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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왕-281화 (281/350)

281화 일인 군단 (2)

번쩍, 번쩍!

홀 안은 연신 신검의 하얀 빛으로 물들었고.

콰광! 휘리릭!

각종 광역 마법과 상태 이상 기술들의 효과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으나…….

“이건 그냥 자살 행위야…… 자살!”

이내 이곳엔 사기를 잃어버린 병사들만 남겨졌다.

“그래도 몇 시간째 하고 있다 보니 이젠 아까처럼 많이 오시진 않네요.”

두 번째 방문한 듀크 성안은 다시 또 한적해졌다.

다음은 어느 성을 찾아갈까 고민하며 조아린 혼잣말.

한데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대꾸해왔다.

“드로 님. 그런 말씀 하시면 기분이 좀 풀려요?”

“……네?”

“이렇게 학살하듯 다른 유저들 농락하면서, 그렇게 비아냥까지 하고 그러시면 좋냐고요.”

언제부터였을까?

벽면 한구석에는 유명한 유저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의 아이디는 비상구.

내가 저레벨이던 시절부터 몇 차례 인연이 닿았던 궁수였다.

“비아냥으로 들렸나요? 흐음…….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리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제게 욕하는 태성 분들이 많아서, 저도 싸울 때마다 한마디씩 하는 게 습관이 됐거든요.”

그리고 동키호테 이후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태성 라인의 랭커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 통합 랭킹 1위 아닌가요? 그에 걸맞게 행동하시는 게 어떨까요? 언행도요?”

“걸맞게라…….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함께 싸우던 아군을 배신하고 적한테 붙은 분께 들을 소리가 아니란 건 알겠는데요?”

타이탄 연대기의 4강 길드.

전부 동맹 관계는 아니었으나, 태성이란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는 함께 힘을 합치던 관계.

하지만 그 4강 길드 중 피닉스 한 곳만 빼고는, 전부 다 태성 라인에 합류했다.

즉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아틀란티스의 부길마인 그가 내게 지적질할 입장은 아니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습니까? 괜한 평범한 유저들 좀 그만 괴롭히고, 복수하려면 당사자한테 직접 하십시오. 제 길드원과 동료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들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제가 왜요? 그렇겐 못 하겠는데요?”

“네?”

“그렇게는 못 해 드리겠다고요. 길드가 어느 곳이든 간에 태성 라인의 마크를 달고 있는 이상, 타연에 ‘평범한’ 유저는 없습니다. 지금 당신처럼 말이죠. 하하하!”

지난 세 시간 동안.

우리 길드원들은 내가 보든 말든 길드 채팅창에 여러 말들을 해줬다.

주로 혼자 전투 중인 내가 걱정되어 한 이야기들.

그중 축빙 형님이 적은 글이 지금 상황과 겹쳐서 갑자기 생각났다.

-드로야, 그리고 되도록이면 전투 중에 대화는 좀 자제해라! 괜히 적과 대화하다 보면 쓸데없는 감정싸움이나 실수로 이어지기 마련이야.

-아무튼 넌 자주 그러던데... 말대꾸는 금지다! 말 거는 놈들은 죄다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수작 부리는 거라고 간주하고 조심해!

전투에 바빠 대답도 못 해준 글에는 온통 내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난, 지금 이 순간 형님이 왜 그런 말을 적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점잖게 말을 걸어온 비상구.

그가 지금 내게 하는 말은 내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갖고 내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한 짓이란 게 들통났으니까.

‘다 모인 건 오랜만이구나. 너희들…….’

홍길동과 도닥통.

그리고 쿨맨, 쉐도우로드 등등.

억지로 웃는 척 크게 고개를 젖힌 순간,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악연과 배신자들.

오직 도둑으로만 이루어진 홍길동의 암살 부대가 슬그머니 잠입해 있었던 것이었다.

‘하긴 지금쯤이 딱 방심할 만한 타이밍이긴 했지……. 어쩐지 너무 안 온다 싶더라니.’

세 시간에 걸친 캐슬 테러.

