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두 개의 신검 (1)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장화.
양옆으로 날개처럼 돋아난 장식은, 무슨 신발 따위에 이렇게나 공을 쏟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절로 감탄이 나오는 순간.
대탐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형님, 템 드렸으니 전 다시 돌아갈게요! 여기만큼이나 저기도 급하거든요!”
“잠깐만! 이거 차고 가!”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녀석이 날개 부츠를 벗어줬으니 장비 하나가 갑자기 비었을 터.
이 안에선 제법 도움도 될 템이기에 서둘러 착용 해제한 대도 부츠를 건네줬다.
“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야.”
“네?”
“……이건 잘 쓰고 꼭 돌려줄게. 절대 죽지 않으마!”
“하하! 그럼요! 저도 잘 쓰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얼음벽을 타고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대탐이.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점프부터 한 번 해봤다.
‘오옷?’
힘을 살짝만 줬는데도 솟구친 몸은 높은 빙벽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뭔가 점프력과는 근본부터 다른, 누군가 몸을 들어 올려주는 듯한 부력(浮力).
심지어 자유롭게 방향 전환까지 가능해서, 잠시 이 낯선 감각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짧게 두어 번.
훼라리와 대도 부츠를 활용한 온갖 곡예비행과 무빙에 익숙한 나기에, 이 부츠가 요구하는 컨트롤 정도는 금세 충족할 수 있었다.
당당이가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나 또한 컨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어이없게 훼라리를 잃어서 저 자식을 어떻게 잡나 싶었는데……. 고맙다 대탐아!’
이리저리 몇 번 움직이는 동안 투 뮤탄의 어그로는 다시 레벤다스한테로 옮겨졌다.
하나 이 순간에도 계속 날아오는 태성 원딜러들의 공격.
지상에 살짝 뜬 채로 휙휙 피하다가 힘껏 도움닫기를 해 차올랐다.
슈우웅!
아니, 날아올랐다.
데이네스 대신 블랙 드레이크로 갈아타서, 지상으로부터 50미터는 떨어진 천장 부근에서 내려다보던 다리우스를 향해!
“받아랏!”
훼라리만큼 빠르고 자유로운 공중 비행.
양손의 검을 펼친 채 제비처럼 날아간 나는, 곧바로 드레이크 등 위에 앉은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뭐, 뭐냐 이건 또!”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처음부터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놈의 외침.
“뭘 그리 놀라고 그래? 그러게 나처럼 템 파밍도 열심히 했어야지!”
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마법사들의 느리디느린 플라이 마법만 보다가, 이렇게 날랜 매와 같이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유저가 나타날 줄.
애써 얻었을 블랙 드레이크는 이 순간 그저 덩치 큰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놈에게도 나름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이익! 쾌속 전진!”
놈의 외침과 동시에 순간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드레이크.
내 스피드를 상회하는 급가속에, 나는 놈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걸 허용해야만 했다.
-놈이 택한 전직은 돌격 기사다. 탱킹에 최적화된 수호 기사와 달리, 공격과 진형 파괴에 적합한 직업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라이딩에 특화된 스킬이 있다고 하더군.
제독에게서 들은 놈의 전직 정보.
놈이 새로운 애마로 드레이크를 얻은 줄 몰랐지만, 이렇게 라이딩 상태에서 사용하는 스킬들 또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이 좁은 곳에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들러붙지 좀 마라!”
다리우스가 급한 마음에 도망치다 방향을 돌린 곳은 놈의 타이탄 부대.
논타겟팅 원거리 공격으로는 자유비행을 하는 내게 피해를 줄 수 없는 것 같자, 긴 리치를 가진 타이탄들이 더 낫겠단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지! 귀신 발걸음!”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뒤쫓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진 스킬까지 사용해 놈과의 거리를 최대한 단축하며 따라붙었다.
그러다가 결국 놈이 탄 드레이크의 꼬리 부근에 아슬아슬하게 검이 닿았다.
‘네가 그 위에 타 있는 이상, 굳이 직접 공격하는데 집착할 필욘 없지!’
지금 내 1차 목표는 놈이 아닌 블랙 드레이크 그 자체.
나와 같은 드레이크를 소환한 걸 보면 놈도 분명 ‘드래곤 라이더’ 업적을 얻었을 터.
