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급성장 (5)
번쩍! 번쩍!
검신이 연신 신성한 빛으로 물들었다.
“크악!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여, 너희는 현 황제에게 속고 있다!”
퍼퍼펑!
또한, 대포알과도 같은 화살이 끊임없이 날아와 박혔다.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워낙 순식간에 줄어드는 HP 때문에, 콘라드는 일정 구간마다 정해진 멘트를 마치 비명처럼 연달아 외쳤다.
그럴 만도 했다.
타연에서 가장 강력한 궁수의 원거리 폭격과 최강 딜러의 근접 공격이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얼어붙으라, 블리자…….”
“방패 휘두르기!”
또한 4인 던전에 걸맞게, 콘라드는 대형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저들의 CC기 같은 스킬에도 면역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반사신경과 전투 센스만큼은 인정하는 현중이.
녀석의 정확한 스킬 캔슬에 당한 콘라드는, 보스 몹답지 않게 변변찮은 반격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엇, 이런! 어그로 뺏겼다!’
“당연한 거 가지고 뭘 그리 놀라? 이 정도면 오래 버텼구먼.”
그렇게 작정하고 딜을 하자 콘라드는 결국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체력은 50% 미만.
다시 쿨타임이 돌아온 사냥꾼의 춤과 태세 전환을 쓰며, 녀석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스 블라스트!”
[귀신 발걸음!]
“파이어 월!”
[그림자 밟기!]
첫 트라이.
그리고 힐러도 없는 조합.
누가 봐도 클리어는 무리라고 판단할 전투였지만, 레이드는 조금의 문제도 없이 순탄하게 진행됐다.
기본적으로 논타겟팅 게임인 타연.
따라서 특정 보스 공략의 극의에 이르게 되면, 속옷 차림에 단검 하나만 들고 솔플 클리어에 도전하는 유저들도 심심찮게 존재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콘라드는 친절하게도 캐스팅 멘트로 미리 마법 사용을 알려주었고, 유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몸짓으로 선행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 온갖 실전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녀석의 마법 공격 따위는 맞아주려야 맞아 줄 수 없었다.
“지옥의 불꽃을 이곳에 소환하나니…… 헬 파이어!”
강력한 공격력과 더불어 도깨비불마냥 무조건 적중시키는 유도 기능.
현존하는 단일 타겟 공격 중 가장 유명한 마법인 헬파이어가 페이즈 변경과 동시에 쏘아졌다.
마탑주 뷔잔느와 달리 초고속 캐스팅으로 발동된 마법은, 그저 순순히 맞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왔다.
하지만 나에게는, 공교롭게도 새롭게 획득한 카운터 장비가 있었다.
[마법 흡수!]
머리 위에서 홀연히 빛나는 이펙트.
그와 함께 지옥의 푸른 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서클릿 안으로 흡수됐다.
“엇, 방금 뭐야?”
“뭐긴 뭐야. 템빨이지.”
“이런 미친 개사기캐!”
타연 최강의 탱커인 현중이도 두려워할 만한 마법.
데미지는 물론이고 막강한 후속 도트 데미지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공격이 허무하게 무효화됐다.
이처럼 디바인 템은, 한 캐릭 안에 모이면 모일수록 점점 더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보여줬다.
“아직 내 손에…… 룬 도란트가 들려있었다면……!”
퍼석.
그리고 마침내, 연이은 파상 공격에 콘라드가 무릎 꿇었다.
파티원 한 명은 전투는커녕 구경만 했는데도, 첫 트라이에 성공한 것이다.
[업적 ‘옛 영웅의 추적자’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클리어를 축하하듯 업적이 주어졌다.
비록 B급에 불과했지만 올 스탯을 올려주는 준수한 효과였다.
“깼구나!”
“와…… 무슨 퍼스트 클리어를 이렇게 쉽게……!”
“쉬웠다뇨? 공격 피한답시고 엄청 집중하는 거 보셨잖아요.”
“그래도…… 어지간한 유저는 400렙을 찍어도 힘들 보스로 보였는데요…….”
전투를 지켜본 꿈틀이의 소감.
