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일인 군단 (3)
“어때용? 제법 솔찬히 아프죵?”
수많은 유저들 중에서도 유달리 돋보이는 존재감.
새빨간 머리에 같은 색의 아이디를 달고 있는 그는, 듣던 대로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휘둘러서 들어오는 공격은 절대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천방좀비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막국수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필중 효과에 적중되었습니다.]
[머독으로부터 8,226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뭐, 뭐야!’
내 뒷걸음질을 쫓아오며 휘두르는 단검 공격.
빠른 공속만큼이나 헛방도 많이 났지만, ‘필중’ 효과가 벌써 두 번이나 발동됐다.
아니, 무엇보다 머독이 휘두르는 공격은 전부 다 내 몸에 적중되고 있었다.
현재 내 회피율은 맥스치인 95%가 발동된 상태인데 말이다.
“설마 홍길동의 장갑?”
“오, 맞아용! 한번에 알아보시네용?”
아주 희박한 확률을 따져보기보다는 다른 가능성을 추측하는 게 더 타당할 법.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손을 살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도적 윌리펑의 전투 장갑>
한때 타연 모든 도둑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던 템.
디바인도 아닌 레전더리 주제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전설의 장갑.
현재는 서버 내에서 유일하게 홍길동만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진 템이었다.
‘홍길동이 머독한테 저걸 줬단 말야? 설마 머독을 끌어들이려고?’
레전더리인데 고작 한 개밖에 없는 까닭.
그건 이 템이 더 이상 드랍되지 않도록 패치됐기 때문이었다.
타연의 유명한 특징 중 하나는, 이미 인게임에서 등장한 템의 스펙 조정을 최소화한다는 점이다.
우연히 오버 스펙이나 밸런싱에 실패한 템이 등장하더라도 무작정 패치하기보단 더 풀리지 않도록 막는 걸 우선시했다.
공식 확인된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진 단테리오의 팔찌가 많이 풀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간에, 내가 전투 시마다 홍길동을 최우선으로 노렸던 것도 이 장갑 때문이었다.
“왜 지금 와서 여기 왔나 했더니…… 태성이 그걸 핑계로 섭외했군요?”
“그것도 정답!”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몰아붙이는 머독이었지만, 사실 그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뒤로 물러선 건 갑자기 줄어든 HP 때문에 현 상황을 살펴보기 위함이었지, 그가 두려워서 그런 게 전혀 아니었으니까.
[재빠른 몸놀림!]
[귀신 발걸음!]
다시금 쿨타임이 돌아온 버프를 쓰고 제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십수 명에 둘러싸였던 한가운데서의 이동.
그 때문에 고작 5.5미터만 움직였는데도 적들은 내 위치를 단번에 찾아내지 못했다.
“커헉!”
“큭!”
오히려 귀신 발걸음 한 번으로 적 다수의 뒤편으로 이동해, 후방 데미지를 입히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
약점 포착 패시브 효과로 인한 후방 데미지는 150%.
가뜩이나 엄청난 내 평타에 이 효과가 더해지게 되면, 한 방 한 방이 어지간한 랭커의 최고 공격 스킬보다도 아팠다.
그러나 역시 적들은 지금껏 상대해온 허접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펑!
두 명을 죽이고 다음 상대에게 걸음을 뗀 순간, 내 발밑에서 뭔가가 터졌다.
[덫을 밟았습니다.]
[상태 이상 ‘기절’에 저항합니다.]
다들 내게 달려드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뒤에서 덫을 설치해 뒀던 것.
순간 최고 회피율 95%에 이르는 내게 상태 이상을 먹이려면, 공격보다는 이렇게 덫을 밟게 하는 편이 오히려 적중률이 더 높을 수 있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현재 나는 회피율만큼이나 상태 이상 저항률 또한 남들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높은 상태였다.
열혈거북이로부터 구매한 +10 불굴의 의지.
그리고 최근 완성시킨 요정왕 세리온의 숭고.
이 두 가지 템을 차고 있는 이상 넉백은 전부, 스턴에는 둘 중 하나 정도는 저항해 버렸던 것이다.
“뭐야! 분명 밟았는데 왜 스턴에 안 걸려!”
“마나 쉴드도 없잖아! 도대체 뭔데!”
쉬쉭! 쉭! 쉭!
