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저력 (4)
“꺄! 너 뭐야!”
무수히 쏟아지던 공격들을 뚫고 달리다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내 몸은 홍당무의 뒤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태세 전환으로 뻥튀기된 공격을 휘두르자, 그녀는 무척 당황한 듯 버벅댔다.
설마 이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한복판에 과감히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
“블링크!”
하나 그녀도 전투라면 질리도록 겪어본 유저.
몬스터로 가득한 성안에서 블링크를 사용해 사라지자, 어느 방향 어느 몬스터 뒤로 숨었는지 순간적으로 찾을 수가 없었다.
“귀신 발걸음!”
그래서 나는 전후좌우가 아닌, 위로 점프하며 스킬을 시전했다.
그렇게 솟구친 7미터가량의 높이.
가장 큰 몬스터도 3미터는 넘지 않았던 터라, 공중에서 한번 쭉 둘러보니 홍당무의 위치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저기다!’
그리고 착지.
다시 온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바라보며, 나는 비장의 스킬을 시전했다.
[재빠른 몸놀림!]
[유령화!]
5초간 물리 공격에 면역인 이터리얼 상태로 변환되는 악마 사냥꾼의 생존기였다.
“쿠와! 크아!”
쉬쉭! 쉭! 쉭!
시전과 동시에 반투명 상태가 된 몸.
나를 향해 온갖 공격들이 쏟아졌지만, 마치 유령이라도 된 듯 모두 내 몸을 통과하며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몬스터들을 향해 다가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있는 한…… 내게 길막 따위는 통할 수 없지!’
물리 피해 면역이란 특징을 가진 이 스킬은, 사실 극회피 테크로 바꾼 내게 별 필요 없어 보였다.
공격도 못 하면서 오히려 마법 피해는 더욱 가중 받기에, 배우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 같아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한데도 굳이 이 생존기를 굳이 배운 이유.
그건 ‘이터리얼’ 폼이 가진 특별한 판정 때문이었다.
‘스킬의 이름처럼…… 오브젝트를 뺀 모든 부딪힘 판정이 전부 무시되니까!’
“뭐, 뭐야!”
“뭐긴 뭐? 악마 사냥꾼 첨 봐?”
빠른 이동 속도로 수십 마리의 몹들을 통과한 내 이터리얼 폼은, 심해 아귀 뒤에 숨어있던 홍당무 바로 앞에서 풀렸다.
그와 동시에 난, 그녀를 향해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태세 전환!]
[일격 강타!]
“아, 안 돼! 마나 쉴드! 윈드 월!”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나를 몇 번이고 상대해 본 유저.
침착히 마나 쉴드를 활성화시키며 뒤로 물러서고는, 곧바로 새로 배운 즉발 마법을 시전했다.
윈드 월(wind wall).
원소 마법사가 되면 새롭게 익힐 수 있는, 지속 데미지와 함께 이동 속도까지 감소시키는 스킬이었다.
[홍당무로부터 1,221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홍당무로부터 1,221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심해 머맨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리틀 크라켄으로부터 2,588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
파직!
내 공격으로 인해 그녀의 몸 주위에서 마나 쉴드 특유의 파란 일렁임이 출렁였다.
하지만 나 또한 무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냥꾼의 춤 지속 시간이 끝나자 회피율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그러자 둘러싼 수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에 적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직접 타격 가능한 몬스터의 숫자가 한정돼 있어 버틸 만했지만, 수가 수인만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이쯤에서…….’
하나 아무 생각도 없이 뛰쳐 든 건 당연히 아니었다.
18초간 공격 데미지의 25%만큼 체력을 빼앗아오는 사기 스킬, 블러드 웨폰.
이걸 새로 받자마자 안에 들어온 터라, 잠시 동안 난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회전 베기!]
공격 범위에 포함돼 적중된 몹들만 수십!
이 한 번의 스킬 사용으로 1/3가량 떨어졌던 내 체력은 단숨에 가득 차올랐다.
“이익! 이걸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야!”
“어째서 몹들이 넌 공격하지 않는 거지?”
“흥! 돌았니? 그걸 내가 대답해주게?”
필사적으로 몹들 사이를 파고들며 물러서는 홍당무.
그런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공격하자, 결국 어느 순간 마나 쉴드의 피격 이펙트가 발동되지 않았다.
내 막대한 공격력에 보유 마나가 전부 소진된 것이다.
“안 돼! 치지 마!”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감에 킬을 확신한 순간.
갑자기 코앞에 있던 그녀가 사라졌다.
아니, 마치 뒤로 빨려들듯 순식간에 내게서 멀어졌다.
