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급성장 (3)
이틀 전, 400레벨을 달성한 라챤이는 이중 직업 대신 전직을 선택했다.
이름은 ‘저격수’.
원거리 공격 범위를 늘려주고 강력한 공격 스킬이 저격 특화 직업이었다.
가뜩이나 드라코닉 보우로 기나긴 사거리를 자랑하던 라챤이.
그런 녀석이 최초로 저격수로 전직했으니, 현존하는 타연 최고의 원딜러가 되었다.
“내가 라챤이한테 무슨 코치를 해줬다고 그래?”
“인마, 내가 모를 것 같아? 라챤이도 제루티안의 축복 썼잖아! 지금 그 자식 팀플하다가도 틈만 나면 당당이와 2인 파티로 천계 쓸고 다니는 거 다 알거든?”
“그거야 둘이 컨도 좋고 죽도 워낙 잘 맞으니까……. 일단 딜이 압도적이라서 힐러가 필요 없는 조합이기도 하고.”
“딴소리 그만하고 말해 봐. 라챤이 자식은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더라고. 대체 어떤 테크로 녀석을 코칭해 준 거냐?”
“별거 없어. 그냥 스탯 비율만 좀 조율해 줬을 뿐이야. 전직 스킬 중에 괜찮은 게 몇 개 있어서 특화시키는 정도로.”
“그게 뭐가 별게 아냐! 그 자식 공격 범위랑 데미지가 지금 완전 사기 수준이더구먼! 오죽했으면 300레벨대보다 지금이 더 레벨업 속도가 빠른 것 같더라? 그니까 라챤이처럼 나도 좀 도와줘 봐. 너 평소에 맨날 이런 거만 생각하던 놈이었잖아!”
사실 현중이가 이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당연히 조언해줄 생각이었다.
내가 우리 길드원들을 혹독하게 사냥만 시켰던 이유.
그건 한 명 한 명이 모두 일당백의 유저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타연 최초로 신성 기사가 된 현중이는, 지금부터 절대 죽지 않는 타연 최강의 탱커로 거듭나야만 했다.
계속 내 뒤만 쫓아오는 게 아니라, 당당히 옆에 서서 함께 이 타연을 씹어 삼키려면!
“알겠으니까, 그럼 일단 기본 전직 스킬 정보부터 링크 보내 봐. 구상 좀 해볼게.”
전직 스킬은 간단한 퀘스트 클리어 및 일정 레벨 도달할 시마다 주어진다.
그러나 특별히 전직 시엔 2개의 스킬북이 바로 주어지는데, 신성 기사는 이름답게 방어 스킬과 회복 스킬이었다.
[빛의 방패 (고유 스킬): ★]
* (passive) 장착 중인 방패로 공격 시 5%의 확률로 기절 상태에 빠뜨립니다.
* (active) 마나 소비: 200, 사용 대기시간: 60초
-30초 동안 모든 회복 스킬의 효과가 10% 추가 적용됩니다.
[영광의 오라(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10
* 사용 대기시간: 5초(on, off시)
* 반경 50미터에 있는 모든 아군의 스킬 사용 대기시간이 5% 감소합니다.
“오! 좋은데? 역시 전직 스킬이다 이건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던가?
최초로 주어진 2개의 스킬만 보더라도 신성 기사의 성장 루트가 보이는 듯했다.
비록 딜링 스킬이나 개인의 컨트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고난이도 스킬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그게 꼭 단점인 것만은 아니었다.
“흐음……. 난 생각보다 좀 별로인 거 같은데? 역시 성기사의 심화 직업이라 그런지, 쓸데없는 오라나 하나 더 주어졌잖아. 이동기나 공격 스킬부터 좀 주지.”
“그런 것도 나오겠지. 요지는 이거야. 애초 신성 기사는 그런 캐릭으로 만들어지고 키울 캐릭이 아니란 거. 그러니 내가 보기엔 신규 오라가 주어진 게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응? 왜?”
