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저력 (2)
‘왜 전직을 안 하고 있나 싶었는데…… 이딴 이유 탓이었구나?’
정말 그 자식답게 소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말 신중한 플레이를 한다고 칭찬이라도 하는 게 맞는 건지.
내가 싸우고 있는 사람이 어떤 놈인지 다시금 실감 났다.
이렇듯 조금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밉고 거슬렸을까?
“내가 원했던 건 ‘돌격 기사’. 한데 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호 기사’를 선택했다. 그러니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어쨌거나 본인이 선택한 라인 생활이잖아요? 애초에 그런 놈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싫어도 악으로 깡으로 버티셨어야죠.’
이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지는 못했다.
아주 몹쓸 사람은 아닌 듯싶지만, 배신에 배신을 거듭 중인 이 사람은 특히 조심히 상대해야 할 유형이었으니까.
“그따위 개자식이니까 제가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싸워왔던 거죠. 아무튼 기분이 많이 상하셨겠네요.”
“아무리 400레벨 기사가 흔하지 않고 전직이 급했더라도……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래 봬도 난…… 대올림푸스의 수장이지 놈의 꼬봉 따위가 아닌데?”
길드 마스터란 자리의 책임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던 제독.
그만큼 길마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 그의 긍지를 짓밟는 짓을 하다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제독이 다시 내게 손을 내민 배경도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원래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잖아요. 전직은 제루티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건데…… 아쉽게 됐네요.”
어쨌든 그가 지금 원하는 건 공감.
계속해서 원하는 욕을 실컷 해주고 나니, 결국 내가 원하던 정보를 스스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의심병이 많은 새끼니까, 라인이랍시고 초거대 동맹 집단을 만들어놓고도 지 식구만 챙기고 있었지. 그래도 놈이 가진 세력과 정보망은 진짜인지, 천계가 막히자 바로 다른 루트를 찾아냈더군.”
“그게 마계였다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마계는 아닌 듯싶다. 마계였다면 진작 전체 알림에 떴겠지. 나도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그쪽과 연관된 신규 필드로 알고 있다. 어쩌면 다리우스도 네 덕분에 그 필드를 발견한 것일지도…….”
“네? 제가요?”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장소는, 내가 익히도 잘 아는 곳이었다.
“정보를 알려준 유저가 너와 아는 사이라고 들었거든.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만 어떤 필드인지는 대충 들었다. 수중왕국이라더군!”
* * *
‘이런 식의 전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캐슬 테러를 멈출 생각은 없지만, 다리우스 패거리의 동선 파악은 필수.
때문에 지금 제독을 만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리우스에게 수중왕국과 관련된 주요 정보를 건넸다고 들었다. 직업도 신규 직업 1위인 탓에, 이례적으로 1군 정예로 바로 스카웃 됐다고…….
제독이 말하고 있는 유저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간 어떻게 태성에 들어갈 계획인지 알려주지는 않았는데, 뜬금없이 이 카드를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 혹시 내가 너무 일찍 알아차리면 본인이 의심받을 수도 있을까 봐?’
그는 바로 히든캬드.
지금은 한계돌파라는 아이디의 인챈터로 다시 태어난 복수자였다.
“오래 기다렸니?”
“아니요, 형님. 잠시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괜찮았습니다.”
“어제오늘 무척 바쁘게 뛰어다니던데, 어쩐 일이냐? 이렇게 직접 대화하려고 찾아온 걸 보니 중요한 건가 보지?”
그래서 난 바로 지옥불 형님을 찾아왔다.
당장 벨루타에 가보기에 앞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의논하기 위해.
“……그렇게 한동안 저와 함께 벨루타 바다 한복판에서 심해 머맨들을 사냥했었거든요. 그때 알게 된 정보로 딜을 한 것 같아요. 만약 다리우스에게 저희 측이 몰랐던 어떤 정보가 있었다면, 바로 수중왕국에 들어가게 됐어도 이상할 게 없죠.”
“흐음. 요즘 뭘 하고 있나 싶었는데…… 결국 예상대로 내부 잠입을 시도했구나. 하긴 녀석 성격이라면 오래지 않아 시도할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우리가 페어리 퀸의 공중정원을 찾아내거나, 황실 창고를 공략했던 것처럼…….