나름 비장의 수로 준비한 게 먹히지 않자, 둘러싼 도둑들이 당황해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얼굴 위로 내 룬 페이토나와 샤크 투 메르타스를 나란히 먹여주었다.
“미친! 야, 머독! 뭐 하고 있어! 잡을 수 있다며!”
“간다고요 가용!”
왼편에서 들려온 홍길동과 머독의 목소리.
흘끗 그쪽을 바라보니 머독이 막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휘웅!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뒤편에서 휘둘러진 단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쉐도우로드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비상구로부터 1,02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쿨맨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
예측 무빙으로 피한다고 피했지만, 쏟아지는 공격에 정신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더군다나 적들은 대부분 랭커급이라 지금껏 상대해온 병력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어쩌다 맞춘 데미지도 100이 넘지 않던 유저들이 대다수였는데, 자그마치 네 자릿수 데미지가 들어왔다.
레벨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는 상대들이라 보정 효과가 극감해버린 것이다.
‘일단 길동이만 잡고 뺄까?’
다행히 기습은 먼저 눈치채서 위험한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적의 고레벨들이 작정하고 몰려들면 또 모른다.
아무리 나라도 상대할 수 있는 몸은 하나.
단테리오의 팔찌는 아직 쿨타임이 돌고 있고 실내라 루이투스를 소환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적들이 계속 몰려들다 보면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었다.
“이쯤이면 죽일 만큼 죽였나?”
“뭐라고?”
최대한 머독과의 맞상대는 피하면서 주변을 쓸고 다닌 결과.
전원 랭커급으로 이루어진 암살 부대의 절반인 열 명 가량을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었다.
애초에 도둑은 체력이 많지 않을 뿐더러 방어력 또한 높지 않다.
그러니 치고 빠지는 아웃파이팅(outfighting) 스타일로 싸우는 게 정석인데, 나를 잡자고 오히려 먼저 다가와 줬으니 나로선 죽이기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니까 빠지겠다고!”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친 나는, 곧바로 2층 난간에서 점프해 1층으로 뛰어내렸다.
“튀, 튄다! 놓치지 마!”
이미 몇십 번이나 반복한 성에서의 탈출.
그걸 잘 알고 있는 태성 라인의 유저들은, 내가 전투를 멈추고 도망치려는 것 같자 우루루 뛰어내렸다.
암살 부대 말고도 이미 많이 올라온 상태였기에 뛰어내린 인원만 어림잡아 100명.
일견 장관과도 같은 장면이었으나, 난 거기에 한눈팔지 않고 침착하게 한 대상을 노려봤다.
[그림자 밟기!]
그리고 이어진 순간이동.
다른 놈들은 다 놓쳐도 살려보낼 수 없는 핵심 멤버.
대상은 당연히 제1 타겟, 홍길동이었다.
“은신 못 쓰게 광역도 좀 날려! 그리…… 어?”
“어는 무슨. 급소 공격!”
2층 난간에 남아서 내 동선을 파악하려던 홍길동.
녀석은 빠르게 휘둘러지는 내 공격에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연달아 적중됐다.
“컥! 커헉! 그림자…… 크헉!”
연속해서 터지는 경직 효과.
원래 경직 자체는 가장 뒤떨어지는 물리 상태 이상이지만, 스킬 사용 및 이동을 차단하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 경직이 막대한 데미지와 함께 무려 8번이나 이어졌다.
심지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후방 공격으로!
“뭔 데미지가……!”
4번째 공격마다 180%의 데미지가 들어가는 패시브 스킬, ‘치명 공격’.
덕분에 8번의 공격이 휘둘러지는 8성 급소 공격과는, 환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자랑했다.
다른 누가 중간에서 공격을 끊어주지 않으면 탱커라도 버티기 힘들 공격.
허나 대부분 밑으로 뛰어내린 뒤라 홍길동은 이 공격을 전부 오롯이 맞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넌 볼 때마다 무조건 죽여준댔잖아.”
“이런 씨……!”
결국 도닥통을 비롯한 다른 도둑들처럼, 홍길동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 공격 직전 건네준 말 한마디까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한데 그 순간, 내 발밑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와 나를 공격해왔다.
[머독으로부터 2,886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와따! 진짜 무빙 센스가 장난 아니네용?”
그림자로 변해 순식간에 다가와 공격해온 살신 머독이었다.
