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개전 (5)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까? 내가 너무 정곡을 찔러 버렸나? 근데 정말 간도 크네. 다리우스 님을 상대로 뒤통수 치고, 온 유저를 속이려 들었다니!”
이런 상황에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접속하자마자 이놈들과 마주쳤다.
난 둘러싼 심연의 파편을 빠르게 정리하고 계속 비아냥대는 동그라미를 돌아봤다.
‘사실 함정이랄 것도 없었지.’
그간 조용한 곳만 돌아다닌 터라 이런 일이 없었지만…….
누군가 시비 걸려고 작정한 놈들이 있다면 언젠가 생겨도 생겼을 일이었다.
원래 타연 유저들은 어지간해선 언플을 하지 않는다.
언플이란 결국 말싸움이나 마찬가지.
타연 내에서의 분쟁으로 밖에서 말싸움하는 건, 하는 이나 구경하는 이나 증인이 없다면 결국 의미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연 속 분쟁은 대부분 ‘말’이 아닌 ‘힘’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언플을 시작한다는 건, 결국엔 자신의 캐릭터를 건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인터넷만 하고 타연에 접속하지 않을 건 아니었으니까.
“말 진짜 많네요.”
“응? 뭐라고?”
“당신네들…… 밖에서건 안에서건 말이 정말 많다고요.”
어제 다리우스의 글을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놈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직접 찾아와 협박까지 했던 놈이 이런 치졸한 언플에까지 가담했다?
이건 놈도 작정했다는 뜻이었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굴었지만 그게 안 될 것 같자, 이젠 할 수 있는 방법을 뭐든 총동원하겠다고.
놈이 쓸 수 있었던 카드, 연우.
항상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태성과 맞서 싸워온 내게, 이 카드는 내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유저들의 반응은 전에 없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계속 감춰둔 채로, 언제가 됐든 중요한 순간에 써먹어도 될 조커 카드기도 했다.
그걸 지금 공개했다?
“어쩌라고? 내 입으로 맘대로 말도 못 해?”
“하세요, 실컷. 하지만 여기선 말고요.”
“응? 그럼 어디서?”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우리가 느끼는 걸 분명 녀석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가다간 태성 길드는 우리에게 지게 된다!
각종 길드 포섭 및 뒷공작을 벌이고 현실 협박까지 해가며 우세한 판세를 만들었지만…….
우리들이 본격적으로 공성에 참전하자 형편없이 휘둘렸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 공성전 때는?
심지어 격차는 계속 벌어지는 중인데?
지금 다리우스 놈은, 이것저것 잴 게 없을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표출된 게 이번 사건이었다.
“그딴 소리가 하고 싶으면 마을 가서 하세요. 지금 보내드릴 테니까요.”
[태세 전환!]
[급소 공격!]
계속 떠벌이고 있는 동그라미.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격력 버프 하나만 걸고 바로 급소 공격을 먹였다.
빠르게 휘둘러진 8번의 공격.
연속된 경직 탓에 그녀는 이동기 하나 쓰지 못했고…….
주변의 동료들은 갑작스러운 내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꺅!”
그리고…….
허공을 수놓은 치명 공격의 발동 이펙트와 함께, 그녀는 잿빛 먼지로 산화해버렸다.
“뭐, 뭐야? 미쳤어? 치랬다고 진짜 쳐?”
“당신이 말했잖아요. 태성과 한패란 걸 확신한다면 선공해보라고요.”
“너 돌았구나? 진짜 제대로 안하무인이었잖아? 그렇다고 아무 증거도 없이 중립인 우리를 쳐? 랭킹 1위가 이따위 비매너짓을 해?”
“잔말 말고 죽으면 가서 똑똑히 전하세요. 그토록 싸움을 원하는 것 같으니, 내가 응해주겠다고요.”
“누, 누구한테!”
“이번 일을 시작한…… 그 ‘누군가’한테요.”
난 그 말과 함께 도토리를 공격했다.
원래라면 힐러를 먼저 공격하는 게 순서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내 무자비한 공격력은 일개 힐러 한 명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퍽! 퍽! 퍼퍽!
번쩍이는 신검의 마법 이펙트.
제법 버티는가 싶더니만, X자로 휘둘러진 연속 베기를 버티지 못하고 금세 쓰러졌다.
“치, 치지 말아요! 우린 조용히 있었잖아요!”