“당무야, 그러게 내가 혼자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단숨에 홍당무를 낚아채 간 사람의 손에는 군단장의 채찍을 들고 있었다.
‘포획 스킬…….’
우리보다 고르곤을 앞서 잡았던 유저.
죽기 직전의 그녀를 살려준 이의 정체는 다리우스였다.
“죄송해요, 오빠. 놈이 공격당하고 있길래 디버프만 몇 개 먹여 본다는 게 그만…….”
“저 새끼는 우리만 보면 달려드는 미친개라고 했지? 하긴 너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냐. 재수 없게도 저런 놈이 들러붙은 게 문제지.”
마침내 이곳에 온 목적인 다리우스의 행적을 찾아냈지만, 여기엔 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도양단, 동키호테, 힐보따리 등등…….
다리우스 곁에는 십수 명의 태성 정예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다리우스와 홍당무는 나를 근처에 두고도 사뭇 여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빠르게 계산해 봤다.
놈들과의 거리는 대략 20미터 정도.
그 사이를 수많은 몬스터들이 빽빽하게 뭉쳐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나만 공격 중이었다.
단테리오 팔찌를 사용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태에서 다리우스를 죽이는 건 불가능.
오히려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간, 자칫 더 많은 몬스터들에 둘러싸여 마나 소진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빠진다!’
언제나 결정은 빠르고 신속하게.
주저함만큼 미련한 것도 없다고 여기는 나기에, 당장 혼자서 다리우스를 죽이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다 잡은 물고기까지도 놓아줄 순 없었다.
[포획!]
“어멋!”
또한 언제나 방심은 금물.
내가 뻗은 채찍에 적중된 홍당무는, 끌려갔던 그대로 다시 내게 끌려왔다.
마나 쉴드가 꺼져있어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
여유 부리며 한마디라도 할 시간에, 도망부터 치든가 최소한 한 걸음만이라도 뒤로 물러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번만큼은…… 어쩌면 내 손에서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게 전투 중에 입은 왜 털어?”
“아! 찌발!”
퍼퍽! 퍽! 퍽!
연속 베기와 함께 이어진 평타 공격.
그녀는 내게도 군단장 채찍이 있다는 걸 잠시 망각한 탓에, 죽음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됐다.
“저 개새끼가!”
자신이 살려낸 부하가 결국 눈앞에서 처참히 죽게 되자, 멋있는 척 목소리를 깔던 다리우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곤 곧바로 내게 쏜살같이 달려왔다.
기사의 대표 전진기, 차징이었다.
“죽어 이 자식아!”
그리곤 빠르게 휘두른 공격들.
[다리우스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다리우스로부터 9,55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랭킹 2위이자 마신검의 주인답게……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집중 회피!]
하지만 내겐 아껴둔 생존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8초간 머리와 몸통을 제외한 곳은 절대 회피 판정을 받는 스킬.
“좀만 있다가 다시 보자.”
혼자였다면 얼씨구나 상대해줄 절호의 찬스.
하지만 놈의 뒤에서 부하들이 다가오고, 나는 수백 마리의 고레벨 몹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마음먹은 대로 상대를 포기한 채, 다시 역행해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캬오오!”
내 머리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소환으로 튀어나오더니, 곧바로 내게 아가리를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드래곤 피어에 저항했습니다.]
그 정체는 바로 ‘피어’ 공격.
하지만 다행히도, 내 디바인 투구에 붙어있는 정신계 공격 마법 면역 덕분에 공포에는 빠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
하지만 내 머리 위, 성안이 순간 좁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소환물의 위엄에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다리우스의 블랙 드레이크>
검은 광택으로 번들대는 비늘.
긴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 붉은 눈동자.
어느새 다리우스는, 내 훼라리보다 족히 1.5배는 커 보이는 드레이크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뭐해? 다들 막아서! 도망치게 놔두지 마라!”
비록 상태 이상 공격엔 실패했지만, 가뜩이나 몹들로 둘러싸여 이동이 힘든 공간을 거대한 드레이크까지 막아섰다.
순식간에 반피까지 떨어진 HP.
이미 이터리얼 폼도 써버렸기에 몹들을 통과할 수 없었던 나는…….
“현중아 간다!”
그대로 다리우스가 소환한 드레이크의 몸을 타고 위로 올랐다.
그리곤 곧바로 현중이를 부르며 도움닫기를 해, 높이 점프했다.
전투가 이어지는 중에도 채팅창을 통해 길드원들이 도착한 것을 파악해 두었기에…….
나는 몹들에 막혀 보이지 않아도, 입구에 현중이가 있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 길드의 메인 탱커였으니까.
