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개전 (1)
“형님. 뭐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말해 봐.”
귀환 주문서로 동시에 아베르 성으로 귀환한 라챤이와 나.
나란히 타이탄 제작 연구소로 걸어가는 도중, 라챤이가 뭔가 어려워하는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히캬 형, 아니 한계돌파 형이요……. 혹시 저희 길드에 영입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 그 소리였어?”
“네……. 지옥불 형님이 용서하셨지만 피닉스로 돌아가시긴 좀 그런 것 같고…… 저희 길드에 오시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지옥불 형님과 한계돌파, 이렇게 셋이 나눴던 대화.
그 내용을 쭉 함구해왔기에, 라챤이는 그가 우리 길드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만도 했다.
“하긴…….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따랐는지는 나도 잘 알지. 신직업인 인챈터 랭커이기도 하니까 들어오시면 도움도 많이 될 거고. 근데 어려워.”
“역시 그렇나요?”
“그게 아니라, 오라고 해도 그 사람이 안 올 거거든. 뭔가 생각한 바가 있어서 복귀한 거니까…….”
“네? 무슨 목표요?”
“그건 내가 말해줄 게 아닌 것 같다.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해 봐. 그러고 보니 만나 봤어?”
“아니요. 연락도 없고 귓말도 닫아두셔서 한 번도 못 뵀네요.”
“그래. 미안하기도 하고 아직 생각할 게 남아서 그런 걸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조만간 널 찾아오는 날이 올 거다.”
“네…….”
아직 한계돌파가 히든캬드라는 사실은 극비였다.
하지만 히든캬드의 생사마저 염려하는 라챤이였기에 혼자만 넌지시 알려주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우애 좋던 동생과 재회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갈라놓게 만드, 태성이라는 적이.
“오셨어요?”
“와 계셨네요?”
“그럼요. 도전 구경이 얼마나 쫀득쫀득하니 재밌는데요!”
도착한 타이탄 제작 연구소엔 핑크래빗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이번으로 벌써 5번째 도전하는 타이탄 제작.
그 모든 과정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그녀였다.
“하하! 오늘도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이번엔 라스트챤스 님 차례라 함께 오신 거죠? 확실히 빠르긴 빠르네요. 4번째 도전을 한 지도 며칠 안 된 거 같은데요.”
“함께 왔으니까 오늘은 무조건 성공해야 해요. 이제 타이탄 정수 조각도 몇 개 안 남았으니까요.”
주성 건물 옆 한쪽에 지어진 연구소.
거금을 투자해 설립한 이곳에는 전문 NCP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그들 중 수석 메카닉이자 마법사인 메이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메이슨, 다음 타이탄은 완성됐어?”
“마이 로드, 산드로 님이시여. 이를 말씀입니까? 분부하셨던 대로 제작이 완성되어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연구소 안.
메이슨의 뒤편에는 여러 인부가 매달려 있는 6미터 크기의 강철 기사가 동상처럼 앉아있었다.
몇 날 며칠 이어지는 제작 과정마다 들르다 보면, 점차 타이탄이 모습을 갖춰가는 모습을 몇 단계에 걸쳐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정도면, 각인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래? 그럼 한번 도전해 볼까?”
[제작 의뢰한 타이탄의 이름을 각인하시겠습니까? 실패 시 제작 중인 타이탄은 파괴됩니다.]
타이탄 제작의 마지막 단계, 이름 각인.
일명 ‘부름’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이 무사히 끝나야만 타이탄을 소환할 수 있는 정수가 생성됐다.
그리고 이 과정은 무기 제작으로 치면 제작 성공이냐 실패냐가 결정되는 ‘랜덤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떠랏!’
성공 여부에 따라 돈으로 치면 몇억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
하지만 이미 2번이나 실패를 겪어 봐서 무덤덤한 상태였다.
그래서 괜히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수락 버튼을 터치했다.
[솔저급 타이탄 ‘프리덤 나이츠’의 각인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변화.
메이슨이 아직 거대한 금속 덩이에 불과한 타이탄에게 다가가 이곳저곳을 만지자, 타이탄의 고개가 들리며 눈에는 불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들썩거리며 조금씩 일어서려 했다.
“제발 성공! 성공!”
이미 우리 길드원들이라면 몇 차례나 구경했던 과정.
하지만 자신만의 커스텀 타이탄이나 마찬가지인 놈의 제작이라 그런지, 곁에서 라챤이가 다시 한번 애타게 외쳤다.