타연 속 신규 인던이나 지역 오픈의 실마리는 아주 작고 의외의 곳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신규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여러 잡다한 정보를 보유한 세력에게는 특급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심해 머맨들은 바다 한복판에 일정 수심 이하로 들어가야지만 나타나서, 찾아내기 무척 힘든 곳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장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고 찾아뵀어요. 지금 저와 길드원들이 그곳을 뒤지게 되면, 히캬 님이 애써 길드에 잠입한 게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우려돼서요.”
“아하? 그러니까 히캬가 우리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애써 들어갔는데…… 갑자기 네가 바로 그곳을 찾아내면 의심받을 것 같다는 거지?”
“네. 정확합니다.”
“하핫! 천하의 산드로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게임하면 어떡하지? 그런 문제라면 아무 걱정 마라. 이 형이 다 해결해 주마.”
“네?”
“벨루타 해안가라면 며칠 전에도 우리가 한참 필드전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발견한 것으로 해주마. 그럼 인원도 얼마 없는 너희 버닝 스타가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 되겠지?”
지옥불 형님이 워낙 간단하게 말씀하셨지만, 이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연락 방법이 없는 히든캬드에게 미리 안내만 해주려던 거였는데, 형님의 말씀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형님. 그 정도까지 원한 건 아닌데요……. 수중왕국이 오픈된 게 사실이라면, 상당한 장기전이 될 겁니다.”
“너와 네 동료들이 지금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있는지 아는데, 우리는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란 거냐? 매번 걸어오는 싸움만 받아주는 것도 질렸다. 이번 한 번 정도는…… 우리가 먼저 놈들을 쳐보마. 우리 측 인원도 이제는 많이 늘어났으니까.”
바다로 향하는 통로, 벨루타 해안가.
그곳을 두고, 피닉스와 태성 길드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전면전을 벌이게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 * *
“으악! 여기 또 왔어요? 아침에도 왔었잖아요!”
“죄송합니다!”
쉬쉭- 털썩!
내가 봐도 난 지독한 놈 같다.
다시 찾아온 성에 태성 라인의 유저가 없자, 은신 상태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다 한 파티가 몰래 들어오자, 막 인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전멸시킨 것이다.
나란 한 유저가 이 큰 성을 텅 비게 만든 게 뿌듯하고 대단하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지금 내 머릿속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쯤이면 소식이 들릴 때가 됐는데…….’
지옥불 형님을 만나고 온 지도 벌써 3시간여.
곧바로 벨루타로 향하지 않고, 하던 캐슬 테러를 계속 진행했다.
-벨루타 해안가에서 필드전을 벌이다가 페가수스로 우연히 네가 말한 지점을 발견한 척 진행해보마.
어차피 심해 머맨이라는 그 많은 몹들을 뚫고 몰래 바닷속 깊숙이 잠입하는 건 힘든 일.
그럴 바엔 차라리 지옥불 형님의 말처럼 대놓고 공론화한 다음, 수백, 수천 명이 모여 한꺼번에 쳐들어가는 편이 더 안전했다.
가끔 위험한 행동도 주저하지 않는 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절대 죽어선 안 된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감함과 무모함의 차이를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상황이 무르익길 기다리며 하던 PK만 계속하고 있었다.
[대탐험시대: 드로 형님! 소식 들으셨어요? 태성과 필드전을 벌이던 피닉스가 신규 필드를 발견했다는데요?]
[축복받은얼굴: 신규 필드? 천계 지역 말고?]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반응이 우리 길드 채팅창에 올라왔다.
기껏 히든캬드가 의심받지 않기 위해 판을 깔았는데, 미리 알고 있던 티를 낼 필욘 없었다.
그래서 난, 이 사실을 길드원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았다.
타연 전 유저들에게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우리들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서.
[산드로: 아직 못 들었는데? 어디래?]
[기파랑: 벨루타 해안에서 떨어진 바닷가래요. 신규 몹들이 출몰하는 걸 우연히 발견했다는데요?]