“어제 함께 선공했던 건 벌써 잊으셨어요?”
그 모습을 지켜본 마법사와 궁수, 힐러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어떻게 할까 머리 아팠는데 이들이 그 고민을 없애줬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오늘, 태성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것으로.
“크헉!”
“이 미친 산드로! 완전 막나가는 놈이었네!”
나는 결코……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 * *
-그러니 일단은 조금만 더 웅크려서 힘을 모아보자.
‘미안해요, 축빙 형님. 그 약속을 하루도 못 지키게 됐네요.’
어제저녁, 나를 열심히 설득하던 축빙 형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물론 충분히 공감한 내용이었고 지금도 그게 옳은 길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양아치 산드로! 지도 흙내 나게 겜했던 놈이면서 태성과 똑같은 놈이었네!
-똑같은 놈은 무슨! 적어도 태성은 타 길드에 스파이 보냈다가 걸린 적은 없지 않나? 그러니까 훨씬 더 드러운 새끼지!
그 목소리와 더불어 내 눈에는, 밤새 읽은 사람들의 악플 또한 함께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자.’
답답함에 머리라도 식힐 겸 홀로 찾은 사냥터엔, 설상가상으로 이번 일의 원흉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흔히 말하는 현타가 심하게 왔다.
이러려고 내가 조금이라도 강해지려 기를 썼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던 것인가?
이 모든 오해와 비난들이, 일인자가 겪는 당연한 과정 중 하나란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레벨업을 포기하고 바로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금 내려가면 이틀 가까이 되돌아올 수 없는데도.
[지웰 외성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고레벨 지역인데도, 이른 아침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토 대부분이 산악 지역인지라 제법 쌀쌀한 바람이 스치는 마을.
올 때마다 우리 성인 아베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스윽.
공간이동 후 습관처럼 소환하는 훼라리를 부르지 않고 은신 상태로 광장을 나섰다.
이곳을 찾은 건 필드로 나가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혼자 이런 결정을 내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길드 전원이 욕먹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싫네요.’
밤늦게까지 돌아가지 않고 이 일의 대책을 의논했던 동료들.
덕분에 지금 이 시간에 접속한 길드원은 아직 나 하나뿐이었다.
즉, 지금 내가 하려는 건 혼자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벌이는 짓이었다.
만약 동료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때론 가슴이 시키는 일이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마을과 이어진 내성에 도착한 후, 조심스럽게 내성문 옆의 성벽을 타고 올랐다.
그러자 널찍한 내성 광장 너머로 주성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진 필드에서 마주친 놈들만 죽였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거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
다리우스가 그토록 원하는 전면전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탓!
성벽 위 경비병 NPC들 대부분은 8성 은신을 감지하지 못하지만, 몇몇은 특수 몬스터들처럼 모든 투명 상태를 포착할 수 있다.
허나 이젠 공성이라면 도가 틀대로 튼 나.
그놈들의 어그로가 끌리지 않는 동선을 유지하며, 조용히 주성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살금살금.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주성의 메인 홀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이라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 성에는 돌아다니는 유저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웅성웅성.
그렇게 도착한 메인 홀.
여기엔 의외로 백 명이 넘는 유저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대화 중이었다.
모두 성 전용 인던을 드나들기 위해 이곳을 찾은 유저들이었다.
‘역시 규모가 크긴 크구나.’
지웰 성은 아베르 바로 직전에 점령된 최신 성.
바꿔 말하면 필드나 성 전용 인던의 몬스터들이 상당히 고레벨 지역이란 소리였다.
그래서인지, 태성 라인에 속한 많은 길드원들도 이 성을 즐겨 찾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천계엔 올라갈 수 없으니까 반대급부로 이런 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이젠 아무리 자기네 성이라 할지라도, 절대 마음 놓고 머물 수 없게 될 테니까!
“모두 조용!”
“……웠을 거야. 응? 뭐지?”
“누가 성안에서 고함을 질러?”
유저들 한복판을 유유히 지나 성주가 앉는 단상 위로 올라간 후.
나는 천천히 은신을 풀며 큰소리로 주목을 외쳤다.
“먼저 여러분들께는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벌일 일을요.”
“뭐, 뭐야? 산드로야?”
“사칭이냐?”
“이런 미친! 진짜잖아? 설마 혼자 온 거야?”
너무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탓일까?
