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일인 군단 (5)
커다란 마법진.
그리고 벌건 대낮임에도 사방을 환히 밝힌 빛무리.
가볍게 뛰어내렸지만 지상에 발을 디딜 때는, 난 어느새 거대한 강철 기사로 변해있었다.
쿵!
끝난 것 같던 전투의 재개를 알리는 신호음.
그와 함께 난, 이제 루이투스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전진기를 시전했다.
[심판의 전진!]
광역 공격 기술이자 넉백기이기도 한 심판의 전진.
그 거침없는 돌진에, 소환된 토네이도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유저들은 재차 넉백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미친! 타이탄한테 광역 넉백기가 웬 말이야!”
로드급 타이탄.
단순 수치상으로는 솔저급과 서너 배밖에 차이 나지 않는 스펙.
하지만 늘어난 공격력과 방어력, HP 등이 합산되면 사실상 솔저급 10대보다 우월한 게 로드급이었다.
무엇보다 보유한 스킬의 성능 자체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영광의 검!]
파핫!
전방에 흩뿌려지는 반월형(半月形) 검기.
토네이도의 광역 공격을 맞고 있는 한쪽 무리를 향해 공격하자, 한번에 50명 가까이 되는 유저들이 맞아버렸다.
뭉쳐있었기에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크악!”
“누, 누가 좀 막아 봐!”
다 대 일 전투.
그것도 대규모 적들을 상대로 치른 전투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런 적의 반응도 이젠 익숙했다.
이렇게 갑자기 난입하듯 타이탄이 나타나면, 대다수 탱커들은 놀라긴 해도 도망치기보단 공격해온다.
반면 종이 몸이나 다름없는 법사들이나 딜러들은, 공격은커녕 호들갑 떨며 도망치기 바빴다.
죽음 페널티가 제법 쎈 편인 타연이기에 어쩔 수 없는 모습.
판에 박힌 듯 비슷한 모습에도 달라진 하나는, 예전과 달리 맞서 싸우는 대상이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티에스 나이츠>
무려 10초간이나 머무는 토네이도의 범위 안에 있으면, 계속해서 넉백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잠시 일어난 사이를 틈타, 군데군데 껴 있던 타이탄 라이더들이 3기의 타이탄을 소환해 다가왔다.
“그만 멈춰라!”
챙!
타이탄 시스템의 맹점이자 솔저급이라도 타이탄을 갖춰야만 하는 이유.
유저는 절대 막을 수 없는 루이투스의 공격을, 이 3기의 솔저급들은 각자의 무기로 블로킹했다.
스릉!
나는 맞부딪힌 무기를 거칠게 빼버렸고.
곧바로 새로 생긴 비장의 무기를 크게 외쳤다.
“볼텍스!”
하늘에 유유히 떠 있던 하얀 매, 실로키네가 내 지시에 부리를 크게 벌렸다.
휘이이이잉!그러자 총 4기의 타이탄이 엉켜있는 내 바로 앞에, 검은 회오리바람이 생성됐다.
“이게 뭐야?”
“뭐, 뭔데! 움직일 수가 없잖아!”
“정령왕의 마법?”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바람은 타이탄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역시 먹히는구나.’
2레벨 전에 처음 소환했던 실로키네지만, 워낙 빨리 레벨업하느라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특히 타이탄 같은 경우는 고작 실험을 위해 소환하자니 사용할 곳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볼텍스가 타이탄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란 사실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일단 ‘넉백’과 같은 상태 이상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이동 제한’ 효과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실로키네는, 내가 알기론 타연 최초로 등장한 ‘네임드’ 소환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삐이잇-
근엄한 대사도 말하지만, 매 특유의 울음소리도 종종 내는 실로키네.
아직 내 최애 소환물은 여전히 훼라리지만, 그래도 정령왕답게 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같은 필드 보스 출신이긴 해도…… 네임드와 비네임드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사실 비교하기도 뭐한 게, 레드 드레이크는 내 레벨이 높지 않은 시절에도 혼자 잡을 수 있던 몬스터였다.
하지만 정령왕은 일 년 전만 해도 수백 명은 참전해야 잡을 수 있었던 공격대용 레이드 보스 몹.
쉽게 말해 같은 타이탄이라도 솔저급과 로드급이 극명하게 차이 나듯, 훼라리와 실로키네 또한 보유 스킬의 수준만 해도 넘사벽이었다.
“토네이도!”
나는 발이 묶인 타이탄들을 뒤로한 채, 다시 일반 유저들이 몰려있는 곳에 다시 또 토네이도를 소환했다.
바람의 ‘지배자’답게, 정령왕의 바람 마법은 쿨타임이 무척이나 짧았다.
