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저력 (1)
“이야, 뭐야? 김석용 아저씨, 저분 네 팬이었냐?”
“그런 거 아냐.”
“뭐가 아니야? 단독 인터뷰도 여러 번 하고, 따로 몇 번 만나고 했지? 그래서 그런지 완전 네 신봉자신데? 아주 내 얼굴이 다 화끈할 정도다, 인마.”
“아…… 저 아재 갑자기 왜 저러시지…….”
일인 군단이라니.
함께 TV를 보던 현중이와 축빙 형님을 못 쳐다볼 정도로, 칭찬이 너무 과했다.
“하하! 그 냉철한 석용 아저씨도 지환이한테는 애정이 생겼나 보다. 하긴, 첫 등장 때부터 꾸준히 지켜봐 오셨으니 감회가 남다르긴 하시겠지. 나도 다신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오늘 지환이 플레이 보면서 또 놀랐잖아.”
“네? 이놈이 왜요? 늘 해왔던 거랑 비슷하지 않았어요?”
“현중이 너도 그만 좀 솔직해져라. 허접들 쓸던 거랑 랭커급들 쓴 거랑 같냐? 아까 지환이 없을 땐 그렇게 감탄하더니, 왜 얘 앞에서는 그렇게 못 깎아내려서 안달이냐? 템빨, 타이탄빨, 소환물빨 등등…… 전부 대단하긴 했는데, 역시 최고는 그거긴 하더라.”
“……네?”
“레벨빨. 역시 이 게임은 레벨이 깡패란 소리가 맞다는 걸 지환이 덕에 또 한 번 실감했다. 우리가 요 몇 주간 천계에서 특훈이라도 하듯 사냥만 했던 게,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
계속된 축빙 형님의 말씀.
직접 전투를 치른 나의 소감과 정확히 일치했다.
“늘 보정으로 손해만 받다가 반대가 되니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아니,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엄청날 줄은 처음 알았어요.”
“어쭈?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다, 이 소리냐?”
“그 정도가 아냐. 칼이나 마법이 안 박히는 걸 떠나서, 데미지 자체도 엄청 약하게 들어온다니까?”
사실 저레벨 구간에서도 4, 50 정도의 레벨 차이가 어느 수준인지는 얼마든지 체감해 볼 수 있다.
하나 그건 아직 각자의 장비나 스킬 및 테크트리 등이 제대로 완성되기 전인 상황.
반면 고레벨, 특히 랭커급 이상쯤 되면 다들 각자의 캐릭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추게 된다.
그런 그들로부터 레벨 보정 효과를 제대로 느껴볼 만큼 레벨이 높았던 유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리우스나 카이저 형님 정도에 불과했고.
잘 알려진 것처럼 그 둘은, PK나 필드전 등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즉, 랭킹 1위의 레벨 보정 효과를 온전히 누려본 최초의 유저는, 바로 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 전투를 되새겨보는 지금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났다.
‘이제 정말 제대로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죽기 전까진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전쟁을 그만두는 순간은 오직 둘. 다리우스가 타연을 접거나 태성 길드가 해체되거나. 이것 외엔 없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방송은 이어지고 있었다.
『산드로 님의 갑작스러웠던 기습은 본인 길드원과 연관된 구설수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양민아 앵커, 떠도는 소문이 정말 사실로 밝혀졌습니까?』
『태성 측 주장만으로는 판단이 힘들어 당사자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확인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산드로 님의 돌발 행동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정면돌파라고 생각되는 데요. 소문으로 돌고 있는 스파이 같은 것 없이도, 혼자서도 태성과 충분히 전쟁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증명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워낙 라인 간의 다툼이 심하다 보니 생긴 일종의 해프닝 같기도 하군요. 설령 태성 측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자유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타연에서는 용인될 법한 플레이 방식이고요.』
『그렇긴 하지만, 사실로 밝혀진다면 아무래도 도의적인 비난까지는 피하실 순 없겠죠?』
『그렇겠죠. 원래 길드 마스터라는 자리는 본인은 물론, 길드원의 잘못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자리니까요.』
“확실히 네 팬이 맞으시네. 끝까지 좋은 말씀만 해주시잖아. 안티들은 네가 연우를 사주했던 거 아니냐고 의심하던데 선을 딱 그어주시는 걸 보니.”
