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두 개의 신검 (2)
‘뭐지?’
순간 지금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 머릿속이 잠시 정지상태에 빠졌다.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내팽개친 게 전략이라니.
보스 몹 엉덩이에 숨어,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티겠단 놈의 속셈이 너무도 어이없었다.
쿵, 쿵.
그런 내 뒤로 당당이와 라챤이가 달려와 물었다.
“드로 형, 이거 뭐예요? 저 자식들 왜 싸우다 말고 뒤로 다 빠진 거예요?”
“…….”
“……드로 형?”
‘내가 알던 그 다리우스가 맞는 건가? 그토록 체면을 중시하고 허세에 빠져 살던 놈이 맞는 거냐고?’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던가…….
이제 와 저딴 식으로 행동하는 건, 줄곧 내 대적자로 생각해온 놈이라고 보기엔 너무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둘 다 잠시만. 형 좀 따라와 봐!”
“네?”
“저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일단 정리부터 한 다음에 얘기하자고.”
그런 내가 정신 차린 뒤 내린 오더.
그건 놈이 흘리고 간 타이탄이 없던 정예 멤버들.
첫 연막 공격 때 살아남은 힐러와 원거리 딜러들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현재 타이탄이 하는 역할이라든지 해제 후의 생존 문제라든지 해서, 대부분의 라이더는 탱커들이 맡고 있다.
덕분에 처음 50명에서 살아남은 절반.
그중에서도 타이탄을 소환하지 못한 직업군은 대부분 힐러나 원딜러 등과 같은 종이 몸들이었다.
‘저들이 전부 다리우스와 합류해서 버티면 더 까다로워진다.’
넓긴 하지만 그래 봤자 보스 룸.
그들이 떨어져 있던 거리가 그렇게 먼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놈들은 발 빠르게 투 뮤탄이 있는 다리우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휘웅.
하지만 내 발엔 누구보다 빠른 이동 수단인 날개 부츠가 신겨져 있었다.
“뭐, 뭐야! 쉴드!”
툭.
다리우스와 나머지 잔당들, 그 중간에 착지한 나는 곧바로 제자리에 웅크렸다.
그리고 난전을 유도하기 가장 최적인 스킬을 시전했다.
[덫 설치(연막)가 완료되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합류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익!”
펑!
그 말과 함께 밟은 덫에 주변은 자욱한 연기로 뒤덮여 버렸고…….
이번 역시나 첫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당당이와 라챤이의 딜링 보조에 힘입어 학살하듯 날뛰었다.
“저, 저, 저 개자식이!”
멀리 떨어진 게 아닌지라 인근에서 일도양단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만 할 뿐.
그렇다고 연막 안으로 뛰어들 시도는 조금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 믿고 투 뮤탄에게 붙은 건데,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내 앞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사, 살려주세요 길마님!”
“저희 바로 옆에 있잖아요!”
서걱서걱.
내 두 검에 무참히 썰리는 유저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도움을 요청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들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 수적 우세와 보스 몹이라는 든든한 서포터를 믿었기 때문.
하지만 그 절박한 소리에도, 연막에 갇힌 그들에게는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없었다.
‘당신들도 이런 전투가 될 줄 알았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오지 않았겠지?’
종이 몸을 가지고 나와 일대일을 벌이고 싶은 유저는 타연에 아무도 없을 터.
그러나 지금의 전투는 그와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휘우우우.
어느새 연막의 지속 시간이 걷히고 그 안의 모습이 드러났고, 다소 소란했던 장내는 고요해졌다.
총 11명.
내가 직접 한 명씩 죽일 때마다 속으로 센 숫자.
다리우스나 놈의 타이탄들이 나를 막아서며 합류할 시간을 벌어줬더라면, 이 정도까지 죽진 않았을 병력이었다.
“괜찮다. 다들 동요하지 마라! 다행히 힐러 4명은 무사히 넘어왔으니까, 버티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다!”
와아아!
평소라면 다리우스의 독려에 이같이 사기 충만한 반응이 이어졌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타이탄 5기와 힐러 넷, 그리고 다리우스.
위풍당당했던 50여 명의 정예가 사라지는 동안 한 거라곤, 고작 축빙 형님 하나만 리타이어시킨 정도.
환호할 인원도 없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닌 모양이었다.
콰콰콸!
그 광경을 쳐다보던 내게 갑자기 물줄기가 쏘아졌고, 난 그대로 몸을 던져 피했다.
공중을 날 수 있다는 것.
그건 몸을 던진 후에도 구를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했고…….
뛴 방향과 달리 허공에서 각도를 튼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사기적인 회피 기동도 가능케 해주었다.
『명하노니, 내게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아이스 월!』
그 직후 내 인근에 또다시, 어느덧 익숙해진 얼음벽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걸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어떤 패턴으로 마법을 사용하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벽을 저렇게 쓰고 있었던 거구나!’