[축복받은얼굴: 아! 드로랑 나랑 레벨업 했던 곳?]
[대탐험시대: 몹만 나온 게 아니라 그 안에 뭔가를 발견했나 봐요.]
[산드로: 나도 지금 막 지옥불 형님께 귓말 받았다. 여러분! 피닉스도 전원 집결하는 것 같으니까 저희도 다 함께 벨루타 해안가로 가볼까요?]
[축복받은무빙: 좋지! 그럼 다들, 가장 가까운 벨루타 항구 입구에서 만나자!]
[산드로: 네. 저도 바로 갈게요!]
방금 죽은 태성의 유저들은 알까?
자신들은 이렇게 적에게 몇 번이고 당하는 사이, 다리우스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신규 필드에서 그저 사냥에만 열중하고 있었단 사실을.
만약 이번 공격이 제대로 먹힌다면, 물리적인 충격도 충격이지만 사기적인 측면에서도 큰 타격이 될 게 분명했다.
슈웅.
[벨루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와! 사람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찾은 항구.
머맨이 출몰하는 해안가가 벨루타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마을에 도착하자,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보이는 공간이동 도착 이펙트들.
잠시 숨 한 번 고른 순간에도, 족히 수십 명은 넘게 넘어왔다.
[축복받은무빙: 드로야, 멀었니?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산드로: 아!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갈게요!]
갑자기 이렇게나 붐비게 된 이유는 하나.
신규 필드 지역의 발견 소문이 서버 전체에 급속도로 퍼졌기 때문이었다.
“가자가자!”
“근데 분위기타서 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나도 몰라. 일단 사람들 가는 방향으로 따라 가봐!”
고레벨이든 저레벨이든 상관없이 전부 무지성으로 몰려온 느낌.
겨우겨우 인파를 뚫고 길드원들과 조우하자 다들 급한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늦기는 무슨. 아무튼 일단 출발할까? 벌써 수천 명은 몰려간 것 같으니까.”
“넵! 훼라리 소환!”
그런 다음, 다들 각자의 비행 펫들을 소환해 함께 날아올랐다.
“한창 PK하다가 이게 웬일이냐?”
“그러게? 와, 대박이다……. 이런 장관은 처음 보는데?”
내 바로 오른편에서 날고 있는 현중이가 뭔가 신난 기색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지금 우리가 날아오른 해안가 상공에는 어림잡아 수천 기의 페가수스들이 떠 있었다.
모두 뭉쳐있지 않고 제각각이지만 방향만은 모두 같은 곳.
전부 내가 예전에 한창 사냥했던 바닷가 한복판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앗! 저기 좀 봐요!”
그런 무리들 중 태성 라인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주된 이동 무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에도 페가수스들이 점점이 떠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어김없이 피닉스와 태성의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이동이 급한 우리.
하지만 이동은 비행 펫이 하는 것이지 타고 있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었다.
피슛! 펑!
“오케이! 하나 더 격추!”
“와, 라챤이…… 진짜 엄청 세졌네? 몇 대 버티는 애가 없는데?”
그래서 저격수로 전직한 라챤이.
녀석의 활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며 쉴 틈 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적들도 줄여가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헉! 이곳이 이렇게나 붐비게 될 줄이야…….”
바다 한복판 특정 지점에서만 출몰하는 심해 머맨들.
덕분에 지금까지 잘 숨겨졌던 곳이, 지금은 비행 펫 없이 뛰어내려도 익사할 일 없을 것 같았다.
수백 기가 넘는 일반 유저들의 페가수스들이 그 위를 빼곡히 메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인의 방패가 생긴 셈이니까, 들어가 볼까요?”
“그냥 이대로?”
“네. 태성 병력은 피닉스가 막아줄 테니, 안전할 거예요.”
축빙 형님의 우려와 달리, 난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나 급속도로 이슈화가 됐다면 안에 있는 다리우스 또한 모를 수가 없을 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기습해서 퇴로를 막아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한데 그 순간.
[테론 대륙에 숨겨진 첫 번째 금지, ‘수중왕국’의 출입 제한이 사라졌습니다.]
느닷없는 전체 알림창과 함께, 수면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