“이제 앞으론 상황에 맞게 오라 갈아 끼울 필요 없이, 그 영광의 오라란 거 하나만 익히면 될 것 같으니까.”
솔플로는 성장이 힘든 성기사.
파티 사냥에서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 캐릭을 키우기 위해, 대부분의 유저들은 오라 스킬을 2개 이상 배웠다.
적절하게 교체하는 것 또한 컨트롤과 센스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상당한 스킬 포인트 낭비이기도 한 셈.
한데 새로 나온 신규 오라는 다른 오라가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아 보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스킬 쿨타임 감소 효과.
그 어떤 공격이나 방어 버프가 주어진다 한들, 이것 하나보다 더 좋은 효과의 버프는 없을 테니까.
“일단 새로 받은 두 개 다 괜찮다 이 말이지? 그럼 제루티안 쓴다?”
“오냐.”
기대에 부풀어 초기화를 사용한 현중이.
그 직후 몇 가지 필수 스킬을 배운 녀석과 결투를 수십 차례 겨뤄보았다.
“어때, 슬슬 감이 와?”
“보채지 좀 마 봐! 영감이 떠오르는 중이니까!”
“오, 정말? 제발 대박으로 좀!”
사실 호들갑을 떨었지만, 녀석의 성장 방향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히든이라든지 전설이라든지 하는 직업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타연.
여기서 내가 혼자 날뛸 수 있었던 이유는, 워낙 독특한 테크트리와 막강한 템빨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어느 정도 템빨을 갖추고 있는 현중이도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독특한 테크트리로 남들은 흉내도 낼 수 없을 타연 최강의 탱커가 되는 것이!
“딱 하나 떠오르긴 했는데…… 현중이 너, 형 믿냐?”
“그럼! 믿고말고!”
“건성이 아니라…… 형이 뭘 어떻게 주문해도 두말없이 믿고 따를 수 있겠냐고?”
“그러려고 널 부른 거라니까? 강지환은 못 믿어도 버닝스타의 마스터이신 산드로 폐하는 믿지, 암! 설마 니가 길드의 간판인 메인 탱커를 망치기야 하겠냐?”
“그럼 바로 스탯 전부를 체력에 박아.”
“네? 뭔 개소리십니까?”
“두말 안 하겠다며? 그거 전부 다 체력에 찍으라고. 지금 당장.”
올인형 성장 전략.
절대다수의 유저들은 밸런스를 추구하지 이런 극단적인 스탯 분배를 하지 않는다.
사지(四肢) 중 하나가 없으면 정상 생활이 힘든 것처럼, 캐릭 성장에 있어 버릴 수 있는 스탯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코치하고 있는 유저는 현중이.
그동안 함께 하며 나만큼이나 많은 고급 업적들과 템들을 얻었다.
그 말인즉슨, 녀석 또한 올 스탯 증가나 보너스로 얻은 스탯들로 최소한의 베이스 스탯은 갖춰졌다는 뜻!
“너 예전 레이드에서 한 대 맞고 죽은 거 기억나지? 니 말대로 넌 우리 길드의 메인 탱커니까 무조건 타연에서 HP가 가장 많은 캐릭이 돼야만 해.”
“인마, 장난으로 그러지 말고. 체력만 그렇게 많이 찍어서 똥캐릭을 만들면 어쩌겠단 건데? 공격력을 완전히 포기하면 어그로 관리나 전투는 어떻게 해?”
“긴가민가했는데 새 스킬인 빛의 방패와 영광의 오라 보고 확신이 들었다. 네 디바인급 방패인 레벤다스와 드라코닉 갑옷 세트를 극대화시킬 테크는 이게 최고야. 현재 타연에서 너보다 방어력이 높은 탱커는 몇 명 되지 않을걸?”
“……그래서?”