“포획!”
그리고 역시나 나이스 캐치.
현중이는 내가 줬던 군단장의 채찍으로 나를 낚아채, 성문 바로 앞까지 쭉 당겼다.
“이 미친놈아! 혼자 그 안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저건 또 뭐고? 이거 완전 돌았네!”
“그러게요, 드로 형님. 쫌만 기다리시지 혼자 거길 왜 들어갔대요?”
나를 보자마자 책망부터 하는 현중이와 라챤이.
어느새 성문 앞에는 모든 길드원들이 집결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원래 대형 떡밥을 보게 되면, 일단은 한 번 물어주는 것도 예읜 거야.”
“네?”
“물론 날 낚으려던 놈은 오히려 물고기한테 잡아 먹힌 꼴이 됐지만.”
“대체 무슨 말씀이신 건지…….”
이제 막 도착한 당당이도 막 빠져나온 모습만 본 터라, 그저 알 수 없겠단 표정만 짓고 있었다.
“됐고. 이놈들부터 빨리 잡자. 안에 다들 모여있더라. 다리우스 패거리가!”
“오! 정말! 그럼 빨리 다 정리하고 싸워야지!”
“역시 여깄었구나?”
내 말에 다들 흥분했는지, 쏟아지는 몹들을 향해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젠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화력도 무척이나 강해졌다.
그래서 내가 잠시 뒤로 빠져도, 몹들에게 밀리긴커녕 입구 안으로 밀어내는 게 문제없어 보였다.
“형님은 전부 보셨죠?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흐음. 글쎄…….”
그래서 잠시 숨도 고를 겸 뒤로 빠졌다.
그리고 후방에서 열심히 힐을 날리느라 바쁜 축빙 형님에게 다가가, 방금 봤던 현상에 관해 물어봤다.
홍당무를 비롯한 다리우스 패거리는 어째서 이 몬스터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건지.
“단순히 어그로가 안 끌리는 수준이 아니에요. 분명 홍당무의 공격에 몬스터가 맞아야 하는데도, 맞질 않더라고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몹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셨잖아요. 분명 공격 범위 안에 있었는데도, 피격 판정을 받지 않더라고요.”
홍당무가 내게 날렸던 에어 밤과 윈드 월.
내게 상태 이상을 먹이고자 날린 스킬들이었지만, 그것 외에도 둘 다 광역 공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데 그 공격에 피해를 입은 건 오직 나 하나뿐.
몬스터가 유저의 광역 마법에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타연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
“그리고 홍당무뿐만 아니라 다리우스와 그 부하들도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마치 자기 성에 있는 것처럼요. 몹들이 NPC도 아닌데 그럴 순 없지 않아요?”
“그레이터 힐! 수호의 빛! ……그러면 답은 하나겠네.”
“네? 어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축빙 형님.
연신 동료들의 체력 관리에 신경 쓰면서도 형님은 이 현상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아냈다.
“다리우스네 패거리……. 놈들이 이 수중왕국의 몬스터들과 동맹 관계가 됐나 보다.”
“네? 동맹이요? 유저가 몬스터랑 동맹을 어떻게 맺어요?”
“말이 그렇단 거고 진짜 동맹은 아니겠지……. 아마 같은 편 비슷하게 된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다리우스가 이곳 몹들과 한 편이 됐다고요?”
“그래. 공성전에서 동맹 공격에 피다는 걸 본 적 있냐? 어그로 무시까진 몰라도 아예 공격 자체도 안 먹힌다는 건…… 시스템상 아군 판정을 받고 있단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어.”
늘 새로운 것들을 선점해왔던 다리우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
놈이 하던 역할을 지금은 전부 나로 대체됐다.
따라서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곳의 입장 방법을 운 좋게 찾아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그냥 랭킹 1위였던 건 아니라 이건가?’
하지만 그건 내 오산이었다.
우리가 천계에서 강해지는 동안, 놈 또한 가만있진 않았다.
이곳 수중왕국의 금지를 해제한 것도 모자라 어느새 몹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놈이 소환한 알 수 없는 블랙 드레이크까지.
다시 만난 녀석은…….
순순히, 혹은 쉽게 당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저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재밌네요.”
“응? 드로야, 방금 뭐라고 했어?”
“재밌다고요. 제가 무너뜨리려는 상대가 이 정도는 해줘야 재밌죠.”
“뭐?”
“이럴 때가 아니네요. 서둘러야겠어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놈을 쫓으려면!”
하지만 오히려 내 피는 더 끓어올랐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
놈에게 그걸 안겨주는 편이, 더욱 통쾌한 복수가 될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