한 태성 길드원의 하소연처럼, 이 정도나 설쳤으면 나타날 법도 한데 태성의 유명 유저들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우연히라도 나를 죽이게 되면 신검을 비롯한 여러 아이템들을 먹을 수도 있는 기회.

그러니 시도도 한 번 안 해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 이 순간을 위해 참아왔다고 가정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그간 일반 유저분들에겐 나이스한 면들을 많이 보여주셔서 나름 좋게 봐왔었는데…… 당신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군요.”

“죄송한데요…… 지금 그딴 소리나 듣자고 제가 여기 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 좀 좋게 봐달라고 부탁드린 적도 없고요. 그러니 전투는 말 대신 검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당신도 랭킹 1위가 되더니 변했다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위에 있는 사람을 욕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똑같은 놈으로 변하곤 하죠. 바로 산드로, 당신처럼요!”

타연에는 한 가지 재미난 설정이 있다.

가상현실 ‘게임’다운 편의성과 함께 비현실적인, 오직 투구에만 적용되는 설정.

유저라면 누구나 자신의 투구 착용 모습을 on, off로 표현할 수 있었다.

식별 용이성을 높이고 표정 등을 통해 좀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하는 기능.

이를 통해 대부분은 다리우스나 지옥불 형님처럼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다녔다.

하지만 얼굴을 철저히 가리는 연우, 혹은 예전의 나처럼 복면 등으로 외형 변경한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바꿔두길 잘했다.’

요정왕 세리온의 숭고.

아직까진 타연 최초이자 유일하다고 알려진 디바인 투구.

무려 정신계 공격 마법 저항 면역과 스턴 저항 50%라는 놀라운 옵션 덕분에, 난 어렵게 +4까지 만든 제사장의 머리 장식을 더는 차고 다닐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인던 드랍 템답게 다소 스펙은 떨어지지만, 줄곧 내가 이 투구를 애용해왔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 간파 스킬 보유 시, 마나 소비 없이 활성화 상태 유지

바로 이 옵션 때문.

이 뛰어난 효과 하나 때문에라도 난 이 템을 버릴 수 없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었으니까!

‘자고로 템이란, 없으면 몰라도 많아서 나쁜 일은 없는 법이지.’

두 개의 투구 중 하나도 포기할 수 없던 나는, 나름의 대책을 만들어 냈다.

그건 바로 외형 변경.

최근 나는 요란해 보일 정도로 너무 화려한 디바인 서클릿을 평범한 레어급 서클릿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동시에 제사장의 머리 장식도 같은 외형으로 변경했다.

즉, 두 투구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남몰래 잠깐씩 스위칭해서 바꿔 끼었다.

마나도 아끼면서 굳이 '간파' 스킬을 사용한 걸 들키고 싶지 않을 때마다 말이다.

“제가 변한 건지…… 당신이 변한 건지 모르겠네요. 저야말로 그동안은 좋게 봐왔었는데…….”

“태성 라인에 가입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게임을 하다 보면 동맹이야 바뀔 수도 있는 건데, 제가 뭘 변했다는 겁니까!”

“지금 하는 이런 치졸한 짓. 그래도 이딴 건 하지 않을 사람 같았거든요.”

“……네?”

“태세 전환! 재빠른 몸놀림!”

말을 끊으며 시전하는 자버프.

그에 비상구는 당황해했지만, 난 멈추지 않고 버프를 풀로 시전했다.

“사냥꾼의 춤! 약점 포착!”

“뭡니까? 지금 겁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림자 밟기!”

난 계단을 밟으며 도움닫기를 해, 메인 홀과 연결된 2층 난간으로 높이 점프했다.

그리고 난간 기둥 뒤에 숨어서 이곳을 내려다보던 도닥통에게 그밟으로 다가갔다.

“엇!”

설마 갑자기 공격당할진 꿈에도 몰랐는지, 다급한 비명을 지르는 녀석.

하지만 이미 내 검은 녀석의 몸을 관통한 후였다.

“들켰다! 그냥 전부 공격해!”

그 모습에 놀란 홍길동이 곁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은신 도둑 20여 명이 나와 도닥통을 한꺼번에 뒤덮듯 달려들었다.