데미지 공유를 택해 자신의 체력이 함께 소모되거나, 드레이크가 역소환되어 비행이 봉쇄되거나.
나로선 놈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었다.
내 왼손에 들린 용살검, 샤크 투 메르타스.
이 무기는 ‘드래곤’ 계통 몬스터를 상대할 때만큼은, 신검을 훨씬 웃도는 위력을 발휘했으니까!
“다들 이 자식 좀 잡아! 아니, 일단 막아!”
그렇게 스치듯 몇 대 맞은 것만으로도 식겁한 놈은, 타이탄 부대의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곤 한 티에스 나이츠의 어깨 위에 안착한 다음, 나의 후속 공격을 염려하며 외쳤다.
“넌 그 태도부터가 문제야. 우리 둘이 싸우는데 왜 자꾸 부하들만 찾고 있어? 그게 그 잘난 태성 라인의 수장이 할 짓이야?”
그간 놈을 목표로 성장해왔지만, 막상 게임상에서 마주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오늘 전투에서 마지막 대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한 난, 허공에 멈춘 채 녀석의 졸렬함을 비웃어 주었다.
“건방진 새끼. 내 신검만 아니었다면 여지껏 별것도 아니었을 놈이!”
“……그런 너는 뭐 별거야?”
“뭐 이 새끼야!”
“내가 신검 덕분에 이만큼 큰 건 맞지만…… 너도 곧바로 마신검을 훔쳤잖아. 서로 같은 7신기를 갖고 있는데, 넌 왜 추월당한 것도 모자라 이 모양 이 꼴인 건데? 그런 말 하기 창피하지도 않냐고?”
“…….”
“패배를 직감하고 있나 보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닥쳐! 지긴 누가 진다는 거냐! 너 같은 하류 인생 따위가 감히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다리우스, 박태후.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갑작스러운 내 자유비행에 적잖이 당황 중인 게 눈에 보였다.
불안한 예감을 억지로 부정하고 있는 상태.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네게 더 없는 상실감을 안겨줘서 차디찬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수밖에.
지금 네가 차고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디바인 장비.
따라서 죽게 되면 무조건 드랍하게 될, 네 마신검을 빼앗는 것으로!
“그래 좋다! 그러니까 부하들 뒤에 숨는 건 좀 그만하고, 누가 죽을지 제대로 붙어 볼까? 당당아!”
“네!”
“거슬리는 타이탄들부터 정리해야겠다! 막아 줄 수 있지?”
암만 내가 타이탄 킬러라 해도 이것들을 상대하며 다리우스를 잡기란 요원했다.
아무리 그래도 놈 또한 랭킹 2위이자 7신기의 소유자였기 때문.
그러니 당장 눈앞에서 걸리적거리는 타이탄부터 없애는 게 순서였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다리우스 놈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럼요!”
혼자 타이탄 10여 기의 발을 묶고 있던 당당이.
난 녀석에게 다른 타이탄이 접근하는 걸 최대한 막아주길 주문하고는, 가장 가까이 있던 타이탄을 향해 날아갔다.
“으헉!”
부웅!
4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티에스 나이츠.
하지만 내가 그 느린 공격에 맞아줄 일은 없었고.
휘릭!
오히려 허공에서 춤추듯 공중제비를 돌아서, 공격한 타이탄의 머리를 타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시작된 거침 없는 후방 공격.
[집중 회피!]
아무리 허공을 날고 있다 한들 한 대상을 공격하다 보면 동선이 한정되게 된다.
하지만 적의 타이탄 부대 속으로 들어왔다 보니 오히려 원거리 공격은 같은 편 동체에 막히게 되었고.
부웅, 부웅!
당당이를 뚫고 들어온 몇몇 타이탄들의 공격은 동작이 크고 느려서, 활성화된 집중 회피 상태로 피하기에 너무도 수월했다.
픽! 쾅!
그러는 한편 거대한 화살과 마법 구체 등이 계속 날아와 내 앞의 타이탄에 적중했다.
여전히 타이탄 모드로 보스 몹의 공격을 견디면서도, 이곳을 향해 지원사격을 시도한 라챤이와 축볼 누님.
내 딜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 또한 타연 최강의 딜러들이었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말도 안 돼!”
결국 집중 회피의 지속시간이 끝나기도 전.
