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더티 플레이 (3)
계획은 따로 세울 것 없이 간단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포탈을 열자마자 닫는다.
그리고 온종일 은신 상태로 요정계에 머물며 다리우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10성 은신은 정말 은신의 끝이라 말해도 될 만큼 끝내주니까.’
마신검을 얻은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많은 걸 알아낸 건 아니었지만…….
10성 은신은 단순히 쿨타임이 줄어들고 이속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유저라면 당연히 누구도 나를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은신 감지가 가능했던 몬스터들 또한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보스 몹 같은 상위 등급 몬스터는 다르리라 생각됐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일반 감지 몹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10성 은신에 붙어 있는 ‘MAX’ 등급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그럼 시간도 이른 편이니까 당장 들어가 볼까? 어차피 혼자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타연에 몰두하는 태성 길드원이라 해도 지금은 새벽 5시도 안 된 이른 시각.
정말 재수 없으면 포탈이 다리우스가 들어간 곳 근처에 열릴 수도 있으니까 지금 시도해 보는 편이 좋아 보였다.
[요정계 이동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나는 처음 얻은 것과 헷갈리지 않게 두 번째 이동석을 잘 터치한 다음, 그냥 서 있던 곳에 포탈을 설치했다.
그리고 은신을 쓴 다음, 오픈된 푸른 포탈 안으로 주저 없이 들어갔다.
[요정계의 중심부 크리스탈 캐슬에 도착했습니다.]
-꺄르르.
-로룰루루.
하늘하늘 흩날리는 산들바람.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의 허밍음과 휘슬.
순간 지상낙원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답고 포근한 이곳이었지만 단 한 가지가 부족했다.
바로 햇볕.
하늘을 둘러싼 옅은 푸른색의 장막 때문에, 원래는 쨍해야 할 색들이 어딘가 조금은 빛바래 보였다.
‘이곳이 전에 봤던 결계의 안쪽인 건가?’
내가 도착한 곳은 어느 도시의 광장과도 같은 곳.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지만, 다행히 유저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포탈을 해제하시겠습니까? 해제 시, 재활성화까지는 4시간의 대기시간이 필요합니다.]
[YES]
일단 방금 나온 포탈을 터치해, 포탈부터 비활성화시켰다.
넘어온 곳을 통해서만 되돌아갈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오픈된 공간에서 태성 놈들을 상대하는 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조금도 겁나지 않았으니까.
타탓 탓!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높아 보이는 구조물을 골라 올라갔다.
삐죽삐죽 세로로 높게 솟은 지붕의 건물들.
그 중간 중간에는 열린 창문들이 빼곡히 차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페어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눈에 띄는 것만 해도 수천은 그냥 넘어 보일 듯 많은 수.
그마저도 크기와 날개 색이 제각각이라서, 도시는 이제껏 본 그 어느 마을보다 신비로우면서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걸 합친다 해도, 내 뒤편에 있는 거대한 성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저게 크리스탈 캐슬이란 건가? 완전 유리로 만든 성 같구나……!’
수중왕국의 성이 거대 갑각류의 껍질로 만들어져 해저 건물의 느낌을 인상 깊게 전달했다면, 이곳은 말 그대로 꿈같이 몽환적인 성이었다.
깎아지는 수정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성은 온통 투명한 재질의 벽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통 사각 면으로 각진 외벽은 빛의 굴절로 화려하게 반짝였는데, 성의 뒤로는 두 쌍의 무지개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이동 불가 지역으로 진입하여 주기적인 데미지를 입습니다.]
“큭!”
그 황홀한 풍경에 홀려 당장 밑으로 내려가 크리스탈 캐슬에 다가가 봤으나, 광장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이동 불가 데미지가 들어왔다.
‘그냥 감상용으로 미리 만들어 둔 곳이니…… 딴 데 한눈팔지 말라 이거지?’
이젠 나도 타연의 최선두를 탐험하고 있는 몸인 만큼, 처음 보는 것들이라도 척하면 척 각이 나왔다.
내 생각에 타연 존재하는 주요 오픈 필드는 두 대륙이 있는 중간계, 그리고 천계와 마계, 이렇게 3개 차원이었다.
그 외에는 스토리상 크게 만들 필요가 없이 다소 컴팩트하게 만들어진 곳들이었다.
그러니 이곳 요정계에 와보니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여긴 넓어봤자 시공의 틈새 정도 수준밖에 안 될 크기라는 걸.
분명 뭔가 중요한 스토리가 펼쳐질 곳일 것 같았지만, 그건 향후 펼쳐질 내용들과 연관된 것일 터.
아직은 이 크리스탈 캐슬에 들어갈 일도,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일단 여기는 제쳐두고 맵 탐사부터 좀 해볼까?’
