알게 된 인챈터.
바로 그가 히든캬드였다니!
“아니 어떻게! 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요!”
“그러실 만도 합니다. 새로 키우는 걸 숨기려고, 완전히 다른 말투와 행동을 했으니까요. 아무튼, 인사에 앞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했던 행동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실수를 만회하고자 노력할 테니,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게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미동도 없는 그.
하지만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상태였다.
내 귓속말을 무시했던 다른 인챈터들과 달리 유일하게 답장을 줬었고.
그 후, 나의 제의로 벨루타 바닷가에서 최고의 폭렙업을 함께 했었으니까!
‘어쩐지 게임 센스가 예사롭지 않더니만…….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 갑자기 라챤이를 불렀더니, 괜히 당황해한 게 아니었구나.’
만약 내가 게임을 접었다 다시 시작한다면, 나 역시도 새로운 직업을 택했을 것이다.
한데 의외인 건 악마 사냥꾼이 아닌 인챈터를 택했다는 것.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버퍼를 택했는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놀랐지, 드로야? 나도 처음엔 무척 놀랐다. 히캬가 이렇게나 멀쩡히 다시 타연을 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것도 신직업의 랭커가 될 정도로 열심히!”
“……형님. 드로 님 덕분에 레벨업을 빨리해서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랭커라는 게 어디 버스만 잘 탄다고 되는 거냐? 클래스는 영원한 법. 원래도 직업 랭킹 1위 했던 실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그러니 지금도 인챈터 랭킹 1위를 달성한 거지.”
“네? 돌파 님이 지금 인챈터 1위세요?”
“그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이 녀석에게 접근하게 됐다. 이놈을 스카웃하겠다고 몇 번이나 찾아갔거든.”
사실 대형 길드쯤 되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 인재 영입이었다.
랭킹 게시판에 오른 유저들은 물론, 그 한참 전부터도 가능성만 보이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나 또한 길마라 당연히 그런 시도들을 해봤다.
태성과 연관 없어 보이는 무소속 랭커들에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무살 형님과 당당이를 포섭한 것.
그러니 당연히 떡잎부터 달라 보인 한계돌파에게도 가입 제안을 한 적 있었으나, 깨끗이 거절당했다.
‘솔플러에다가 나와는 합도 잘 맞아서, 왜 거절하나 싶었는데…….’
이유는 하나.
애초에 한계돌파는 캐릭 생성 때부터 향후 가입할 길드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 만나 보니 영 이상하더구나. 나를 피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무시는 못 하는……. 그러다가 알아차렸지. 외모와 아이디는 달라졌어도, 이놈이 내 동생이라는 걸!”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그렇게 행동했는데도 절 알아보실 줄이야. 부끄러운 일이지만, 정말 타연에선 눈물도 흘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됐죠.”
“들어오기 전에 지옥불 형님께 대충 들었습니다. 혼자 많이 힘드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비슷한 일을 당해본 입장이라 어떤 심정이셨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도 어릴 적 녀석과 나 사이에 있었던 악연에 대해 짤막하게 말해주었다.
“저, 정말 제가 당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군요! 물론 전 드로 님과 다르게 굴복하고 말았지만…….”
“한데 현실에서의 일은 다 해결되신 건가요? 타연을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신 걸 보면…….”
“사실 그간 형님과 길드원들에게 죄송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타연을 할 생각은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제는 제법 정상화도 되었고, 박태후만 날 못 알아보면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에 다시 시작하게 됐죠. 타연은 접어도, 그저 멈춘 거지 접을 수는 없는 게임이더군요.”
랭커란 자리는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만큼 타연에 빠져들고 몰입해야만 가능한 수준.
한데 랭킹 1위까지 찍었던 사람이 억지로 끊었으니, 얼마나 타연이 하고 싶었을까?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히든캬드는 결국 피닉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박태후 이 자식…… 나한테 레벨업이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네요. 사냥만 해도 바쁠 시간에, 오늘처럼 현실에서 협박질이나 열심히 다녔을 테니까요.”