“그 방어력을 더 효과적으로 써먹으려면 역시 피가 많고 회복이 잘되는 게 장땡이야. 근데 빛의 방패를 5성까지 찍으면 레벤다스로 6성이 될 거고, 회복 계수가 1.6배로 늘어날 테니 이보다 좋을 순 없잖아? 기존의 가시 반사 스킬들도 계속 활용할 수 있고.”
“아 씨……. 맨날 재미는 지 혼자 보고. 무쌍을 찍게 해달라니까 무살(無殺) 캐릭으로 만들어 버리네. 대체 난 언제 태성 놈들 썰고 다니라는 건데?”
“한 번만 믿고 좀 키워 봐. 딜링도 준수하면서 절대 안 죽는 캐릭이 탄생할 테니까. 그리고 너한텐 방패 스턴기가 많으니까, 이걸 스위칭하면서 싸우면 여러 명은 몰라도 한 놈만큼은 무조건 골로 보낼 수 있을 거다. 장담할게!”
말을 마친 나는, 인벤토리에게 한 무기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 이건?”
“놀랐지? 서프라이즈다 자식아. 절대 안 죽는 캐릭이 죽어라 따라붙으면 뭔 수로 이기겠어?”
아이템의 이름은 +2 악마 군단장의 채찍.
특수 스킬인 ‘포획’이 내장되어 있는, 최상위급 레전더리 한 손 무기였다.
“이걸 주면 어떡해! 넌 뭐 쓰고?”
“레전더리 장점이 뭐냐? 디바인과 달리 여러 개 있다는 거 아니냐? 이미 하나 만들어 뒀다. 이건 형님 열심히 잘 따라와 줘서 주는, 전직 기념 선물이야.”
공틈에 있는 군단장을 킬하고, 노스랜드 북부를 헤매는 고르곤을 잡아야만 만들 수 있는 채찍.
얼마 전 흑풍단 수천 명이 모여 리스폰된 군단장을 잡아 망가진 채찍이 드랍된 사건이 있었는데, 운 좋게도 내가 구매할 수 있었다.
이 템이 적의 진영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산 것도 있지만, 내심 그때부터 현중이를 염두에 두고 샀다.
원래 틈날 때마다 한 번씩 보스 레이드 순회를 도는 나였기에, 인기 없는 고르곤은 처음 킬 이후 서너 차례 독식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채찍을 하나 더 완성할 수 있었다.
“와! 이게 있다면 얘긴 달라지지! 방패 스턴기만 2개에다 포획까지 있으면 어떻게 도망쳐?”
“채찍은 한 손 무기니까 스위칭해서 무빙 공격하기에도 좋더라. 사정거리가 상당히 길거든.”
“역시 우리 길마님이야! 짜식이 너무 성의 없게 코칭해주는 거 같아서 서운할 뻔했는데…… 이러면 대인전도 싸울 만하겠네! 으하하핫!”
“인마, 이제 만족하냐? 그럼 형 좀 따라와 봐라. 가볼 데가 있으니까.”
“응? 어딜?”
“생명의 숲. 거기 활보하는 태성 놈들도 좀 쓸면서 같이 단서 좀 찾아보자.”
스탯과 스킬을 찍는지 연신 번쩍이는 현중이.
녀석은 새로 얻은 무기가 맘에 드는지, 만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 * *
“크악!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야!”
“왜요? 우리가 직접 활성화시킨 필드인데 오면 안 돼요?”
스스슥.
잿빛 연기로 사라지는 태성의 궁수.
아마도 죽느라 바빠서, 내가 한 대꾸는 듣지도 못했으리라.
“치사하게 뒤치기냐?”
“엥? 아직도 태성에 이런 소릴 하는 사람이 남아있네?”
퍽! 퍽! 쉬이익.
발끈해하며 달려드는 탱커를 공격하자, 몇 대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이미 잡고 있던 마운틴 자이언트로부터 누적 데미지를 입은 것도 있지만, 테크트리 변경 후 압도적으로 증가한 내 공격력 때문이었다.
“아, 여기 온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메인 딜러, 도둑이 황급히 페가수스를 소환해 날아오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포획!]