그러니 페널티라곤 오로지 막대한 마나 소모량뿐!하지만 아무리 테크트리를 바꿨다 할지라도, 지금껏 내가 먹어온 드래곤 하트와 온갖 업적들의 효과로 나의 마나량은 타연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미친 소모량이긴 하지만…….’
효과가 좋은 만큼 마법 하나 사용하는 데 드는 MP만도 무려 2만!
바꿔 말하면 나나 되니까 지금 이런 식의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었다.
“크아악!”
“아니, 도대체 도둑이 이런 마법을 어떻게 쓰는 건데!”
“애초에 타이탄을 탄 상태에서 마법을 쓰는 건 또 어떻고!”
사실 나도 루이투스에 탄 상태에선 스킬을 사용하진 못한다.
하지만 소환물에게 지시하는 건 다른 문제.
그간 루이투스로 혼자 활약하기 힘든 면이 없잖아 있었는데, 함께 싸우기에 더없이 좋은 전투 파트너가 생겨버린 셈이었다.
“으악! 또 넉백이야!”
“공격 범위에서 좀 벗어나 봐!”
누구에게나 공평한 마법 데미지와 넉백 효과.
그나마 마나 쉴드를 쓴 몇몇 마법사들이 넘어지지 않고 마법을 날려댔고.
그 외에 넓디 넓은 토네이도의 사정거리 밖에서 날아온 몇몇 원거리 공격들도 있었지만…….
98만이나 되는 HP를 가진 채 광휘의 방패까지 두른 루이투스에게는 흠집 정도의 데미지밖에 입히지 못했다.
[영광의 검!]
평타 캔슬과 함께 시전된 광역 공격.
아무리 적들의 레벨이 상향 평준화되었다 한들, 여전히 로드급 타이탄의 공격력과 스킬은 매서웠다.
특히나 종이 몸이나 다름없는 방어력이 약한 유저들에겐 더더욱!
[축복받은얼굴: 캬.... 진짜 제대로 미쳐 날뛰고 있구나. 레벤다스로는 흉내도 못 낼 것 같은데?]
[대탐험시대: 그러니까요.... 저희 길마 형님 필드전을 이렇게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데.... 진짜 답도 없네요. 저걸 누가 상대하겠어요?]
[축복받은무빙: 그야말로 법사와 힐러들한테는 악몽 그 자체구나! 탱커는 내버려 두고 철저하게 로브들만 잡는 거 봐. 내가 저 안에 있었다면.... 어휴! 지독하다 지독해!]
조금 전까지 날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멀리 안전지대 상공에서 지켜보고 있는 길드원들은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나조차도 이 정도 활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놀라는 중이었다.
‘도망치려다 그냥 덤벼본 건데…… 이게 먹히네? 어쨌거나 이제 마지막 한 방이닷!’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과신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설칠 수 있는 건, 나나 타이탄이 강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오로지 ‘실로키네’라는 소환물이 가진 오버 밸런스급 스킬 덕분이었다.
추측건대 원래라면 지금 레벨대에서는 유저가 절대 사용할 수 없었을 마법들.
지속 넉백을 유도하는 실로키네의 토네이도나 볼텍스는, 내 루이투스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휘돌아라!”
그리고 마지막 토네이도가 다시 또 시전됐다.
직경 30미터는 넘을 듯한 어마어마한 바람기둥.
텔로라의 가호로 MP가 50% 늘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연달아 3번이나 쓰지 못했을 마법이었다.
“우리 편 타이탄은 대체 뭘 하고 있…… 크헉!”
“잘난 랭커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못 막는 거야, 아니면 사리는 거야!”
대꾸라도 해주고 싶은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지만, 그럴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데 집중했다.
살다 보면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와닿을 때가 있다.
아무리 내가 몇 시간째 캐슬 테러를 자행했더라도, 지금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방금 죽인 머독만 하더라도, 혼자서 백 명 넘게 죽인 기록을 가진 유저였으니까.
하지만 적들 눈에 비친 지금 내 모습은?
비상구가 시간을 끄는 동안 작정하고 모인 병력들.
그들은 결코 지금까지 내가 죽여왔던 평범한 유저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랭커급 이상의 정예 병력이라 할 만한 태성의 고수들.
심지어 군데군데 랭커도 껴 있는 수백 명이, 내가 학살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력감.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얼마나 큰 상심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게 된다면…… 파장은 더욱 커지겠지!’
앞으로 태성 라인이 조금씩 와해되어 나갈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싶었다.
휘잉.
잦아들던 토네이도의 바람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리고 난 거의 동시에 쿨타임이 전부 채워진 전진기를 확인했다.