투 뮤탄이 휘두르는 석퇴의 리치는 대략 30미터 정도.
신체만 해도 10미터는 되는 놈이기에 얼핏 길어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사정거리였다.
근접 딜러들이 한 번 붙기 위해선 거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수준.
한데 놈은 자신의 반경 30미터엔 얼음벽을 하나도 소환하지 않았다.
즉 얼음벽은, 놈이 자신의 석퇴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유저들을 가둬두는 용도로 소환하는 것이었다.
[산드로: 다들 한군데로 모여보세요.]
다시 바뀐 놈의 어그로는 축빙 누님.
줄곧 뒤에서 로파티엘에 탄 채로 원거리 공격만 했던지라 체력 여유가 있어 보였고.
나는 잠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 같자 파티원들을 긴급소집했다.
“다들 괜찮으시죠? 어때요, 저도 함께 공격하면 잡을 만할까요?”
아직 타이탄에 타 있는 현중이와 라챤이, 연우.
그들을 제외하곤 타이탄이 없거나 이미 타이탄의 체력이 전부 소진되어 원상태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직 넌 제대로 상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강하고 어려운 보스 몹이야. 처음 보스룸을 막을 때부터 뭔가 불길하긴 했는데…….”
“현중이 형 말이 맞아요. 가뜩이나 마법도 까다로운데 저 석퇴 데미지가 정말 미친 수준이에요. 한번 잘못 걸려 묶여다가는, 타이탄 상태라 해도 반피가 금방 날아가더라고요.”
전투하느라 바빠 살피지 못했는데, 이미 현중이나 라챤이는 한 번씩 호되게 당했는지 진저리를 쳤다.
현재 투 뮤탄의 머리 위로 보이는 체력바는 80% 정도.
물론 처음 보는 보스를 상대로 이 정도면 결코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40여 명을 도륙하는 동안의 성과치고는 다소 아쉬웠다.
우리 길드가 갖고 있는 타이탄을 전부 다 써버리고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이 좀 급박합니다. 당장은 타이탄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곧 맨몸으로 상대해야 하니까요.”
“생각보다 너무 강한 보스예요! 우리만으로는 그냥도 잡을 수 있을까 장담 못 할 놈인데…… 저렇게 방해꾼들까지 있으니……!”
“방해 수준이 아니야! 이젠 완전히 보스 몹과 한 몸이 된 것처럼 굴고 있잖아? 보스를 치든 저놈들을 치든, 동시에 둘을 상대하는 수밖에 없어!”
“드로 형님, 어떻게 하죠? 이대로 시간을 끌게 되면…… 저희만 불리해지는 거 아니에요?”
사실은 급한 걸 떠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대개 보스 몹들은 초반이 약하고 죽기 직전이 가장 강했다.
현실이라면 반대겠지만, 게임답게 마지막 페이즈에 필살기를 비롯한 온갖 패턴 등이 집중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보스 몹을 먼저 죽이고 남은 적들을 상대하자니 힐러도 없이 잡기는 힘들어 보였고, 무엇보다 순조롭게 레이드가 이뤄지도록 놈들이 지켜만 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적들부터 먼저 잡자니, 투 뮤탄의 무시무시한 공격과 방해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길드원들은 하나둘씩 죽어 나가는데 다리우스는 버텨낸다면?
결국 패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퇴로만 확보된다면 최악은 면할 수 있겠는데…… 정말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까요?”
“없을 것 같아요, 형님. 안 그래도 제가 무빙 샷을 날리며 입구 쪽 빙벽도 살펴봤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두껍더라고요. 그리고 보나 마나 태성 라인들이 밖에서 대기 중일 테고요.”
라챤이의 정보대로라면 결국 어떻게든 투 뮤탄과 다리우스 패거리, 둘 모두를 전멸시켜야만 했다.
귀환도 안되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말이다.
‘아마 먼저 죽었던 홍당무나 홍길동 같은 부하들이겠지.’
놈이 자신만만해 한 이유.
그건 설령 우리가 양패구상하더라도…….
밖에 있는 부하들이 리셋된 보스룸에 들어와, 드랍템들을 주워줄 거란 확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기만 한다면 고작 다리우스의 부하들이 우리 상대가 될 순 없을 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무조건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었고, 지금 취하는 전략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이렇게 한번 해보죠. 차분히 생각해볼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순위를 이렇게 두고 움직여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네, 형님. 그럼 다시 흩…….”
“아악! 살려줘!”
“엇!”
그렇게 잠시 짧은 의논을 마치고 각자 위치로 흩어지려는데, 갑자기 투 뮤탄이 있는 방향에서 비명이 들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두 개의 쇠사슬.
그 끝에 묶여있는 축볼 누님의 로파티엘로부터 흘러나온 소리였다.