사실 그의 말과 같이 만만한 보스 몹은 결코 아니었다.
이 리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전설 속 12영웅 중 하나였으니까.
“가끔은 정교하고 복잡한 공략법보다 단순 돌격이 나을 때도 있는 법이잖아요? 이놈이 그런 보스였던 거죠.”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버닝스타 길드 분들의 전투는 뵐 때마다 경이롭네요.”
하지만 아무리 보스몹이라도 체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즉 마지막 페이즈에 아무리 강력한 스킬을 쓰더라도, 빠르게 잡아버리면 여러 번 쓸 것도 두 번 쓰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극상성이었던 리치는, 순살 당하듯 빨리 잡혀 마치 쉬운 놈처럼 보인 것이었다.
“길마야! 어서 루팅 안 하냐? 그럴 거면 루팅 권한 좀 파티원한테 돌려놓든지!”
“어허, 누구 좋으라고?”
재촉하는 현중이 때문에 제법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콘라드의 시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루팅하려고 몸을 굽히자, 주저앉았던 시체가 다시금 떠올랐다.
“불사가 된 나는 이대로 잠들 수가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에……!”
그리고는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 찬 동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엇?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리치라 그런가? 근데 다 잡은 거니까 업적도 나온 거잖아!”
“다들 잠시만…… 이거 시네마틱 영상이다! 어서 붙어 봐!”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시네마틱 영상이 재생됐다.
-아서, 제논이 정말 그렇게 말했단 건가? 그러면 우리를 내쫓았던 건……!
-틀림없네. 마왕군을 패퇴시킨 후, 미친 듯이 왕국들을 점령했던 진의를 인제야 알게 되었네. 그가 왜 황제의 길을 택했는지! 제논은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고 마음먹은 거였네!
장소는 이곳 콘라드의 거처.
하지만 어두침침한 지금과 달리, 깨끗하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생전의 콘라드로 보이는 인물은 고풍스러운 갑옷 차림의 성기사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마왕이 했던 말을 담아두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가 벌인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네! 세계수마저 파괴하다니?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짓을 벌인 제논에게 어떤 천벌에 닥치게 될지!
-물론이네. 조만간 그에게 ‘신의 저주’가 내려지겠지. 백 년…… 아니, 천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난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의심만 했군……. 제논 이 못난 친구. 세상의 모든 악명도 모자라 후세의 희생까지 짊어질 작정이었다니……. 아서, 혹시 제논을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겠는가?
-이미 세계수가 파괴되었으니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제논의 남은 행보를 숨죽여 지켜보는 것뿐. 그가 저주로 인해 더 큰 광기에 물들지는 않는지 말일세…….
-이곳 중간계를 지키기 위해 영혼마저 희생해버렸군……. 가여운 영웅 제논이여,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너의 그 숭고한 뜻에 동참하리라!
-콘라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지켜보면 알게 될 걸세, 아서…….
두 옛 영웅의 짤막한 대화만 보여준 시네마틱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현세의 인간들이여…… 숨겨진 진실과 진정한 영웅을 외면하지 말지어다…….”
그렇게 다시 시야가 되돌아오자 눈앞의 콘라드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뭐지? 대체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현중이 형, 이거 가만 보니까 초대 황제가 악당이 아니라 진짜 영웅이었나 본데요?”
세계수를 파괴시키고, 세계수 정령인 가이아를 빼앗아갔던 제논 가이룩스.
한데 그 행동의 진실은 ‘선의’였단 말인가?
‘게임 설정상 중간계는 세계수가 있어야만 천계와 이어질 수 있었지……. 그렇다면 반대로, 마계와도 연결되려면 세계수의 존재가 필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해…….’
뜻밖의 반전 스토리가 드러나자, 간만에 흥미가 돋았다.
나 또한 이 타연을 즐기는 헤비 유저 중 하나.
거기다 최근 스토리 공략에 열 올렸던 선두주자였기에, 이런저런 가정 끝에 한 가지 추측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제논이 세계수를 파괴했던 건 심연이 침략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구나!”
“응? 그게 무슨 소리세요, 형님?”
