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일인 군단 (4)
게임에서 한 번 죽는다고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길드 간의 하룻밤 필드전에서 수십 번씩 죽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머더러’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단 한 번 죽었는데 재수 없게 무기라도 드랍한다면?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액세서리나 방어구를 여러 피스 드랍한다면?
강하면 강한 유저일수록, 그로 인한 피해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라 자칫하면 게임을 접을 수도 있었다.
“파이어 스톰!”
“여긴 없다! 다음!”
금세 옆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 머독이란 유저를 죽여버릴 수 있을지!
‘당당이를 죽이는 난이도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러면 역시…… 그걸 공개해야 하나?’
전직 직업도 같을뿐더러 추측건대 컨트롤도 비등비등한 존재.
거기다 연이어 터진 ‘필중’ 효과로 미루어보아, 내가 모르는 암살자의 신규 스킬이라도 익힌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이 불리한 상황에서 잡아내려면?
안이하게 도닥통이나 홍길동을 잡던 방식을 써서는, 절대 못 잡는다고 가정하는 게 옳았다.
벌컥!
“아이스 포그!”
“에어 밤!”
마침내 열린 방문.
몰려 들어온 마법사들이 곧바로 방안 곳곳을 향해 광역 마법을 시전했고.
“여기도 없…… 아니, 여기 있다! 이 방이야!”
문 바로 위 천장에 거꾸로 붙어있느라, 은신이 벗겨진 내 모습을 뒤늦게서야 발견하고 소리쳤다.
파파팟!
그러자 순식간에 쏟아진 그림자 밟기 세례.
십수 명은 족히 넘는 도둑이 내 뒤로 넘어와, 내게 검을 휘두르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허나 압도적인 회피 판정으로 인해 데미지 제로에 가까운 허무한 공격들.
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거꾸로 천장을 달려 다시 복도로 나왔다.
지금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 머독.
밖으로 나오자 다른 방에서 소란을 듣고 막 복도로 뛰쳐나온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흥분해서 느려지는 시간 감각.
다시금 활성화되며 생성되는 뇌전 줄기.
나는 이 감각들을 오롯이 느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실로키네 소환.”
휘이잉!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복도엔 태풍과도 같은 세찬 바람이 불었고.
적 한복판인 머독 앞에는 반투명한 하얀 매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원래 크기보다는 훨씬 작아진 3미터쯤 되는 크기.
하지만 훼라리를 능가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현존하는 최강의 소환물이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로키네>
이놈을 디바인 반지에 봉인한 후 얻은 업적들이 적지 않았다.
한데 최근까지도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왕의 스탯보다 내 스탯의 총합이 높아야만 소환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제한 때문.
덕분에 나는 매번 업적을 얻거나 레벨업을 할 때면, 혹시나 하며 이 녀석의 이름부터 외쳐보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424레벨을 달성했을 때.
실로키네는 처음으로 나의 부름에 응답했다.
워낙 막강한 템빨과 업적빨로 스탯이 뻥튀기된 나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평범한 유저였다면 6, 7백 레벨대는 됐어야 가능했을지 모를 성과였다.
“뭐야? 웬 정령왕?”
“폭풍의 언덕에서 뜨는 그 보스 몹?”
“이런 미친! 이걸 어떻게 꼬셨대?”
제자리에서 고고하게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정령왕.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유저들이 곳곳에서 탄성을 질렀지만, 사실 한가롭게 그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정령왕이 누군가의 소환 몹으로 나타나서 신기한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녀석 또한 ‘적’이란 사실은 잊지 말았어야 했으니까.
“토네이도!”
“휘돌아라!”
내 명령에 따라 하얀 매는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현재 내가 오픈한 실로키네의 스킬은 총 2개.
하나는 고레벨 마법사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었던 광역 바람 마법과 비슷한 거대 토네이도였다.
그렇게 마법이 시전됨과 동시에 난, 곧바로 그림자 밟기로 머독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쉬익!
좁은 복도에서 발동된 광역 마법이라 대부분의 유저들이 뒤로 넉백당하는 중이었지만, 내가 휘두른 신검과 채찍은 허공을 갈랐다.
머독이 막 토네이도에 적중되기 직전,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자리를 옮겨버린 것.
마법을 피하면서 나와의 거리도 벌리는, 결코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정확한 스킬 타이밍이었다.
“어라?”
하지만 상대가 나라는 것이 그에게는 불운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홍길동이나 도닥통에게선 볼 순 없겠지만, 당당이라면 당연히 빠져나갔을 터.
그걸 예상하면서 이동기를 사용했던 내 손에는, 진작부터 용살검 대신 군단장의 채찍이 들려져 있었으니까.
[포획!]
나였다면, 혹은 당당이였다면 어디로 피할까?
계속 이런 생각을 했던 터라, 단 0.5초 만에 사라진 머독의 위치를 찾아냈고.