이 스킬의 쿨타임은 30초.
그동안 짧게 난장판을 벌인 것만으로도 적어도 백 명은 족히 죽여버렸다.
전부 힐링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무한 넉백과 마법 공격 속에서, 종이 몸들만 골라 죽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심판의 전진!]
이제 해야 할 것도, 보여줄 것도 다 보여주었기에 남은 건 하나뿐.
굳이 타이탄의 체력을 0%로 만들어 소환 쿨타임을 늘릴 필요 없이, 내성문을 향해 최대 이동 거리인 50미터를 쭈욱 내달렸다.
“튄, 튄다!”
“잡아! 쓸 거 다 써서 가두면 끝이야!”
“저걸 뭔 수로 잡냐!”
그리곤 성문 앞에서 램보를 소환해 갈아타고는 곧바로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몰려든 이들이 허무할 정도로 너무도 간단히 이루어진 탈출이었다.
“그럼…… 다음 성에서 봅시다.”
스윽.
나는 금세 안전지대인 외성 마을 외곽에 도착해서는, 나를 잡기 위해 몰려든 태성 라인의 유저들을 향해 한 마디하고 은신을 썼다.
[라스트챤스: 찢었다... 우리 형님께서 태성을 제대로 찢어버리셨다!]
[축복받은얼굴: 와... 드로 자식... 이 게임 진짜 혼자 다 해먹고 있네...]
[축복받은파볼: 그러게 말야~ 뭐 위험에도 빠지고 해야 우리가 구해주는 맛이라도 있는데 괜히 왔나~ 근데 정말 멋지긴 멋지더라!]
[산드로: 하하! 잘들 보셨죠? 여러분의 길마가 이 정도랍니다!]
여전히 하늘 위, 각자의 페가수스에 올라탄 채 여운을 즐기고 있는 길드원들.
입장 제한이 있는 천계에서 굳이 내려올 필요가 없었건만, 내가 위험에 빠진 것 같자 단걸음에 전부 몰려와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미소 지었다.
혼자도 괜찮았지만…….
역시 이들이 함께라서 더욱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 * *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전투를 치렀지만.
나의 캐슬 테러는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사냥터 통제는 들어봤어도, 이런 식으로 본인들 점령 성이 ‘통제’당하는 건 처음 겪는 일일 터.
당황하던 놈들은 회심의 반격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엔 성을 비우는 걸 선택했다.
12개나 되는 성 중 어느 곳이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니, 도저히 대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악의에 찬 규격 외 유저 한 명의 존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솔플 PK에, 온종일 태성 라인의 유저분들은 정말이지 막심한 피해를 받았습니다.』
『양민아 앵커, 피해라는 말은 어폐가 있겠군요. 뭐니 뭐니 해도 서로 전쟁 중인 상태이니까요. 그저 새로 등장한 방식의 필드전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요?』
『그래도 상대의 성안에 잠입해서 PK하는 건, 서로 간에 피해야 할 불문율 같은 게 아니었나요? 아무리 그래도 집까지 털면 어떡하냐고 비난하는 유저분들도 많이 계시던데요……?』
『그런 불문율이 존재했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군요. 편들려는 건 아니지만, 적의 성안에 침입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즉 불문율 때문이 아니라, 굳이 죽음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서 볼 수 없었던 플레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군요.』
본격적으로 결사전을 작정했기에 하루 이틀만 하고 끝낼 게 아니었다.
조금씩 시들해지던 적의 반응이 마침내 포기로 바뀌자, 결국 나는 로그아웃한 뒤 TV를 켰다.
그러자 마침 타이토닉의 저녁 방송에서는 나의 참전으로 인한 후폭풍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파죽지세인 산드로 님의 행보는 나날이 예측하기 힘들어졌는데요. 이런 산드로 님을 막아설 수 있는 유저가 과연 타연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현재 2위인 다리우스 님과의 레벨 차이도 무려 11레벨이나 나는 상태죠? 지금껏 타연에서 통합 랭킹 1, 2위의 격차가 두 자리 이상 벌어진 적이 없었는데, 정말 타연 역사에 독보적인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게다가 오늘 전투에서 새로운 소환몹으로 정령왕까지 획득하신 게 밝혀졌는데…… 사실이라면 이제 산드로 님은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겠군요.』
『네? 김석용 아나운서 님. 산드로 님이 어떻다는 말씀이신 거죠?』
『아무리 강해도 타연이라는 게임에선 불가능할 것 같던 존재. 혼자서도 수백, 수천 명과도 맞설 수 있는…… ‘일인 군단’과도 같은 유저가 됐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