“그러게……. 조만간 단독 인터뷰라도 한 번 더 해드려야겠다.”
“이열.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톱스타 같은데?”
“스타는 무슨. 아무리 태성 측 유저라곤 해도, 앞으로 몇천 명을 죽이게 될지 모르는데, 나도 언론 플레이 좀 해야지.”
천계 통제는 태성 라인만 했기에 후폭풍이 덜했지만, 신의 가호로 인해 일반 유저들의 불만이 상당히 높아진 상태.
이제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가 유저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도 중요한 관건이었다.
경우에 따라 혼자 거대 세력과 맞서는 영웅처럼 보일 수도.
혹은 지 잘난 맛에 멋대로 난장이나 피우는 망나니 꼬장 유저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혼돈의 정국으로 향하는 타연 속 정세. 과연 피닉스 라인의 히어로인 산드로 님의 참전으로 필드전은 반전될 것인지? 혹은 이대로 태성 라인은 피닉스 라인의 게릴라성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것인지? 매일매일, 내일이 기대되는 하루가 이어지는 타연이 되겠습니다!』
여튼 간에 타이토닉의 오늘 방송은 이렇게 끝이 났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맺음말이었다.
“오늘은 이런 기습을 처음 당해서 그런지 잘 먹히긴 했는데…… 내일은 좀 다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왜? 막상 저지르긴 했는데 이제 좀 걱정되니, 지환아?”
“네? 설마요? 다 보셨잖아요. 태성 놈들은 몇십 트럭이 와도 저한테 안 된다는 걸요.”
“후훗. 알겠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라. 내일부터는 우리도 함께해줄 테니까.”
“어허! 정말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기왕 천계에서도 내려왔으니까, 우리도 힘 좀 보태볼게. 네가 성을 치는 동안, 우리는 피닉스가 싸우고 있는 필드 위주로 돌아다니면서 말야.”
원래 ‘필드전’이란 단어 뜻 그대로를 행하겠다는 형님.
사실 그동안 전원 고위 사제, 원소 마법사 등등으로 전직을 마치며 많은 스펙업을 했고.
나와 함께하는 동안 다수의 상위 업적 및 최상급 장비, 타이탄 등을 갖추게 된 상태였다.
이런 길드원들이 뭉쳐 다니면 나라도 버거울 수준.
내가 걱정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어느새 타연 톱 수준의 전력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믿기로 했다.
내가 길드를 창설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바로 랭커들로만 이루어진 소수 정예 팀, ‘버닝스타’의 제대로 된 필드전을!
* * *
“그만 작작 좀 하세요! 우리가 뭔 죄라고!”
“그건 죄송합니다. 어서 빨리 탈퇴하시기를!”
다시 시작된 하루.
평소라면 접속하자마자 사냥터로 향했겠지만, 이제는 은신을 쓰고 태성 측 성부터 잠입했다.
그리곤 성안 곳곳을 뒤지며 전용 인던에 들어가려고 대기 중인 유저들을 찾아내 죽였다.
“이런 개자식! 결국 너도 좋게 끝나진 않을 거다!”
“아, 네. 알겠습니다.”
하도 들어 이제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욕지거리들.
나는 영혼 없이 대꾸하면서, 속으로는 어젯밤 연우와 나눈 대화를 되뇌고 있었다.
-오빠, 괜히 저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너 때문이라서가 아니야. 계속 나 대신 우리 길드원을 건드는 놈한테 화가 나서 그런 거지.
-오빠를 알기도 전부터 태성에 들어가 있었던 건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걸 보니 답답해 죽겠어요. 그냥 제가 나서서 말 좀 하면 안 돼요?
-안 돼, 절대 안 돼. 가뜩이나 지금도 위험한 상황인데 왜 굳이 나서려고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 어차피 내가 시작한 싸움이야. 결국 다리우스가 게임 접으면 모든 게 끝날 일이니까,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우리가 아니라 오빠만 혼자 고생하시잖아요.
-아무튼 넌 단독 행동은 절대 금지야. 알겠지?
-네에…….
막 TV를 끄고 자려던 참에 집으로 찾아온 연우.