“계속 공격해오면 후회하실 텐데요?”
“이미 태성 측 용병으로 온 거 보고도 그 소리예용?”
휘둘러오는 공격, 움직이는 동선.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쓰이고 있는 스킬의 타이밍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머독.
그는 랭커들 중에서도 최상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컨트롤을 보유한 유저라는 걸.
‘일단은 목표 달성했으니까…… 다른 성으로!’
타닷!
그래서 맞서는 대신 2층 난간과 연결된 복도로 뛰쳐나갔다.
하나 이미 복도 또한 적들로 가득 찬 건 매한가지.
난 주저 없이 벽을 박차올라 복도 천장을 거꾸로 달렸다.
그러자 곧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고, 천장을 달리던 탓에 뒤쫓던 그 누구보다 먼저 3층에 올랐다.
아니, 올라서려 몸을 뒤집는데 무언가가 날아와 내 뒤통수에 박혔다.
[머독으로부터 1,177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 공격에 적중당하여 상태 이상 ‘중독’에 빠집니다.]
혹여나 집중 회피로 절대 회피 판정을 받을까 봐 정확히 머리를 맞춘 원거리 공격.
뒤따르던 머독이 날린 테네시 바람 단검이었다.
“당신 땜에 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뎅, 그냥은 못 보내 드리죵!”
얄밉게 들리는 머독의 외침.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요 몇 시간 동안 내가 전투를 벌이다가도 마음껏 성에서 벗어났던 이유.
그건 내게 8성 은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8성이라 간파로는 누구도 찾아낼 수 없을뿐더러, 은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남들만큼 빠른 이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은신 상태로 성의 이 방 저 방을 이동하며 돌아다니면, 아무리 광역 스킬을 난사한다 해도 나를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을 보다가 훼라리로 날아오르면 끝.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독 바르기?’
지금 내게 적중된 공격이 무려 도트 데미지가 들어오는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위 직업 암살자의 고유 스킬 중 하나인 ‘독 바르기’.
최근 당당이도 익힌 이 기술은 자신의 무기에 독 데미지를 추가하는 액티브 스킬이었다.
문제는 이게 10초간 도트 데미지를 입히는 공격이라는 것!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막 은신을 쓰려던 나는 겨우 가까스로 멈추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게 알아챘더라면 은신을 썼을 거고, 그러면 은신은 도트 데미지 때문에 쓰자마자 벗겨졌을 것이다.
“아따! 쫌만 더 늦게 날릴걸!”
“…….”
내가 은신을 쓸 것 같은 타이밍이라 굳이 독까지 바르고 단검을 날렸던 게 분명하다.
고로 그의 발언은 나를 도발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공격인 셈.
실제로 난 그의 손과 입, 두 가지 공격에 처음의 냉정함을 제법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인정하자. 그가 보통 유저가 아니라는 걸.’
혼자서 태성 라인의 유저들을 학살하듯 썰어버려서 방심했다.
또한 나를 노린 비장의 공격, 태성의 암살 부대도 손쉽게 무력화해서 잊고 있었다.
나 또한 강하긴 해도 한낱 ‘유저’라는 사실을…….
회피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서 데미지가 누적되고.
적들이 끝없이 몰려와서 체력과 마나가 다 닳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인정하자. 그래도 난, 여타의 보통 유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게임 속에서만큼은, 죽음이란 늘 나쁜 것만이 아니었다.
죽을 각오를 다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사람도 있기에.
그리고 난 항상 위기가 닥칠수록 침착해지는, 실전에 더 강한 스타일이었다.
꿀꺽꿀꺽!
독 바르기로 인한 중독 상태 이상은 해독 물약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나는 줄어드는 HP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체력 물약을 먹으며 다시 4층으로 올랐고, 10초가 끝나는 순간 은신을 쓰고 인근의 아무 방이나 찾아 들어갔다.
“다들 조용!”
그리고 바로, 방 밖에서 뒤따라온 머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은신한 채로 멈춰있네용. 다들 차례로 방 안에 들어가서 광역 마법 좀 날려봐용!”
타연을 하는 동안 또다시 듣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해본 말.
은신 상태인 유저를 발걸음 소리로 파악한다는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설마 당당이급이었다는 거야? 안 되겠다. 어차피 적이 됐다면…… 더 크기 전에 지금 한 번 잡아야겠다. 암만 위험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