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급성장 (2)
‘너무 빨리 올라왔다라?’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저 천계라는 신규 오픈 지역을 최대한 빨리 탐험해서, 선두주자로서의 온갖 혜택들을 독식할 생각만 했을 뿐.
그 결과 필드 보스의 퍼스트 킬과 신의 가호라는 최상급 버프를 선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필드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만 줄창 사냥했지, 뭔가가 진척된 건 하나도 없었다.
만약 그 이유가 우리가 놓친 게 있어서, 쉽게 말해 중간 과정을 패스해 와서 그런 것이었다면?
“조금만…….”
“네?”
“조금만 더 설명해 줘봐. 네 생각을 더 들어보고 싶어.”
“아하, 네! 요 며칠 함께 사냥하면서 느낀 건데, 이곳은 너무 무미건조하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천계란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있는데 여긴 유저들의 기대와 너무 어긋나게 만들어진 곳 같다고나 할까요?”
“흐음?”
“분명 개발자들도 무슨 생각이 있었으니 이렇게 만들었을 거잖아요. 제국 황궁이나 세계수가 있던 생명의 숲만 해도, 그 풍경에 압도돼버릴 정도로 예쁘고 멋지게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니까요!”
사실 내가 타연에 빠지게 된 이유 중에는 완성도 높은 판타지풍 배경 탓도 있었다.
플레이하지 않는 유저라도 한 번쯤은 관광 삼아 접속해 본다는 타연.
세상 어느 명승지나 절경 못지않은 풍경이 필드 곳곳에 셀 수 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죽하면 대탐이처럼 탐험만 하는 유저들이 다수 존재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천계에서는 그런 감흥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몽환적인 구름 위 무너진 건축물들이 제법 멋지긴 했으나, 그 외는 허허벌판에 안개만 깔아두고 성의 없게 심연의 몹만 풀어둔 느낌.
즉, 지금 이 ‘천계’의 풍경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분명 일루전이 깜짝 공개했던 2.0 업데이트 광고 영상에서는, 지금과 다른 모습의 천계가 나왔었으니까.
-광고 영상 리마인드 분석_지금 오픈된 곳은 진정한 천계가 아니다?
-루네아의 다음 지역도 여전히 황폐하다는 충격적인 정보!
-심연에 잠식된 천계를 되살릴 방법은?
너튜브나 커뮤니티에서도 이 같은 의문이 화제였다.
하지만 공성전과 건국 등의 이벤트에 집중하느라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
그걸 연우가 짚어주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몇몇 지역은 너무 스킵하고 넘어오긴 했어. 살펴볼 게 많았을 텐데…….”
“진작 모든 지역이 오픈된 데스라 사막에도, 뒤늦게야 활성화된 인던이 숨겨져 있곤 했잖아요? 분명 지상에도 천계를 변화시킬 퀘스트나 단서들이 존재하고 있을 거예요. 제 생각엔 심연 몬스터는 아무리 잡아봤자 경험치 말고는 뭐가 안 나올 거 같거든요.”
“그래……. 뭔가 드랍한다면 벌써 나오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잡긴 했지. 우리만 천계에 올라왔다면 모를까, 웬만한 고레벨들은 한 번쯤은 전부 올라와 봤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참에 지상을 찬찬히 둘러보시는 건 어때요? 공성도 끝나고 다리우스도 다녀가서, 조금은 여유가 생겼잖아요?”
“응? 당분간은 네 버스도 태워주고 레벨 차이 좀 벌려놓게, 사냥에만 전념해볼 생각이었는데?”
“오빠! 그럴 시간이 있어요? 신의 가호 지속 시간이 30일밖에 안 된다면서요? 신석 이용 권한을 누군가한테 뺏기지 않으려면, 천계 콘텐츠도 제일 앞서나가야죠!”
아직도 앉은 채로 주장하는 연우.
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흐음……. 아무리 봐도 나랑 사냥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냐? 너무 힘들어서?”
“아, 아닌 데요?”
“뭐가 아니야? 다시 사냥하려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혼자 내려가서 조사해보란 소리나 하면서?”