휘리릭!
빠른 속도로 이탈하던 도둑의 발에, 뱀과 같은 채찍이 휘감기더니 단숨에 땅으로 고꾸라지듯 당겨졌다.
채찍의 주인은 당연히 현중이.
주변에서 은신 망토 상태로, 내가 놓치는 놈이 있는지 지켜보다 난입하며 쓴 스킬이었다.
“방패 휘두르기!”
쾅! 퍽! 퍽!
그리고 곧바로 도둑에게 스턴을 먹이고, 투 메르타스의 독니를 스위칭해 휘둘렀고…….
“방패 돌격!”
스턴이 풀리기 전, 또 한 번의 스턴기를 사용해 적이 정신 차리는 걸 차단했다.
연이은 스턴 기술.
그리고 레전더리 무기들을 활용한 강력한 평캔 공격들.
그에 체력이 적은 도둑은, 그림자 밟기 한 번 쓰지도 못한 채 죽어버렸다.
“크아! 내가 바로 버닝스타의 축굴 님이시다!”
“아오, 창피해.”
하지만 녀석의 오글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적은 없었다.
함께 온 라챤이가 하나 남아있던 힐러를 속사포와 같은 연사로, 곧장 마을로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드로 형님,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 거죠?”
“그러게 말이다. 이러니 내가 PK할 땐 혼자 다녔던 건데…….”
“와, 넌 이 재미난 걸 맨날 혼자만 했던 거냐? 난 또 우리 사냥하기 편하라고 배려하는 건 줄 알았는데, 지 혼자 꿀잼을 즐긴 거네?”
“인마, 너 혼자 천계나 이런 필드 깊숙한 곳까지 올 수 있겠어? 전직 정도 했으니까 형이 데리고 다녀주는 거야.”
“아무튼! 앞으로 필드전 다닐 땐, 꼭 이 형님도 함께 불러라. 와, 난 딱 한 마리밖에 못 잡았는데도 스트레스가 쫙 풀리네! 방금 죽인 도둑 새끼, 예전에 우리 세인트 길드원 척살한답시고 깝쳤던 놈이었거든!”
일찍 디바인 장비를 얻은 탓에, 오히려 현중이는 필드전에 참여하는 일이 적었다.
녀석 또한 태성 길드에 적지 않은 원한이 있었는데, 그간 내 화풀이를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런 녀석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친히 함께 온 것이기도 했다.
“근데 여기서 뭘 찾는다는 거야?”
“천계와 연관된 단서라면 뭐든지. 일단 꿈틀이 님부터 만나보기로 했으니까 숲 안쪽으로 가보자. 요즘은 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셔서 채집 중이시더라고.”
“아, 그래?”
“간만에 귓말 드려서 여쭤봤는데, 뭔가 발견하신 모양이더라고. 오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고 말씀도 안 해주셔서…….”
“호오……. 그럼 빨리 가보자!”
세계수 뒤편에는 마운틴 자이언트들이 출몰하는 인던이 있다.
우리 길드원들도 짧게나마 사냥에 몰두했던 곳.
그 너머로 계속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엘프들도 출입을 엄금하는 계곡이 나왔다.
“여기도 제법 유저들이 많아졌네?”
“아무래도 천계만 고레벨 사냥터는 아니니까. 올라가려면 돈도 들고…….”
이곳 필드에서 뜨는 몬스터는 인던보다 더 강한 자이언트들.
인간형 모습을 띈 오우거만한 크기의 놈들은, 짭짤한 경험치와 더불어 완성 장비들을 드랍했다.
그래서 곳곳에는 파티 단위로 사냥 중인 유저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앗! 찾았다!”
“엇? 저기는…… 설마 대도 부츠신가? 오오, 돈 좀 버셨나 본데?”
그렇게 눈에 띄는 태성 놈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안으로 진입하다 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절벽 한가운데 붙어서, 무언가를 열심히 채집 중인 꿈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