아니면 내 몸을 감싼 뇌전 줄기의 위압감 때문일까?
앉아있던 태성 라인 유저들은, 내 태연한 모습을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당신들께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들 잘 알고 계시죠? 다리우스와 저, 그리고 태성 라인과 피닉스 라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요. 그러니 오늘부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뭐, 뭘 시작한다는 거냐!”
메인 홀을 울리는 누군가의 외침.
난 그에게 고개를 돌려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랭킹 1위가 되면 하려고 결심했던 일을요. 지금부터 저 산드로는,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전면전에 돌입하겠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두 검을 빼 들며 눈앞 가까이 있는 유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격 강타!]
새롭게 익힌 악마 사냥꾼의 공격 스킬.
공격력을 차징한 뒤 먹이는 이 공격과 뒤이은 연속 베기에, 궁수로 보인 태성 유저는 찍소리도 못 하고 죽어버렸다.
“기, 기습이야! 공격해!”
“정말 혼자 온 거야?”
“몰라! 일단 쳐 쳐!”
분명 공격하기 전에 대놓고 나타났는데도 기습이라니?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반응이었지만 대꾸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이곳엔, 죽여야 할 유저가 산더미처럼 많았으니까.
휙! 휙!
[도봉구검신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상태 이상 ‘넉백’을 회피했습니다.]
[무면허탱커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
집중 회피, 그리고 사냥꾼의 춤.
막대한 민첩 스탯 수치와 어우러진 이 스킬들의 조합으로 인해, 어지간한 물리 공격들은 전부 다 회피가 떠버렸다.
그러는 동안 내 공격은, 휘둘리는 대로 막대한 데미지를 입히며 적들을 하나둘씩 삭제해나갔다.
“마, 마법 공격 좀 먹여 봐!”
“속박의 손길!”
“아이스 터치!”
무려 백 명이 넘는 인원.
당연히 마법사들의 수가 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스무 명 정도.
그 인원이 전부 일시에 CC기 마법을 써왔지만, 적중된 건 고작 빙결 마법 하나에 불과했다.
이유는 ‘새 시대의 희망’ 업적 때문.
레벨 차이로 인한 보정 효과를 늘려주는 이 업적은,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업적 중에서 가장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레벨 지역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300후반 레벨대에 불과할 터.
나와는 레벨이 30 이상 차이 나는 상태인데, 이 업적 효과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법 데미지는 몰라도, CC기와 같이 ‘적중’ 유무로 판결 나는 스킬의 성공률은 극도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타연 최강급 장비들로 무장한 터라, 내 마법 방어력이 낮은 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크악! 이게 뭐야!”
“어떻게든 좀 붙잡아 봐!”
거기다 귀신 발걸음과 그림자 밟기를 번갈아 써가며, 놈들의 타겟팅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이젠 덫 설치를 쓸 필요도 없구나.’
괜히 내가 허세부리듯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연막 덫 없이는 시도도 안 했을 대규모 전투.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해진 지금, 이 정도 숫자를 상대로는 그런 혼전을 유도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고작 유저 한 명한테!”
“그 한 명한테 쫄아서, 천계엔 얼씬도 못 하고 있었잖아요?”
궁수와 마법사 같은 종이 몸들은 스치듯 몇 대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예전과 차원이 달라진 공격력.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지 1분도 채 지나기 전에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고.
채 2분도 되기 전에 이곳엔 열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이 죽거나 도망쳐버렸고, 탱커 몇몇만 남아버린 것이다.
“이익! 하필이면 사람 없는 시간대를 골라서 오다니…… 이 치사한 새끼!”
“그럼 부르세요.”
그래서 서두를 필요 없이, 방금 소리친 탱커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조금 전 내게 질문했던 바로 그 유저였다.
“……뭐라고?”
“부르시라고요. 산드로가 당신네 지웰 성에 와있으니, 함께 잡자고 얼마든지 불러 보세요.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을게요. 뭐,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말했겠지만…….”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너 혼자 여기서 계속 싸우겠다고?”
생각해보면 지금까진 태성과 너무 소극적으로 싸워왔다.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미뤄온 탓에, 천계로 넘어온 유저들 정도만 죽여온 것.
하지만 지금부턴 아니었다.
적극적인 전쟁의 개시.
이제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아닌, 찾아가는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맞습니다. 오늘 이 지웰 성의 주인은…… 태성이 아니라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