“회전 베기! 연속 베기!”

하지만 다 대 일 전투를 나만큼이나 많이 겪어본 유저도 드물 터.

이미 이런 상황에서는 여럿을 공격하려 애쓰는 것보단, 한 놈이라도 철저히 죽여버리는 게 상책이란 걸 너무도 잘 숙지한 상태였다.

[은밀한 일격!]

[일격 강타!]

평타 적중과 동시에 시작된 차징.

수십 개의 공격이 내게 집중되는 이 상황에서 나는 뜬금없이 공격을 멈췄다.

그리곤 곧바로 도닥통을 두 쪽 낼 것만 같은 강한 기세의 베기가 휘둘러졌다.

쉬익!

하나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이없게도 뒤에 있던 다른 도둑이 대신 맞고 말았다.

그림자 밟기?

‘아니야. 이건…… 그림자 걷기닷!’

미묘하지만 땅으로 꺼지듯 사라진 놈의 모습.

이건 분명 도둑의 상위 직업.

암살자가 갖고 있는 새로운 이동기이자 회피기가 분명했다.

“어딜 튀어!”

그새 도닥통은, 400레벨을 넘기고 전직을 마친 뒤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르면 당황했겠지만, 이미 난 진작에 전직한 당당이를 통해 암살자와의 전투 또한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매직 미사일! 귀신 발걸음!”

아무리 이동 속도가 200% 증가하더라도, 순간이동 앞에선 의미가 없다.

단거리 블링크나 다름없는 귀신 발걸음을 사용해 놈의 이동 궤적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먼저 쏜 매직 미사일이 뒤늦게 날아와 놈에게 5번의 짧은 경직을 선사했다.

“크헉!”

그 틈을 노려 몇 대 공격하자, 놈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잿빛 먼지로 화했다.

아무리 적들이 전직에 성공했다 한들, 이미 나 또한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된 것이다.

“요 깜찍한 놈들. 아직도 해산 안 했었어? 진작에 답도 없다고 느꼈을 텐데?”

“너 이 자식…… 설마 치사하게 외변 템을 끼고 있었냐!”

“길동아. 치사한 건 대놓고 너희를 찾아온 나일까, 그런 나를 상대로 미끼까지 던져가며 암습하려던 너희들일까?”

쉬쉭! 쉭! 쉭!

달려드는 도둑들의 공격을 피하며 홍길동의 말에 대꾸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과 차원이 다른 전원 랭커급 이상의 적들.

이들뿐만 아니라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즉각 메인 홀 전 방향에서 온갖 유저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튼 넌 오늘 죽었어! 이렇게 시간 끈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얼씨구? 개뿔이 성공이야? 나야말로 잔챙이들 말고 너희가 좀 와줬음 했는데?”

[비상구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쉐도우로드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쿨맨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

빗발치는 공격.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무효화시키는 압도적인 회피.

사냥꾼의 춤 효과가 끝나자 나는 집중 회피를 연달아 시전했고.

내 몸은 마치 바람이라도 된 것마냥, 적들의 물리 공격을 전부 통과시키듯 피해버렸다.

‘어라?’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희박한 확률을 뚫고 들어오는 유효타와 마법 공격들.

그 사이로 낯익은 효과와 놀라운 데미지에 화들짝 놀랐다.

[낫투두로부터 42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홍길동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필중 효과에 적중되었습니다.]

[머독으로부터 12,755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계속 약한 상대만 상대하다 오랜만에 들어온 다섯 자릿수 데미지.

필중 효과가 적용되어 방어력이 무시된 '트루 데미지'가 들어온 공격.

로브를 벗고 디바인 장비들을 착용한 뒤로, 유저에게서 받아본 것 중에선 단연 최고의 물리 피해량이었다.

“머독!”

“맞습니당, 산드로 님! 드디어 만나게 됐군용!”

그는 베일에 싸여있는 솔플 유저.

그는 내가 유명세를 얻기 한참 전부터 '살신'이라 불렸을 만큼…….

타연 내에서 가장 많은 PK를 기록 중인 유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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