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저력 (3)
“아니, 저게 뭐야?”
“바, 바위 섬? 아니다! 산호초다”
아무것도 없던 망망대해에 갑자기 생겨버린 섬.
크지도 않았다.
가로세로 30미터쯤?
한데 그 중앙에 있는 것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다들 전체 알림 봤지? 수중왕국 루트가 뚫렸다!”
“저기! 저걸로 이동하는 건가 봐!”
섬의 중앙.
거대한 삼지창을 든 이름 모를 머맨 영웅의 석상을 중심으로 푸른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어딘가 시공 포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느낌이…… 아무리 봐도 방금 뜬 전체 알림과 관련 있어 보였다.
‘뒤가 막힐 것 같으니까 선수를 친 건가?’
금지가 해제됐다는 것.
직접 두 번이나 해본 일이라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 없었다.
이곳의 존재가 발각되자 다리우스가 택한 것.
그건 어렵사리 도착한 금지를 자기들만 독식해오다가, 결국 대중들에게 대규모 이동 루트를 오픈했다는 것을 뜻했다.
[산드로: 다들 솟아오른 섬이 보이죠? 마법진은 수중왕국 지역으로 이동하는 입구 같네요!]
[대탐험시대: 제가 먼저 들어가 볼까요?]
[산드로: 야야! 넌 왜 맨날 먼저 못 들어가서 안달이야?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다들 일단은 진정하시고, 잠시만 주변을 살피며 기다리겠습니다!]
[축복받은무빙: 드로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보다시피 서로 앞다투어 들어가고 있으니까.]
호기심을 충족하든 업적을 획득하든, 아니면 어떤 기회를 선점하든…….
이곳에 몰려든 유저들의 생각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
신규 지역에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수면 상공을 빼곡히 메꾸고 있던 유저들은, 제각각 페가수스에서 뛰어내려 마법진 안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다.
(지옥불: 어떻게 돼가는 중이지? 방금 금지가 해제됐던데, 드로 네가 한 거니?)
(나: 아닙니다 형님. 놈이 스스로 풀었어요.)
(지옥불: 역시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는구나. 일단은 벨루타 항구 입구와 해안가에서 최대한 태성 라인을 막고 있으마. 피스메이커, 화랑, 넥스트... 그리고 일부 흑풍단들도 막 도착했다!)
(나: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막고 계신 동안 최대한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잠깐 대화를 나눈 이 짧은 시간.
작다지만 유저에 비하면 큰 마법진이라, 벌써 수백 명은 족히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안 따라오고 뭐 해? 빨리 들어 와! 안은 안전해!”
그중 왕래 가능 여부부터 확인하는 유저가 없었을 리 만무.
안전이 확인된 이상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입장에 제한이 있었던 건 아니네. 그럼 다리우스 놈들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건?’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니라면 역시 일부러 나오지 않았던 것.
이렇게 된 이상 높은 확률로 수중왕국에서 무언가를 선독점하는 데 집중했다고 간주하는 편이 타당했다.
“저희 버닝 스타도 전원 입장하겠습니다!”
“예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릴 지켜보는 태성 유저들이 보였지만, 감히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태연하게 길드원들을 이끌고 섬 마법진에 착지한 다음 석상을 통해 수중왕국으로 입장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지정된 장소로 이동합니다.]
[수중왕국 뮤토에 도착했습니다.]
[업적 '바닷속 탐험가'를 획득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수중왕국.
도착한 곳은 이동 마법진으로 이어진 것답게 안전지대인 마을이었다.
다만 여길 단순히 마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조금 아리송하긴 했지만…….
“와아, 저것들 좀 봐요! 너무 아름답네요!”
“그러게. 진짜 황홀할 정도로 멋진 곳이네.”
“개쩐다…….”
거대한 소라껍질로만 이루어진 집.
온갖 알록달록하고 큼지막한 가리비 껍데기로 만들어진 지붕들.
마을은 마치 어릴 적 동화책에서나 보던 바닷속 마을의 풍경을 고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또한 우려했던 것과 달리, 거대한 투명막 같은 것으로 바닷물이 차단되어 바깥과 같이 숨 쉬고 걷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안전지대니까 일단은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그러자. 뭔가 발견하면 바로 길드 채팅창에 올리고.”
