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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왕-280화 (280/350)

280화 일인 군단 (1)

“성이 비니까 우리 아베르와 더 비슷해졌네.”

메인 홀은 언제 소란했냐는 듯 유저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처음 전투를 시작할 땐 한두 명씩 귀환 주문서로 넘어오는 유저도 있었는데, 막상 지금은 소식이 전해졌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찰나의 고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지르긴 했지만, 혼자 남겨지자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살짝 업되기까지 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너무 미뤄왔던 건가…… 아니면 지금이 딱 맞는 타이밍이었던 건가.’

신검밖에 없을 때는 뭣도 모른 채 겁 없이 날뛴 적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도록 변해 있었다.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난 점점 많은 것을 얻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은 늘어났으니까.

가진 게 많아질수록 겁도 많아진다.

어느 순간부터 태성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무의식중에 주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되뇌면서.

하지만 신검을 처음 갖게 됐을 때는 어땠지?

혼자서라도 태성을 무너뜨릴 각오로 똘똘 뭉쳐있지 않았던가?

이제는 초심을 되찾을 때였다.

“어서 와라. 누가 오든지 간에…… 혼자서 다 상대해 줄 테니까!”

귀환 주문서를 통해 이 메인 홀로 바로 이동해오는 것은, 이 성을 직접 점령한 길드 소속원만 사용할 수 있다.

허나 방금 죽은 적들이 대부분 태성의 동맹 길드였단 걸 감안해보면, 귀환 주문서로 넘어올 인원은 그리 많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한번에 수천 명이 동시에 나타날 염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론 그만큼 모인 뒤 성문으로 진격해오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지옥불: 드로, 너 지금 어디냐? 설마 천계에서 내려온 건 아니지?)

남는 시간에 속으로 오늘 벌일 작전을 시뮬레이션하는 도중, 갑자기 지옥불 형님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나: 맞아요, 형님. 벌써 들으셨나 보네요.)

(지옥불: 너 미친 거냐? 당장 귀환부터 해라. 혼자 거길 들어가서 뭘 어쩌겠다고!)

(나: 어제 다리우스가 한 짓 보셨잖아요. 제가 거슬리고 꼴 보기 싫은 거면서, 자꾸 저희 길드원들과 주변 사람들만 건드는 걸요. 들으셨겠지만 얼마 전엔 집 앞까지 찾아와서 협박까지 했었습니다. 연우를 가지고요!)

(지옥불: 네 맘은 잘 알겠다. 하지만 다리우스가 그런 놈이란 걸 모르진 않았잖아? 그런다고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여? 충동적으로 욱할 수도 있지만 이건 다른 문제야. 네가 죽기라도 한다면 일이 커져도 너무 커진다고! 그러니 어서 귀환해라!)

쳐들어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소식을 듣고 바로 연락주신 지옥불 형님.

뜬금없이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으니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말투 하나하나에서 나에 대한 걱정과 배려를 넘치도록 읽을 수 있었지만, 이미 난 결심을 내렸고 실행에 옮긴 뒤였다.

이제 와서 뒤로 뺄 수는 없다.

(나: 죄송합니다 형님. 놈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결국 원하는 건 건 저예요. 그러니 제가 전면에 나서야 다른 길드원들을 건들지 않을 거고, 일이 풀려도 풀릴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아무튼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저 한 번만 믿고 지켜봐 주세요.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으니까요.)

(지옥불: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냐?)

(나: 근래 폭업했던 게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요. 아, 다시 또 오고 있네요. 그럼 잠시만 귓말 닫겠습니다!)

(지옥불: 알겠으니까 조심해라. 적당히 하다가 빠지든가 하고!)

마치 부모님처럼 끝까지 잔소리하는 형님.

하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전혀 귀찮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의 막중한 책임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산드로! 남의 성에서 이게 무슨 행패냐!”

벌컥 열린 정문.

주성 광장과 이어지는 거대한 문 너머로 수백 명은 족히 보이는 유저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낯익은 얼굴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태성의 부길마, 동키호테였다.

“행패라뇨? 서로 전쟁 중인 상태면서?”

“그렇다고 언제 우리가 너희 라인의 성에 무단 침입한 적 있느냐? 이건 엄연히 테러이자 꼬장일 뿐이다!”

“말은 똑바로 하시죠?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거겠죠. 이렇게 했다간 바로 뒤져버릴 걸, 스스로도 잘 알 테니까요.”