“저거 진짜 위험한 기술이에요! 당장 구해드려야……!”
라챤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즉각 공중에 떠올랐다.
하지만 조금은 늦은 출발이었다.
아직 소환시간이 남아있던 티에스 나이츠 5기가, 꽁꽁 묶여버린 로파티엘에게 다가가 이미 집중 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던 것이다.
번쩍!
그렇게 누님의 타이탄은…… 내가 반도 날아가기 전에 역소환됐다.
“브, 블링크!”
사라진 타이탄에서 튀어나온 축볼 누님.
마법사답게 재빨리 고유 이동기를 사용해 타이탄들의 후속타에선 벗어났으나.
[포획!]
“까악!”
어느샌가 인근까지 다가온 다리우스의 공격에 적중되어 적진 한가운데로 빨려들 듯 붙잡혀 들어갔다.
놈이 타고 있던 새로운 소환물, ‘고르곤’의 빠른 기동력을 활용한 불시의 공격이었다.
“누나!”
뒤에서 소리치는 현중이.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누님께 쏟아지는 다리우스 패거리의 스턴 연계.
그리고는 곧, 투 뮤탄을 비롯한 놈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금세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강하잖아!’
나이트급 타이탄이라 다소 안심하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설마 보스 몹이 저런 기술을 사용하고, 놈들의 타이탄이 그걸 연계기로 활용할 줄이야.
축빙 형님에 이어 허무하게 축볼 누님까지 죽는 것까지 보게 되자, 순간 후회가 치밀어올랐다.
내가 괜한 욕심에 이곳에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지금처럼 디바인 무기를 드랍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축복받은파볼: 드로야, 주웠어?]
하지만 그 순간.
누님은 사라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길드 채팅창에 글을 하나 올렸다.
[산드로: 네? 뭐요?]
[축복받은파볼: 내가 끌려가기 직전에 떨군 보옥 말야!]
‘응?’
한순간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님이 블링크로 도착했던 자리.
채찍에 끌려가기 바로 직전, 거기에 로파티엘을 던져 놓았다는 사실을!
“귀신 발걸음!”
나는 곧바로 최대한 빠르게 날아가, 그곳에 고스란히 놓여있던 누님의 무기를 자연스럽게 회수했다.
정말 천운이 따랐는지, 태성 놈들의 시선이 전부 딸려간 축볼 누님을 죽이는 데만 집중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라스트챤스: 나이스 캐치!]
[축복받은얼굴: 와, 누나! 대박이에요! 어떻게 그 순간에 템부터 빼돌릴 생각을 다 했어요!]
이번만큼은 나도 누님의 기지에 감탄하고 말았다.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 닥친다 해도, 본인의 무기를 벗고 땅에 떨군다는 건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일.
그것도 디바인이었기에,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축복받은파볼: 주웠어?]
[산드로: 네!]
[축복받은파볼: 와! 정말 다행이다! 사실 항상 죽으면 로파티엘을 무조건 드랍한다는 것 땜에 마음 졸이면서 게임했거든. 그래서 그런 거였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아니었어..]
누님이 죽으면서 투 뮤탄의 어그로는 다시 나로 변경됐다.
그래서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읽게 된 몇 줄의 글은, 내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부담을 갖고 지내셨을 줄이야…….’
항상 밝은 미소와 유쾌한 말투였기에 모르고 있었다.
한데 그건 티가 안 나도록 누님이 노력해왔던 것.
우리 길드원이라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전부 힘들게 태성과 전쟁을 치르고 있단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축복받은파볼: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적의 수중에 넘어가면 안 되잖아. 만약 그걸 홍당무가 차게 되면.... 엄청 강하고 까다로운 적이 될 테니까 말야!]
‘하긴 그렇긴 하지. 다른 장비도 그렇지만, 디바인 무기의 위력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까.’
어떻게든 적의 수중에 디바인 템이 넘어가지 않도록 선점에 최선을 다하고 생존을 최우선으로 게임해 온 이유.
그건 누님이 말한 부분이 컸다.
날개 부츠만 봐도, 신발 하나 바꿨다고 이렇게나 급 강해진 걸 보면 무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라?”
그리고 그 생각이 든 순간, 내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결론이 도출됐다.
어렵지만 투 뮤탄을 먼저 정리하고 놈을 상대해야 할지, 아니면 뒤는 생각하지 않고 다리우스부터 노려야 할지에 대한 답이.
[산드로: 다들 어그로 대상을 제외하곤 거리를 유지한 채 뭉쳐 계세요! 잠시 후 투 뮤탄은 무시하고, 올인하겠습니다.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걸 걸 테니까 준비해 주세요!]
[축복받은얼굴: 뭐? 정말? 보스 몹을 무시하면 어떡하려고!]
[산드로: 내 손에 마신검만 들리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8성이던 스킬들이 전부 10성 스킬로 변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