“하핫! 그런가? 아무튼 더는 봐줄 순 없다. 게임업계를 생각해도, 그따위 자식은 타연에서 영영 없어지는 게 옳아. 온갖 지저분한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는 놈이라, 앞으로도 타연을 얼마나 더 망칠지 모른다.”
“근데 그 자식이 그걸 모를까요? 워낙 못된 짓에 도가 터서 그런지, 엄청 조심하더라고요. 말끝마다 지 변호사니 뭐니 지껄이면서, 혹여나 꼬투리 잡힐 행동은 어지간히도 사리던데요?”
“그래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뒤지다 보면 실수한 게 전혀 없진 않을 거다. 그러니 딱 한 개만 찾으면 돼. 가진 게 많다는 건, 잃을 것도 많다는 뜻이니까!”
이렇게 세 사람이 모이자, 앞으로의 대응 방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됐다.
하지만 역시나 녀석은 철저한 놈이라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저에게도 놈이 협박했던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요?”
“네? 어떤……?”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한 번 배신자인 몸, 한 번 더 버려도 상관없겠죠. 쉽게 말하자면, 덫을 놓겠다는 겁니다.”
“민석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설마 네가 날 돕겠다고 말한 방법이!”
놀라 되묻는 지옥불 형님.
하지만 히든캬드.
아니, 한계돌파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딱 한 개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죠? 제가 그걸 만들어 보겠습니다. 태성 길드가 무너지는 날. 다시는 다리우스가 타연에 발도 붙일 수 없도록, 접을 수밖에 없는 건수를요!”
* * *
“안에 계실 때 저희끼리 의논해 봤는데요. 연석이와 전 집에서 나오기로 했어요.”
“응? 연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로그아웃한 후, 지옥불 형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연우가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저희 집은 단독주택이라 보안에 취약하기도 하고, 괜히 저 때문에 부모님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어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와 살면 더 위험하지 않겠어?”
“그러니 연석이와 함께 나오려고요. 그리고 어차피 당분간은 타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어요. 기존에도 거의 눈만 뜨면 타연에 접속한 채 살아왔고요. 오빠도 아시잖아요. 타연 선두주자들은 다들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걸요.”
“그래도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일 텐데…….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한국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어딜까 생각해봤는데, 당장 생각나는 곳이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응?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오빠도 함께 알아봐 볼게.”
“여기요. 테라팰리스.”
“……뭐?”
연우가 말한 안전한 장소.
거기가 여기라고?
“어……? 물론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맞잖아요. 오빠도 그래서 여기로 이사 오셨던 거 아니에요? 그러니 여기로 구하려고요. 내친김에 검색해봤더니 월세 물건도 있더라고요. 심지어 같은 동에요!”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거주해서 24시간 경비와 관리 직원들이 상주하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원하는 식음료는 전부 배달 가능한 편의 요건들.
사실상 한 군데 처박혀서 게임만 하기에는, 이보다 더 최적이고 안전한 장소도 찾기 힘들었다.
-일단 내가 원하는 순간, 내 손에 죽어 신검을 넘겨라. 그러면 그 연우란 배신자도, 내가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줄 테니까. 잘 고민해보고 결정 내리면 연락해라. 되도록 빨리해야 할 거야. 지체되면 후회해도 늦은 게 될 테니까.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박태후의 협박 조건.
하지만 이곳에 몰래 숨어지낸다면 괜찮지 않을까?
타연 속에서도 함께하다가,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달려가 볼 수 있을 테니까.
“찾아보면 더 좋은 곳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괜찮은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기존 집에서는 무조건 나와야 할 것 같긴 하니까.”
“호호. 그렇죠? 그럼 우리 이제 같은 길드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도 되겠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오빠!”
“그, 그래.”
여전히 붙임성 좋고 쾌활한 성격 그대로인 연우.
이 상황이 겁도 나지 않는지 이사 얘기만 조잘대는 그녀와 앞으로 자주 보게 되었다.
타연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