예상했던 전면 공격 대신, 대화를 먼저 시도하는 동키호테.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유저들 중에 낯익은 아이디는 보이지 않았다.

즉, 지금 여기 온 녀석들 중에는 태성의 정예라 할 만한 랭커는 없었다.

‘진짜 어지간히도 겁쟁이들만 모여 있구나?’

내가 이렇게 나와 줬다면 어느 정도 그에 응해주는 게 도리 아닐까?

아침이라 할지라도 머릿수 빼면 시체인 태성에, 실력자가 동키호테만 접속했을 린 만무.

그토록 원하던 싸움을 해주겠다고 방문해주었더니, 손님맞이가 형편없었다.

정말 혼자 온 것인지.

아니면 무슨 함정이라도 있는 건 아닌 건지…….

또다시 간만 보느라 애꿎은 부하들만 이렇게 무더기로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 기고만장한 모습은 여전하군! 여튼 좋다! 죽는 게 소원이라니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태성의 검들이여! 전원 공격!”

“와아아!”

그리고 이어진 놈들의 진격.

대략적인 수는 5, 6백 명 정도.

그 짧은 시간에 모인 거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동시에 양옆 복도와 귀환 주문서로 합류하는 녀석들 또한 어림잡아 2, 3백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거의 천 대 일에 가까운 싸움.

태성 역사상 한 명을 상대하고자 가장 많은 유저가 모인 전투가, 막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 * *

[라스트챤스: 드로 형님, 그만 하세요. 이 정도면 충분히 보여드렸어요!]

[축복받은무빙: 그래 드로야. 네 맘은 잘 알겠는데, 이런 식의 전투는 너무 위험하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는 게 어떻겠니?]

[연우: 그래요, 오빠. 어젯밤까지만 해도 당분간 참기로 해놓고는 왜 그러세요? 혹시 다리우스가 올린 글 때문에 그러세요? 전 괜찮으니까 제발 이러지 마세요!]

한 차례 또다시 주성 안을 쓸어버리고, 다시 몰려들 유저들을 기다리며 길드 채팅창을 살폈다.

벌써 몇 번의 전투가 이어진 걸까?

첫 전투 소식을 들은 길드원들이 접속한 지도 벌써 세 시간째.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길드원들은 나를 계속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산드로: 얼마나 더 말씀드려야 해요? 다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아셨잖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보다도 훨씬 더 할 만하다니까요?]

[축복받은얼굴: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러려고 길드 만들었어? 혼자 다 짊어질 거면 지금까지 우리와 왜 함께 한 거야? 당장 거기서 안 나와?]

[산드로: 뭘 또 흥분하고 그러냐? 진짜라니까? 레벨 차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이제야 처음 실감하는 중이라고.]

[당근당근단검: 안 되겠어요. 저라도 드로 형 옆으로 가서 도와드릴게요.]

[산드로: 안된다니까! 계속 옮겨 다니는데 니가 오면 오히려 방해만 돼. 그러니깐 절대 오지 마!]

사실 랭킹 1위가 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 진정한 위력을 느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천계에서의 전투야 사냥 중인 태성 놈들을 뒤치기한 거라 제대로 된 싸움이라고 할 수 없었고.

공성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는 터라, 내 강함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즉 오늘에서야말로 나는 진정한 1위, 그것도 압도적인 레벨 차이의 진정한 효과를 처음 체감하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자식…….”

“이게 정말 맞는 거야? 암만 1위라도 게임 밸런스가 이따위여도 되는 거냐고?”

“이젠 그딴 소리 듣는 것도 지겹다! 그럴 시간에 저 자식한테 한 대라도 더 갈겨봐!”

“갈기면 뭐해? 죄다 헛방인데! 씨앙! 이딴 싸움에 시간과 경험치를 허비할 바엔 레벨업이나 하는 게 더 낫겠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몰려든 태성 라인들.

하지만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그들은, 들리는 대화만큼이나 지친 기색도 역력했다.

‘저 사람은 방금 죽였던 사람이고……. 어라? 저 사람은 아까 지웰 성에서 죽인 사람 아닌가? 여기에 또 억지로 끌려 나왔나 보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

그렇다 보니 이미 내게 죽었던 유저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다들 원치도 않는 전투, 억지로 싸우느라 고생 많습니다. 길드의 간부들은 어디 가고 자꾸 님들 같은 분만 찾아오는지 모르겠네요.”