빠른 수색을 위해 우리는 세 팀으로 나누고 각자 삼각 방향으로 흩어졌다.
도시는 수중왕국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어지간한 메인 성의 외성보다도 컸다.
그리고 벌써 마주친 몇몇 머맨 NPC들.
간간이 보이는 그들은, 신기하게도 꼬리지느러미 대신 인간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시공의 틈새의 주민들. 혹은 생명의 숲 엘프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게임 속 NPC니까요. 어딜 가나 외형은 달라도, 맡은 역할은 대부분 비슷할 수밖에 없잖아요?”
나를 따라나선 축빙 형님과 연우, 그리고 기파랑.
그들과 함께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운 모랫길을 따라 나아갔다.
“지금 이런 얘기 하긴 좀 그렇지만…… 여긴 특별히 더 신비로운 곳인 것 같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연우야?”
“타연에 멋지고 환상적인 곳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긴 정말 판타지 세상 같다고나 할까요? 현실 세상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초거대 아쿠아리움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에요! 정말 너무 좋아요!”
아직 여운에 빠져있는 듯한 연우.
하긴 이곳 수중왕국은, 앞으로 관광 차 타연에 접속하는 일회성 유저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을 게 확실해 보일 만큼 멋지긴 했다.
“그래. 그래도 지금 우리가 구경 온 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집중해 보자. 일단 다리우스 놈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잖아?”
“네? 네에…….”
“드, 드로야!”
“네, 형님?”
“아, 아니야. 됐다. 그냥 하던 대로 주변이나 철저히 잘 살펴봐라.”
뭐지?
다급하게 부르시길래 뭐라도 발견하신 줄 알았는데…….
축빙 형님은 잠시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앞장서 걸어갔다.
“이 주변은 일반 마을과 별로 다른 점을 찾지 못하겠네요…… 수막 밖으로 나가보든가 저 안으로 들어가 보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 나도 마침 같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 저기 어때요, 축빙 형님?”
“그래. 이곳과 안 어울리게 어딘가 좀 음침해 보이긴 하는데…… 그래 볼까?”
아무리 큰 도시라도 작정하고 뒤지다 보니 금세 끝자락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방향의 끝에는 조금은 특별한 구조물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왕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제법 단출하지만 굳건해 보이는 ‘성’이!
“채팅창에 남겼으니 다른 길드원들도 올 거예요. 일단 저희 먼저 들어가 보죠!”
빠르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이곳엔 이미 먼저 들어온 일반 유저들이 제법 도착해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어서 입장은 서로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
따라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길드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났습니다.]
어느 성이든 간에, 외성이 아닌 내성 지역은 전부 비안전지대.
이곳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지, 수막 경계에 걸쳐있는 주성에 다가가던 어느 순간 경고창이 떴다.
“조용한데요?”
“아직 안에 뭐가 있을진 모르잖아? 지금부터는 몹들이 출몰하는 지역일 수도 있으니까, 파랑이 너도 전투 준비해 둬.”
“넵. 데스 나이트 소환!”
전 직업 중 가장 선택률이 낮은 직업 네크로맨서.
그런 직업을 갖고 최초로 400레벨을 달성한 파랑이는 놀랍게도 전직을 포기했다.
솔로 플레이를 지향한다면 전직이 더 나았겠지만, 길드 위주의 협동 플레이로 노선이 변경됐기 때문.
녀석은 오랜 고민 끝에 나와 같은 듀얼 클래스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 파랑이가 택한 세컨드 직업은 ‘인챈터’.
아마 모르긴 몰라도 히든캬드가 태성 1군에 스카우트 된 이유에는, 최초로 전직할 인챈터를 선점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정도로…….
어느덧 파티를 꾸리거나 공성전 등을 준비할 때 필수가 된, 현재 어디서나 귀족으로 대접받는 버퍼였다.
“인챈트 엘리멘탈!”
차례로 우리와 소환한 오크 로드 데스 나이트에게 인챈트를 걸어준 파랑이.
이처럼 동료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환몹에게도 유용한 버프들을 부여할 수 있기에, 네크로맨서와 인챈터의 조합은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 열게요!”