채찍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펼쳐졌다.
“엇! 아이템 스킬!”
그에 휘감겨져 순식간에 내 앞까지 끌려온 머독.
다시 채찍을 용살검으로 스위칭하며 그를 공격하려 들자, 갑자기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조금 전 도닥통이 생존기로 사용했던, 그림자 걷기 특유의 이펙트였다.
“매직 미사일!”
반사적으로 쏘아낸 매직 미사일.
하지만 이번엔 그 뒤를 이어 한 가지가 더 사용됐다.
미처 머독이 예상 못할 공격 패턴을 사용하려고, 큰맘 먹고 정령왕까지 공개한 덕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그 스킬이!
“볼텍스!”
쉐에에엑!
내 명령에 따라 코앞에 나타난 검은 회오리.
실로키네의 두 번째 스킬이자 레이드 유저들에게도 악명 높은 이 마법은, 사물을 넘어뜨리는 토네이도와 반대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형 용권풍(龍卷風)이었다.
“어엇! 이게 뭐예용!”
“본 적 있을 텐데요? 볼텍스라고.”
그림자 걷기로 도망치려 한 머독.
그가 숨은 검은 그림자는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마치 자석처럼 빨아당기는 볼텍스 때문에 제자리만 맴돌았다.
순간의 공방이 여럿 이어졌지만 실제로 흐른 시간은 고작 몇 초.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실로키네의 토네이도는, 계속 넉백을 유도해 어떠한 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었다.
[태세 전환!]
[난도질!]
순간 폭증한 공격력과 미친 듯이 빨라진 공격 속도.
머독이 볼텍스에 빨려든 이상, 굳이 급소 공격을 쓸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경직 따위가 없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
먼저 그림자 밟기를 빼버린 뒤 시작한 콤보라, 그가 내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전무했다.
“잠, 잠깐만용!”
쉭! 쉭! 챙! 쉭! 쉬익!
다급히 소리치는 와중에도, 그는 내 공격을 전부 검으로 막아내며 무기 막기의 발동을 유도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울 텐데도 오히려 그 와중에 공격까 시도하며 반격해왔다.
머독의 이런 모습은 적인 나로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침착한 대처였지만, 사실은 안 하니만 못한 악수(惡手)에 가까웠다.
“앗! 감전?”
나를 공격할시 100% 확률로 발동되는 라이트닝 배리어의 감전 효과 때문.
뭐가 됐건 지금 상황에서 그의 운명이 바뀔 일은 없지만…….
빈틈없었던 그의 플레이가, 막판엔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걸 증명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씹! 내가 죽는다공……!”
뭐가 그리 억울한지 끝까지 중얼대다 사라진 머독.
나는 서둘러 그가 드랍한 아이템을 주워든 뒤, 귀신 발걸음을 사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 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쿨타임이 돌아와 있는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은신!]
내가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천장.
이제 막 사라지는 토네이도 때문에 아직 정신 못 차리는 적들을 두고, 좀 전에 내가 빠져나왔던 방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리곤 창문을 통해 주성 외벽으로 나왔다.
‘성공이다!’
숨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 전투.
전원 랭커급으로 이루어진 터라, 그리고 몰래 저격해온 암살 부대와 특별 손님 머독 때문에…….
하마터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사히 건물 밖까지 나온 이상, 적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분명 눈앞 주성 광장에는 수백 명도 훌쩍 넘어 보이는 태성 측 유저들이 가득했지만…….
이제부턴 타이탄을 소환할 수 있으니 겁낼 것이 전혀 없었다.
‘와, 템 옵션 좀 봐라……. 이러니까 이 장갑이 도둑 템이란 소리를 들었던 거구나? 괜히 다리우스가 아니라 홍길동이 대신 찼던 게 아니었어!’
벽을 타고 유유히 옥상까지 올라온 나는, 잠시 생긴 여유를 틈타 머독이 드랍한 템을 살펴봤다.
머더러 수치가 높을수록 가지고 있는 장비 중에 가장 좋은 템을 드랍할 확률이 높다는…….
흔히 들을 수 있는 타연 속 소문이 정말이었는지, 머독이 드랍한 템은 그가 이번 대가로 받은 장갑이었다.
<+2 대도적 윌리펑의 전투 장갑(레전더리, 장갑)>
* 방어력 80(+16)
* 마법 방어력 50(+10)
* 근력 +30(+6)
* 민첩 +60(+12)
* 공격 속도 +10%(+2%)
* 공격 성공률 +100%
* 덫 설치 스킬 레벨 +2
* 무엇이든 훔칠 수 있었던 대도적 윌리펑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장갑입니다.
* “몰래 잠입하고, 금고를 딴 다음, 훔쳐라. 물론 그 전에 뒤쫓지 못하게 미리 덫을 설치해 둬야겠지. 이처럼 도둑질이란 무척 간단한 일이지. 응? 어렵다고? 나는 쉽던데?” -대도적 윌리펑-
1년 전, 최초가 등장하자마자 차후 일어날 밸런스 문제로 다시는 풀리지 않은 장갑.