공격하던 타이탄은 환한 빛과 함께 역소환되고 말았다.
탓.
그리고 난 바로 지상으로 내려와 그 안에서 튀어나온 태성 유저를 마저 공격했다.
[일격 강타!]
[급소 공격!]
거대 타이탄들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과감한 공격.
하지만 워낙 공중과 지상을 넘나들며 정신없게 날아다닌 터라, 내 순간 움직임을 포착한 공격은 몇 되지 않았고…….
“다들 뭘 보고만 있는…… 커헉!”
슈우우.
내 경직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사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타이탄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진 오랜만의 정수 득템.
방금 죽은 전사는 정말 운이 없게도, 타이탄 라이더가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을 드랍하고 말았다.
“뭐 하는 거냐! 잡으라고!”
다리우스의 외침에 다시 내게 휘둘러지는 거대한 타이탄 전용 검과 창들.
하지만 타이탄 사냥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림자 밟기!]
콰과광.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집중된 공격은 애꿎은 빈 땅만 헤집었고.
나는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다른 타이탄의 후방으로 이동해 반격했다.
대도 부츠를 착용했을 때와 다르게, 타이탄의 몸에 올라타는 대신 공중에 뜬 상태로!
휙! 휙!
땅에 고정된 몸이 아니라 그런지, 나를 향한 공격들은 도통 적중되는 게 드물었고.
[티에스 나이츠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설령 운 좋게 맞았다 하더라도, 극회피 세팅인 내게 유의미한 데미지를 입히는 물리 공격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디바인이라도 부츠 하나 바꿨을 뿐인데…… 정말 말도 안 되는 활약이 가능해졌구나!’
뒤늦게라도 나를 상대하기 위해선, 당장 타이탄부터 해제한 뒤 다리우스를 필두로 진형을 짜는 편이 나았을 터.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 당황한 놈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내 막강한 공격력에 겁이 나, 타이탄이라는 거대한 갑옷을 벗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명하노니, 내게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아이스 월!』
계속해서 타겟팅을 바꾸며 난동부리는 투 뮤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나와 상관없는 일인 듯, 오직 타이탄들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했다.
‘셋…… 넷…… 다섯!’
조금 전 홀로 로드급인 데이네스도 역소환시켰던 몸.
지금은 훌륭한 원딜러들의 지원까지 이어졌기에, 솔저급 중에선 오래 버텨내는 기체가 단 한 기도 없었다.
“저 괴물……!”
“누구냐! 내가 그딴 개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저 자식도 한낱 유저일 뿐이야! 피가 달면 죽을 수밖에 없는 놈이라고!”
순식간에 절반이나 궤멸당한 타이탄 부대.
나머지 타이탄들은 급격히 수가 줄어들자 어깨동무라도 하듯 똘똘 뭉쳐 버렸다.
그중 하나에서 들린 귀에 익은 목소리.
그에 나도 한 마디 대꾸해 줄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양단아. 나도 맞다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긴 하겠지. 근데 니들 중에서 누가 할 건데? 너희 길마도 겁먹어서 내게 검 한 번 못 휘두르고 있는데, 누가 내 피를 깎아 줄 거냐고?”
“…….”
“이제 알겠지? 함정에 빠진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였다는 걸?”
“…….”
내가 아는 일도양단이라면 바로 발끈할 도발을 했는데도, 놈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흥미를 잃은 난 다시 공격을 재개하려 다가갔으나.
“붙어!”
5기의 타이탄과 다리우스는 왼편을 향해 동시에 움직였다.
‘뭐지?’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놈의 원딜러들과 합류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지금도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들은 그쪽이 아니었다.
놈들이 달려간 방향.
거기에 있는 건 여전히 레벤다스를 비롯한 우리 길드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투 뮤탄이었다.
“뭐? 함정에 빠진 건 우리라고? 네 피를 깎을 사람이 없다고? 착각하지 마라, 산드로! 그 흔한 힐러 하나도 없이, 이 보스 몹과 우릴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
“모양새는 좀 빠지게 됐지만 상관없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건…… 너희가 아닌 우리가 될 테니까!”
흉폭하게 양 손목에 연결된 석퇴를 휘두르는 투 뮤탄의 모습.
다리우스는 그 발밑에 새로운 소환물을 탄 채로, 올 테면 와보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