나는 성벽이나 내성문도 없이 바로 성안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정문을 열었다.
그러자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앗! 이게 뭐야!”
“다들 뒤로 물러서요!”
“네? 네!”
문을 열자마자 그 안에서, 온갖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심해 머맨, 리틀 크라켄, 심해 아귀 등등…….
눈에 보이는 것만 어림잡아도 수백은 넘어 보였는데, 심지어 얼핏 보이는 성안에도 이런 몹들이 끝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으악! 살려줘!”
“이게 뭔 일이야!”
튀어나온 몬스터는 우리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일반 유저들에게도 무작위로 달려들었다.
[사냥꾼의 춤!]
[회전 베기!]
허나 그렇다고 나까지 뒤로 물러설 순 없었다.
이 몹들은 내가 얼마 전까지 즐겨 사냥했을 정도로 하나같이 전부 고레벨.
따라서 잠시라도 선공 대상이 돼버리면 아차 하는 순간 바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민할 틈도 없이, 애꿎은 일반 유저가 피해 보지 않도록 어그로를 전부 다 내가 먹어버렸다.
“으헉! 살았다!”
“감사합니다, 산드로 님!”
“말씀할 시간에 어서 뒤로 피하세요!”
[리틀 크라켄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심해 머맨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심해 아귀로부터 2,33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
아무리 나라 할지라도 이 많은 몬스터들에게 뒤덮이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
하지만 그렇다고, 보스 몹도 아닌 놈들에게 위기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축복받은무빙의 그레이터 힐로 12,256의 체력을 회복했습니다.]
[기파랑으로부터 블러드 웨폰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젠 예전과 다르게 동료들의 도움을 100% 활용할 수 있기 때문.
특히 강력해진 공격력이 피흡 버프인 블러드 웨폰과 조합되자, 예전 마나 쉴드 때와 맞먹을 만큼 탱킹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사실상 힐러인 축빙 형님보다 버퍼인 파랑이가, 내 생존력에는 더욱 도움이 되는 셈이었다.
‘근데 이것들은 뭐지? 성안에 몹들이 이렇게나 몰려있을 수 있다고? 너무 비정상적인데?’
마치 파쇄기마냥 다가오는 몹들을 단숨에 분해시키고 있었지만, 우린 이곳에 사냥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걸 보면 다리우스 패거리가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맞다! 심연의 구슬이구나!’
인근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들도록 만드는 소모성 아이템.
고르곤이 갇혀있던 노스랜드 끝자락에서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놈들이 그렇게 했던 목적은…….
“이곳이에요! 놈들은 분명 이 안에 있습니다! 연우야, 길드원들보고 서두르라고 적어 줘!”
“네, 오빠!”
다른 유저들이 접근하는 걸 최대한 막고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어 숨기고 싶다.
혹은 무언가를 끝마치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다.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타당했다.
이런 생각까지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제자리에서 잡던 몹들을 앞으로 조금씩 전진해 나가며 성안에 발을 다시 들여놓았는데…….
“속박의 손길!”
뜬금없게도 안쪽에서 한 여성 유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속박의 손길에 저항했습니다.]
‘뭐지? 어떻게 저 안에서!’
하지만 보기 좋게 면역된 디버프 마법.
“아오! 삑사리야? 그럼 이것도 피해 봐라, 에어 밤!”
그리고 내 앞으로 날아온 바람 마법.
이번엔 적중됐지만 넉백엔 100% 저항인 불굴의 의지 덕에, 상태 이상은 무시되고 데미지만 받았다.
하지만 전투 로그창에 날 공격한 유저의 이름이 또렷이 적혀있어서 누가 공격한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홍당무로부터 2,666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성안 깊숙한 곳.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한가운데에서 유유히 마법을 날리고 있는 그녀의 정체를…….
“감히 나를 쳤겠다? 파랑아!”
“네?”
“다시 줘, 블러드 웨폰!”
그리고 못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친히 눈앞에 나타나 줬는데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몹들이 수백 마리도 넘게 우글거리는 틈에 있다 하더라도…….
[기파랑으로부터 블러드 웨폰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림자 밟기!”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