여기서 각인에 실패하게 되면, 타이탄은 고개를 떨구며 빛을 잃고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성공하게 되면……!
[타이탄 각인에 성공했습니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타이탄이 어깨를 편 채 당당히 섰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던 두 손에는, 어느새 전용 무기인 장궁이 들려있었다.
처음 제작 의뢰 과정에서 선택했던 것이, 대부분이 택하는 ‘전사형’이 아닌 ‘궁수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자! 성공이다!”
“우와! 대박이에요! 정말 축하드려요!”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는 라챤이와 핑크래빗.
그러는 동안 타이탄은 마법진과 함께 사라졌고, 메이슨에게 다가가자 그가 타이탄이 담긴 정수를 건네줬다.
[타이탄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연우와 당당이에게 건네줬던 두 타이탄 이후, 세 번째로 제작에 성공한 우리 국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타이탄이었다.
[프리덤 나이츠(솔저급, 궁수형)]
* HP: 250000/250000 * MP: 95000/95000
* 공격력: 3120 * 물리 방어력: 2020 * 마법 방어력: 1550
* 프리덤 국의 타이탄 제작 연구소에서 생산된 원거리 궁수형 타이탄으로, 프리덤 국의 세 번째 타이탄입니다.
* 소환 시간이 다하거나, HP를 전부 다 소진하면 소환이 해제됩니다. (소환 시간 : 레벨×1초)
* 소환 해제 당시의 HP에 따라 재소환 시간이 변동됩니다. (소모된 HP 1%당 소환 대기시간 1시간, 최소 대기시간 24시간)
* 좁은 지형이거나 인스턴트 던전류의 공간에서는 소환이 제한됩니다.
* 소환 재료: 빛나는 마력석 1개
* 타이탄 전용 스킬 ‘멀티플 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멀티플 샷(고유 스킬): MP 5000을 소모하여 공격력의 150%에 해당하는 20개의 화살을 발사합니다. 사용 대기시간 15초.
일반 전사형 타이탄보다 제작 의뢰 비용과 기간이 2배는 더 걸리는 궁수형.
기본적으로 타이탄이란 ‘진형 파괴’ 역할을 하는 ‘탱커’로 써먹을 때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여타 국가들에서는 궁수형 제작은 거의 버림받다시피 외면받았는데, 나는 과감히 제작에 도전했다.
나에게 타이탄이란…… 대규모 전투에서 쓰이는 뛰어난 전략적 가치보다, 길드원들에게 여벌의 목숨을 주는 보호장비에 가까운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실패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축하한다, 라챤아. 어디다 드랍하지 말고, 얌전히 잘 타라.”
“감사합니다, 형님!”
“와! 이제 챤스 님까지도 타이탄을 보유하게 되셨네요! 그것도 딱 맞춤 제작인 궁수형으로요!”
“하핫! 원래도 넘치는 간지를 주체 못 했는데, 이놈마저 얻게 됐으니 작살 나겠는데요?”
“뭐야? 너도 현중이한테 물들었냐? 왜 갑자기 생전 안 하던 간지 타령이야?”
“헤헤헤! 그만큼 좋은 걸 어떡해요!”
그간 별로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녀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만약 실패했다면 무척 실망했을 뻔했다.
하긴 함께하는 나나 현중이는 진작에 최상급 타이탄을 타고 있었고, 적들도 하나둘씩 솔저급을 갖추고 있었으니 부럽긴 했을 것이다.
내심 궁수라서 포기도 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얻었으니 기뻐할 만도 했다.
‘나도 처음 타이탄에 탔을 때…… 그 설렘을 잊을 수 없지.’
그래서 더더욱, 타이탄 제작과 연구에 투자를 아낄 수 없었다.
내가 아끼고 애정하는 우리 길드원들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이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었으니까.
“길마님, 바로 또 제작 의뢰하실 거죠?”
“네, 래빗 님. 일단 궁수형 제작에 성공했으니 조건 하나는 달성했네요. 그러니 남은 조건도 마저 달성해야죠. 이제 2개만 더 성공하면 되겠네요!”
“확실히 후발주자가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시행착오를 줄이고 효율적이고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그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버스국의 국왕, 지옥불 형님을 통해 알게 된 정보.