“모두들 천계가 심연에 잠식된 걸 봤잖아……. 그건 신들조차 심연에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단 걸 의미하지. 그렇다면 마계는 멀쩡했겠어? 공틈에 있는 군단장조차 심연에 잠식된 상태였는데 말야.”
“엇? 그러네요?”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천 년 전 마계가 중간계를 침공해 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심연에 공격당하자 마지못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선 거지.”
아서와 콘라드의 대화는 단편적이었지만, 하나하나 곱씹어볼 만한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이런 내용이 있었다.
최후의 순간, 마왕이 12영웅들에게 어떠한 진실에 대해 알려주었다고.
“타 차원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세계수를 파괴했고, 제국을 건설해 혹시나 재현될지 모를 마도 시대의 잔재를 하나둘씩 없앴다. 즉, 스스로 악역인 폭군을 자처해 중간계를 천 년간 지키게 된 거지. 마나가 부족한 땅으로 만들어 외부로부터 고립시킨 거야!”
“드로 형님. 말씀이 그럴싸하긴 한데…… 그게 사실이라면 문제 아니에요?”
“응? 라챤아, 드로 말이 뭐가 문제란 거야?”
티키타카 하듯 라챤이와 대화를 주고받자, 중간에서 아직 이해 못 한 현중이가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라챤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구나!”
“네, 형님. 어쩌다 보니 유저가…… 아니, 저희가 문을 열어버린 셈이 됐어요.”
“대체 뭔 얘기를 하는 거야?”
“세계수의 회복이요. 천문이 개방된 건, 다시 말해 마계의 침공 조건이 갖춰졌단 뜻이었어요!”
지금껏 마계와 이어지는 루트는 어떻게 발견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마계는……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아니었어!’
마왕군의 침공은…….
우리의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 * *
[산드로: 다들 말씀드린 대로, 지상에 내려가게 되면 우선 콘라드 인던부터 클리어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축복받은무빙: 알겠다, 알겠어. 아무튼 당분간은 바쁘겠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산드로: 어차피 유저들의 레벨 수준에 맞춰서 침공이 진행될 테니, 너무 서두를 건 없어요. 다만 태성 라인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일이 겹칠까 봐 염려인 거죠.]
[당근당근단검: 하긴 이제 막 전쟁에서 역전할만한 타이밍이었는데... 갑자기 변수가 생겨버리면 문제긴 하겠네요. 태성이 그쪽 콘텐츠를 먹게 되면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산드로: 당당이 말대로예요. 만약 마계도 천계와 비슷하게 설정된 곳이라고 가정한다면, 신의 가호와 같은 엄청난 버프가 없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마계 침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태성을 무너뜨려야겠습니다.]
인던을 클리어한 후, 나는 즉각 전 길드원들에게 우리가 알게 된 내용을 공유했다.
그리고는 곧장 천계로 다시 올라왔다.
‘당장 천계의 복구고 뭐고 상관없어졌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생각보다 스토리 진행이 빠르게 진행되어, 조만간 게임 속에 무척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
천계가 모습을 되찾든 잠적한 신의 행적을 알게 되든, 당장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이유 한 가지.
그건 콘라드 인던에서 퍼스트 클리어로 얻은 보상 때문이었다.
<콘라드의 마법 스크롤(레전더리, 특수 아이템)>
놈이 드랍한 일회성 소모 템.
줍자마자 자동적용된 이 스크롤엔 단순하지만 놀라운 효과가 담겨 있었다.
* 심연에 대항하고자 노력한, 대마법사 콘라드의 성과가 담긴 스크롤입니다.
* 사용 시 심연의 몬스터들에게 5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유지 시간: 일주일)
대놓고 레벨업하라고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는 버프 템.
다른 길드원들은 고작 하루짜리의 25% 추가 데미지가 주어진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큰 효과였다.
그러니 당분간은 천계 복구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다.
이 효과가 사라지기 전까지, 천계에 널려 있는 심연 몹들을 최대한 많이 잡아야 했으니까.
‘앞으로 일주일 동안…… 죽어라 사냥만 한다!’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난 오랜만에, 천계 이테른 지역에 처박혀 다시금 무한 사냥 모드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