온종일 캐슬 테러를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해 보여, 다른 길드원과 달리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이러는 게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내가 이렇게 설치지 않았다면, 연우가 다리우스의 타겟이 되고 지금 이렇게 욕 얻어먹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크아악!”
털썩.
메인 홀에 남아있던 마지막 탱커가 결국 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곤 바로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지금 내가 캐슬 테러를 자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본인들 아지트에서도 편하게 쉬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사기를 꺾기 위해서.
나머지 하나는 성마다 가지고 있는 전용 인던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태성 측 병력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필드전을 벌이는 길드라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인던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한지 모를 수 없다.
하물며 태성 라인은 천계나 시공의 틈새, 생명의 숲 같은 고레벨 사냥터에 제대로 접근도 못 하는 상황.
그렇다면 고레벨들이 사냥할 수 있는 장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수밖에 없는데, 성 전용 인던을 별로 이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수백 명은 죽였지만, 랭커급이라 할 만한 정예는 구경도 못 해 본 것이다.
특히 내 직접적인 원수라고 볼 수 있는, 다리우스 패거리는 홍길동을 제외하곤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타격을 주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역시 그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으려나?’
적 한복판이지만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메인 홀.
이 고요함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설치는 나를 가만히 놔둔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덤벼 본 건 어제 듀크 성 한 번이 다였는데, 그걸로 끝이었다고?
천운이라도 따라서 만약 날 죽이게 되면, 확정적으로 디바인 템을 얻을 수 있는데도?
다리우스가 나와 너무도 다른 성향이란 건 잘 알지만,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일부러 먹잇감처럼 드러내 준 건데, 도무지 물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나: 잠시 좀 만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에게 연락했다.
(제독: 그럴까? 왠지 내일쯤이면 찾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단 조금 일렀군.)
아군이었다가 적이 되고, 어쩌다 보니 다시 같은 편 비스름한 사이가 돼버린 그에게.
* * *
“온통 니 얘기로 난리더구나. 역시 산드로.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답구나.”
“그렇게 친한 척 굴지는 마시죠? 피차 서로를 좋게 생각해서 만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어? 그래? 난 이미 성을 내줄 때부터 마음을 고쳐먹은 지 오래인데? 너도 조금은 그럴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몰래 숨어든 여관방.
간만에 다시 만난 그는 마치 예전 내가 형님 대우를 해줄 때처럼 스스럼없이 굴었다.
하지만 이미 그와 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오래.
그저 그와 약속했던 비즈니스적인 이유로, 물어볼 게 있어 만난 것이기에 본론부터 꺼냈다.
“아시죠? 지금 왜 다리우스와 그 패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요.”
“물론 알지. 워낙 극비라서 아마 동맹 중엔 나만 알고 있는 정보겠지만.”
“역시……. 그럼 어디에 있죠? 신규 인던? 아니면 설마 마계 쪽인가요?”
“호오? 역시 넌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반응을 보니 역시 마계인가 보네요.”
천계만 하더라도 48시간이라는 입장 제한이 있다.
이렇게나 여러 사냥터에서 코빼기도 볼 수 없으면서, 패거리 중 단 한 명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
그렇다면 어쩌면, 천계와 비슷하게 어떤 제한이 있는 필드에 들어가 있는 건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뜩 들었다.
“참, 어쩌다 보니 이렇게 태성 라인에 속하게 됐지만……. 정말 다리우스는 보면 볼수록 형편없는 놈이다.”
“네? 갑자기 무슨?”
한데 뜬금없이 다른 얘기를 꺼내는 제독.
어차피 결국엔 원하는 대답을 해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가만히 경청해주었다.
“산드로 넌, 그 자식이 400레벨을 달성하고도 지금껏 전직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아느냐?”
“……아니요?”
“조금도 실패하기 싫어서였다. 자신이 먼저 전직해서 시행착오를 겪기보단 부하가 전직하는 걸 보고 선택하려던 거지. 믿어지나? 그딴 새끼가 타연 속 랭킹 1위를 계속 지켜왔었다는 게?”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놈이네요.”
어이없는 제독의 말.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왜 그가 지금 은근히 분노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놈은 400렙을 달성한 내게도 강요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수호 기사로 전직해 보라고. 그리곤 자신에게 그 정보들을 바치라고.”
“네? 정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