그 이유가 이 템에 붙어있는 공격 성공률 100%라는 어이없는 옵션 때문이라는 걸, 타연을 오래 한 도둑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왜 도둑 전용 템으로 불린지 정확히 아는 유저는 드물었는데, 이제서야 그 비밀을 알게 됐다.
이 템의 소유자라면 굳이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가 없었던 옵션.
그건 타연 최초로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템이, 바로 이 장갑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디바인 템만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비록 단일 스킬 한정에 강화 수치가 적용되진 않아도, +2라면 어마어마한 수치지.’
과연 여러모로 나오자마자 긴급 패치로 봉인된 템다웠다.
그리고 이 하나밖에 없는 템이, 이렇게 쉽게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수차례 홍길동을 죽일 땐 구경도 못 했던 템인데, 오늘 처음 만난 머독을 죽이자마자 얻게 되다니?
가끔씩 이렇게, 나의 득템운은 언제 어디서 발동될지 나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축복받은무빙: 드로야? 보고 있니? 괜찮냐고?]
[축복받은얼굴: 인마 너 살아는 있는 거지? 지금 안에 들어가 말아? 대답 좀 해봐!]
그렇게 새로 획득한 템을 살피게 되자, 전투에 바빠 잠시 잊고 있었던 길드 채팅창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모두 내가 함정에 빠진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산드로: 아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투하느라 바빴네요!]
[축복받은얼굴: 야이 자식아!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다들 듀크 성 내성문 앞에 와있으니까 말만 해. 지금 들어가서 도와줘?]
[산드로: 아냐, 됐어. 잠깐 위험할 뻔했는데 오히려 잘됐다. 의도치 않게 대형 떡밥을 던졌던 셈이라, 어쩌다 보니 월척을 낚아버렸거든!]
[무적살라딘: 또또 우리 길마님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제법 여유가 있나 봐? 아직 듀크 성안에 있는 게 맞긴 맞는 거야?]
[산드로: 헤헤! 맞아요 형님. 머독까지 절 죽이겠다고 찾아왔는데... 운 좋게도 놈을 죽이고 윌리펑 장갑을 먹었거든요!]
[당근당근단검: 네? 드로 형, 그게 정말이에요? 제가 아는 그 윌리펑 장갑이요? 아니, 것보다 지금, 머독을 죽이셨다고 했어요?]
[산드로: 엉. 확실히 컨이 남다르긴 하더라. 그래도 뭐 별수 없지. 암만 살신이라도 나한테 덤비면 죽을 수밖에...]
[당근당근단검: 와! 대박대박! 지금껏 한 번도 죽은 적 없다는 그 살신을요? 역시 드로 형, 최고네요!]
당당이는 내가 윌리펑 장갑을 먹었단 사실보다 오히려 머독을 죽였다는 것에 더 놀라는 눈치였다.
하긴 돌이켜보면 그를 잡아낸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스펙과 템 차이가 난다 해도, 그의 컨트롤은 당당이와 동급.
허나 나는 혼자였던 반면 그는 수많은 아군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죽을 확률이 더 높았던 건 되려 나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노림수였다.
다리우스도 그렇고 머독도 그렇고…….
정상급 유저를 죽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그래서 필요한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방심’이었다.
나는 머독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타이밍을 틈타, 처음부터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격 수단을 사용해 공격했다.
내게 볼텍스란 카드가 있는 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절대 함부로 거리를 허용하진 않았을 터.
내 회피 테크를 무력화할 수단을 가진 천적이었지만, 그걸 미처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난, 타연 내 가장 컨트롤이 좋은 유저와의 수 싸움에서 제대로 승리한 셈이었다.
[라스트챤스: 형님! 근데 계속 거기 계실 거예요? 일단 나오신 다음에 대화하죠? 형님 때문에 다들 천계에서 내려왔으니까요.]
[산드로: 뭘 그렇게나... 아무튼 기왕 다들 여기까지 왔다니까 원맨쇼 한 번 보여드릴게요.]
[축복받은무빙: 응? 무슨 원맨쇼?]
[산드로: 놈들한테 아무리 떼거지로 몰려와도, 저한테는 안된다는 걸 각인시켜주려고요.]
나는 잠시 반지 안으로 되돌렸던 정령왕을 재소환하며 은신을 풀었다.
그리고 광장이 보이는 옥상 난간에 선 다음, 실로키네에게 토네이도를 명령했다.
“휘돌아라!”
그러자 광장 한복판에 소환된 토네이도.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못했던 좁은 복도에서와 달리, 거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저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바람기둥은 곧 수백 명의 유저들을 동시에 넉백시켰고.
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광장으로 뛰어내리며 외쳤다.
“루이투스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