“닥쳐! 애초에 니가 우릴 공격 안 했으면 우리가 고생할 일도 없잖아!”

“그렇게 따지면 태성 라인에 합류한 당신들의 선택이 잘못인 거죠. 태성 길드와 전 이미 반년 전부터 싸우고 있었는걸요?”

“진짜 주옥같네! 그때 한 헛소리가 이렇게 정말 이루어질지 누가 알았다고!”

“그래서 세상엔 뭐든지 해보기 전까지 모른다는 말이 있는 거겠죠? 아무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 태성과의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전투가 힘드시면 탈퇴하세요. 앞으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시고 뒤늦게야 나오진 마시고요.”

캐릭터의 스펙이 퀀텀 점프하는 400레벨.

그 구간을 넘어선 자와 넘지 못한 자의 차이는, 조금 과장하자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헌데 난 절대다수가 400도 넘지 못한 유저들을 상대로 싸우는 426레벨의 듀얼 클래스였다.

항상 레벨이 낮아서 보정 페널티만 받아왔었는데, 지금은 보정 어드밴티지를 받는 입장.

처음 느껴보는 이 어드밴티지는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효과를 자랑했다.

‘이래서 레벨이 깡패란 말이 생긴 거구나.’

몇천, 몇만 단위의 데미지를 입히던 보스 몹들.

그들과 싸우다가 일반 유저들과 전투해보니, 몇백은커녕 몇십 단위 데미지를 넘는 이도 드물었다.

간혹 기절이나 넉백, 슬립 같은 상태 이상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연속으로 걸리는 일은 극히 드물어 별 의미는 없었다.

반면 내 공격력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는데, 보정 효과로 추가 데미지까지 들어갔다.

이런 나를 막으려면 레벨대가 비슷한 랭커급들이 몰려와야 상대가 될 텐데,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

그렇다 보니 레벨 차가 50 이상 나는 유저들은, 아무리 몰려와봤자 내게 초보 지역의 허수아비만도 못한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앙! 저딴 소릴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으으…… 난 그냥 돌아갈래! 다시 달려들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로그 아웃!”

내 말을 들은 유저 한 명이 갑자기 급발진하더니 게임에서 나가버렸다.

성주 전용 의자에 앉아 적들이 더 모이길 기다리던 내게는, 그 모습이 하나의 신호와도 같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구나.’

나라고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행동이 즐거울 리 없었다.

이건 그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었기에 참으며 행할 뿐.

다리우스 한 명이 죽는다고 태성 길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타연에서 태성이 없어질 방법은 오직 하나.

길드원들이 길드를, 서서히 자발적으로 떠나게 만드는 법뿐이었다.

“이 정도면 이번 타임도 모일 만큼 모였죠? 그럼 한 번 더 놀아볼까요?”

“이익! 아, 아직이야!”

“뭐가 아직이에요. 충분히 모였구만. 그럼 갑니다!”

방금 로그아웃한 유저를 타박하던 이에게 다가가자,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바.

나는 그를 시작으로, 양 떼 무리에 뛰쳐 든 늑대처럼 주변의 모든 유저들을 거침없이 썰어버렸다.

“으악!”

“제길! 이 짓을 몇 번이나 더 당해야 하는 거야!”

“길마님은 뭐 하는 거야 대체! 이놈을 계속 이렇게 가만 놔둘 거야?”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지웰 성이 아닌 듀크 성.

처음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난 태성의 모든 성들을 골고루 칠 작정이었다.

홀로 대규모 부대와 싸운다는 점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 무엇이던가?

언제든 자유롭게 치고 빠지고 신출귀몰하게 나타날 수 있는 압도적인 기동력 아니었던가?

동키호테와의 첫 전투에서, 나는 성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근 2백 명 정도를 죽인 뒤 은신으로 도망쳐 나왔다.

처음엔 천 명이었을지 몰라도, 싸우다 보니 끝도 없이 인원이 충원돼서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직후 나는 올림푸스 소유의 로트 성을 쳐서 그곳에서 쉬던 유저들을 죽였고.

뒤따라온 태성 유저들과 싸우다 듀크 성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다시 지웰 등등.

이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이렇게 10분 간격으로 태성 라인 소유의 12개 성을 침입하다 보니, 결국엔 놈들도 지치고 말았다.

각 성마다 천 명 단위급이 지키고 있지 않은 이상, 나의 무작위 방문을 도무지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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