타이탄 제작 연구소는 일정 조건을 달성할 때마다,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즉 연구소에는, 계속해서 솔저급 타이탄만 양산하는 한 가지 기능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퀘스트처럼 떡 하니 달성 조건이 적혀있는 게 아니라 모르고 있었다. 한데 최근 궁수형 타이탄 제작에 성공해서 알게 되었지. 이 연구소 또한 ‘티어(tier)’란 게 존재해서, 잠겨있던 새로운 역할들이 차츰차츰 오픈된다는 것을!
형님이 전해 준 조건 중 하나는 초반에 제작 가능한 ‘전사형’과 ‘궁수형’, 이 두 가지 타입의 타이탄을 모두 제작하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총 5기 이상의 타이탄 제작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얼핏 간단해 보였지만, 타이탄의 제작에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실패 확률이 존재한다는 걸 고려하면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또한 가성비와 쓰임새가 좋지 않아 보여 선택을 주저했던 궁수형 타이탄도, 제작에 성공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이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거기다 제작할 수 있는 나머지 국가라 봐야 전부 다 적들이라…… 형님이 직접 알아내셔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이미 이 과정을 겪은 지옥불 형님의 조언이 있었기에, 헤매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솔저급 ‘전사형’ 타이탄의 제작을 시작합니다. 완료 예상 시간은 142시간 후입니다.]
[파괴된 타이탄의 정수 조각을 사용합니다. 완료 예상 시간은 71시간 후입니다.]
[파괴된 타이탄의 정수 조각을 사용합니다. 완료 예상 시간은 35시간 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유 중인 파괴된 타이탄의 정수 조각을 제작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제작 연구소의 티어를 2단계로 올리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제작도 성공했으니 가볼까?”
“엇? 어디요? 뭐라도 쏘시게요?”
“인마, 선물한 건 난데 쏘긴 내가 왜 쏴? 쏘면 네가 쏴야지.”
“헤헷! 갑자기 어딜 간다시길래 그랬죠.”
“이게 점점 현중이 닮아가네. 넌 그동안 형을 그렇게 봐 와 놓고도 모르겠냐? 새로 타이탄을 뽑았으면 뭘 해야겠어? 시운전을 해봐야지!”
“앗! 그렇죠? 안 그래도 저도 바로 소환해보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얼른 천계로 올라가자. 남아있는 마지막 천사장도 소환한 김에 잡아버리게!”
지난 일주일간, 심연의 몬스터들을 잡아 레벨업하느라 한 시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냥만 한 건 아니었다.
필수적으로 다수의 타이탄을 필요로 하는 타락 천사장의 레이드.
우리는 아직 퍼스트 킬을 당하지 않는 놈들을 정리하며 다수의 아이템 또한 독식했다.
그리고 마침 이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타이탄까지 합류하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이테른 지역의 천사장을 사냥할 차례였다.
* * *
“자, 이제 현중이만 오면 바로 시작할게요.”
“넵, 형님!”
처음 천사장을 잡을 때는 우리 길드원들만으로는 힘들어 피닉스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이 우리 길드원들만으로도 가능했다.
이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급성장한 스펙업 때문.
천계에 올라온 지도 어느덧 보름이 넘은 지금, 우리 길드원들은 핑크래빗을 제외한 모두가 전원 400레벨을 넘기게 되었다.
뒤늦게 합류했던 연우마저도!
-다들 랭킹 게시판 봤어요? 산드로 뭐예요? 버그 쓰고 있는 거 아니에요?
-통합 랭킹 1위가 무슨 하루에 레벨업을 2개씩 하고 있죠? 도대체 어디서 사냥 중인 거죠?
-나참 어이가 없어서ㅋㅋㅋ 누군 전직 레벨도 까마득한데, 랭킹 1위는 벌써 420레벨이 넘다니... 이거 박탈감 때문에 게임할 맛 나겠어요?
일주일간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를 뒤덮은 나에 대한 원성들.
그건 바로 매일같이 랭킹 게시판에 게시되는 내 레벨 때문이었다.
아니, 레벨업 속도 때문이었다.
통상 죽음의 구간이라고 칭하는 350레벨부터는 레벨업이 결코 쉽지 않다.
온종일 사냥해봤자 경험치의 절반을 겨우 채울까 말까 한 수준.
손만 까닥하는 기존의 게임과 달리, 가상현실에서의 사냥은 극한의 노가다와 인내심을 요구로 했다.
하지만 350구간도 그러한데 400구간.
그것도 가장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내가 매일같이 2레벨업씩을 달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들도 덩달아 대부분 통합 랭킹 20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일반 유저들이 이렇게 원성을 쏟아내는 것도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