“아니 오빠, 솔직히 이런 레벨업 속도는 상상 이상이라 좋긴 한데요……. 오빠 스퍼트 따라가다간 지쳐서 접겠어요! 전 그냥 연석이 파티에 껴서 사냥할 테니까, 오빠는 그만 내려가셔서 할 일 하세요.”
“응, 안 돼. 어림없어. 네 뜻대로 내려가 보긴 할 건데, 오늘 너 392렙 찍는 건 보고 갈 거야. 그러니 어서 일어섯!”
“히잉. 네…….”
어떻게 만나게 된 최고의 몰이꾼인데, 이렇게 금방 놔줄 순 없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고, 다시금 심연의 파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그래서 제국에 무슨 변화가 없었냐는 게 궁금하단 거지?”
“네, 맞아요 형님. 신의 가호가 주어진 후로, 다르게 대하는 NPC들이나 새로운 퀘스트 같은 게 주어지진 않으셨어요?”
“흠……. 그런 건 딱히 없었다.”
오스타그의 한 여관방 안.
이틀 만에 지상으로 내려온 나는, 곧바로 카이저 형님부터 찾았다.
제국 하면 또 카이저 형님을 따라갈 유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석을 활성화해서 각 지역에 안전지대를 형성한 후로…… 아무런 진척이 없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천계 지역 오픈과 연관된 것들이, 제국이나 생명의 숲에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타당한 추리다. 확실히 내가 천계에 더 머무르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지. 일단 무슨 NPC라도 보여야 퀘스트를 얻기라도 할 텐데, 덩그러니 몹들만 수북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원로원장이 줬다는 퀘스트는 잘 진행되셨어요?”
카이저 형님은 언제봐도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남들이라면 아무리 별다른 게 없어 보여도, 효율적인 레벨업을 위해 천계에 남아 사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저 당장은 재미없는 곳 같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덕분에 형님은 아직도 399레벨로 전직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틀 전 400레벨을 달성한 라챤이보다도, 낮은 레벨에 머물고 계신 것이다.
‘물론 신창을 갖고 계시니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으시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헛된 시간만 보내신 건 아니었다.
그동안 레벨업까지 포기하면서 시간을 투자했다던 퀘스트.
거기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원로원장인 카일 루퍼스, 지혜의 마탑주인 뷔잔드. 그리고 텔로라교의 교황인 에레미아까지……. 테론 대륙의 최고 거물급 NPC들의 연계 퀘스트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어쩌면 천계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엇! 어떤 건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계와 얽혀있다. 황제를 죽여야 한다는 의뢰가 주어진 이유. 현 황제 제피르 3세의 계획이, 마왕을 소환하려는 것이라는 게 밝혀졌거든…….”
“네? 정말이요?”
마왕 소환.
만화나 소설, 혹은 게임 스토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클리셰.
어쩐지 현 제국 황제가 종종 전쟁광으로 묘사될 때마다 뭔가 수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 진행되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 게임의 배경이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마계는커녕 유저들이 잡을 몬스터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테니까.
“퀘스트가 천문 개방 이후 주어진 걸 생각해보면, 마계 지역 오픈은 제국과 연관 있는 것 같다. 혹은, 마계 침공의 단초가 주어질 계기는 황제 암살일 수도 있지!”
“와! 벌써요? 그건 훨씬 나중이 아니었어요? 황제의 친위대들이 엄청나게 강하던데요!”
“물론 힘들겠지. 하지만 지금 이런 퀘스트가 주어졌다는 걸 고려해보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얻은 이 신창은, 황제를 죽이는 조건으로 주어졌던 것이니까…….”
황제 암살이라.
하긴 천계 정상화나 마계 오픈, 혹은 새로운 대륙 등등.
차후 진행될 스토리와 필드들을 고려해보면, 조만간 황제가 죽는 것도 모양새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또한, 듣고 보니 왠지 곧 벌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다리우스…… 그 자식이 아직 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가 그거일 테니까.’
황제 등극.
원래 건국과 동시에 타연에서 은퇴하려던 걸 미루게 된 이유.
그건 대관식에서 망가진 자신의 위신과 자존심을, 건국과 버금가는 업적으로 만회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녀석의 목표를 ‘최초의 황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업 승계 과정을 어렵게 미루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놈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
하지만 게임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적 세력까지 포섭하고 직접 협박까지 다니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황제를 죽이는 이벤트는 생각보다 조만간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놈에게는 그 순간을 알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운영자의 조력이 있었으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나도 너에게 부탁할 게 한 가지 있다.”
“부탁이요?”
“그래. 너희 길드에 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 번은 꼭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일이지. 원래는 너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만 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조건이 갖춰줘서 꺼내는 말이다.”
“형님 부탁이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요, 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고맙다. 분명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일 거다.”
갑작스러운 카이저 형님의 부탁.
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확실히 게임 시스템의 허를 찌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어 나조차도 확인하고 싶은 일이었다.
“아무튼 형님, 퀘스트도 좋지만 얼른 400렙부터 좀 찍으세요.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테크도 해보셔야죠.”
“그래, 알겠다. 아무튼 조만간 준비되면 다시 보자.”
“네.”
그렇게 제국과 관련된 내용을 일단락 짓고 여관방을 나왔다.
그리고 이젠 유저들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생명의 숲.
그곳에 가기 위해 공간이동술사로 향하는데 갑자기 귓속말이 들어왔다.
(축복받은얼굴: 야, 지금 어딨냐? 너 먼저 지상에 내려왔다며?)
(나: 지금? 오스타그에 있는데?)
(축복받은얼굴: 그럼 당장 버몬트로 와라.)
(나: 응? 아하, 드디어 달성한 거냐?)
(축복받은얼굴: 그래, 400렙 찍고 전직 조건도 다 준비했다. 으하하하!)
최근 밥만 먹고 미친 듯이 사냥만 반복했던 현중이.
녀석이 마침내 전직 조건을 갖추고 나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자고!
* * *
“신실하고 용맹한 기사여……. 이제 그대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이제는 더 큰 믿음과 가르침이 필요할 터. 새로운 길을 걸을 준비를 마친 그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겠다.”
성지 버몬트에 있는 성기사들의 마스터, 일리언.
그가 본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현중이에게 말했다.
“제가 택한 길은 그 어떤 고난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강인하고 변치 않는 믿음입니다!”
“그대가 가져온 성물로 굳은 각오를 확인했네. 앞으로 그대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빌겠네.”
“감사합니다, 마스터!”
대답을 끝마치자마자, 현중이의 주변이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이펙트도 없이 전직은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됐다! 신성 기사!”
“맘에 드냐? 후회 안 하겠어?”
“후회는 무슨! 우리 길드의 메인 탱커라면 더더더더 단단해져야지!”
녀석이 택한 전직 직업은 ‘신성 기사’.
방어와 회복에 더욱 특화된 직업이었다.
뛰어난 탱커의 능력은 유지하면서, 강력한 공격 스킬을 갖춘 ‘암흑 기사’란 선택지가 함께 주어졌지만…….
녀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성 기사를 택했다.
앞으로 우리 버닝스타를 수호하는 건, 내가 아닌 녀석이 되겠다면서.
“전직 스킬은 뭐 배울 거야?”
“응? 지금 여유 스킬 포인트가 하나도 없는데?”
“뭐? 나나 당당이, 라챤이가 하는 걸 보고도 준비 안 한 거야? 미리 모아뒀어야지!”
“모을 필요가 뭐 있어. 이게 있는데.”
현중이는 그 말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한 아이템을 꺼냈다.
다름 아닌 제루티안의 축복.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직 스탯과 스킬 초기화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전직한 다음에 선택하려고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널 부른 거야.”
“응? 나는 왜?”
“내가 지금부터 어떤 테크트리를 타면 좋을지, 라챤이처럼 니가 코치 좀 해줘라. 나도 기발한 테크트리로 타연에서 무쌍 좀 찍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