어쨌든 지금 이곳에 유저가 오게 된 건 마계와 연관된 퀘스트 때문.
7신기로 비롯된 퀘스트였지만 어쩌면 메인 스토리와 연관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반대편을 향해 걸어나갔다.
-오롤루 루루!
듣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노랫소리에, 날아다니는 페어리 NPC에게 말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페어리들은 내 은신을 감지해내지 못했고, 당장 목적도 있었기에 참고 도시의 끝으로 이동했다.
쑤욱.
그렇게 잠시, 크지 않은 도시라 나는 금세 푸른 장막에 다다랐고 수면을 통과하듯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페어리 퀸의 공중 정원에서 타임어택 인던을 깨며 한차례 경험했던 곳.
무수한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요정들의 푸르른 언덕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인던과 거의 틀린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 보이네. 요정계를 수호하는 장막 밖은, 전부 이렇게 생긴 건가?’
다른 점이라곤 하나.
들판 너머로 침공 중인 마왕군과 싸우는 페어리들이 이곳에선 서큐버스 대신 다른 존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로 사족보행의 야수와 같은 생김새들.
내게도 익숙한 존재인 고르곤을 비롯한 마계의 괴수들이었다.
‘여긴 괴수 군단이 쳐들어왔나 보구나.’
퀘스트는 저 마계 졸개들의 수장인 사령관과 대면해보는 것.
한눈에 봐도 페어리와 전투 중인 최전선보다는 훨씬 안쪽에 있을 것으로 짐작됐다.
아무튼 뭐가 됐건, 그건 지금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가롭게 퀘스트나 하려고 굳이 새벽부터 이곳에 혼자 온 건 아니었으니까.
사그락사그락.
당당이 같은 괴물은 감지 스킬 하나도 없이 소리만으로도 은신을 찾아낼 수 있는 터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퍼펑!
“파이어 볼!”
“회전 베기!”
그리고 넓은 들판의 언덕을 두어 개 넘었을 때쯤, 마침내 귀에 익은 효과음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여기가 맞았구나! 찾았어!’
이곳에서 처음 마주하는 유저의 목소리.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한편, 혹여나 광역 스킬에 휩쓸려 은신이라도 벗겨질까 봐 소리가 들린 곳을 빙 돌아서 다가갔다.
“계속 날려! 다음 광역기!”
“잠만! 곧 쿨타임 찬다!”
눈에 들어온 건 4인으로 이루어진 사냥 파티.
네임드 유저들은 아니었지만, 공성전과 필드전에서 오다가다 한두 번쯤 본 적 있는 아이디들이었다.
‘뭐야 이 자식들? 뭘 잡고 있는 건데?’
하지만 나로선 놀랄 수밖에…… 아니, 놀라다 못해 순간 벙찔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아군이 된 듯한 모습에 혹시나 했지만 설마 설마 했던 행동.
놈들은 전투 중인 마계의 괴수 군단 틈에 낀 채로, 맞상대 중인 페어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끼이익!”
“루룰루-끼!”
픽, 픽!
연이은 광역 공격에 하나둘씩 사라지는 페어리들.
그중에는 템을 드랍하는 페어리도 있었는지, 파티 중에는 분주하게 템을 회수하는 놈도 따로 배정되어 있었다.
‘몬스터 간의 전투에서는 템이 드랍되지 않는데……. 그럼 페어리 사냥이 버그가 아니라 정상 전투라는 거야?’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봤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무언가 터무니없는 상황은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짭짤하구나 짭짤해!”
“경험치 대박이긴 하지? 역시 힘들어도 1군에 들어오길 잘했다. 생명의 숲이나 천계 따위보다 이곳 요정계가 훨씬 더 레벨업하기 편하고 좋잖아!”
“맞아 맞아. 후에 페널티가 걱정되긴 하지만 당장 피닉스 놈들이랑 싸우려면 전직부터 하는 게 맞잖아? 간부들 보니까 이틀에 1레벨 업씩은 하던데, 오늘 우리도 기록 한번 세워보자. 지금부터 10시간 논스톱으로 사냥해 보자고!”
“그게 가능하면 사람이냐? 괜히 랭커들 따라하다 몸살 나지 말고 적당히 쉬엄쉬엄하자. 그래도 충분히 빠른 레벨업이야.”
레벨업하려고 새벽부터 접속한 건 칭찬해줄 만했지만, 고작 10시간 논스톱 사냥이 기록이라니?
부심 부리려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사냥했다 하면 최소한 13시간 이상, 많게는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사냥만 했던 적도 있었다.
어쨌든 이 파티를 잠시 관찰해본 결과, 태성의 정예들이 어떻게 우리의 레벨업 속도를 비슷하게나마 따라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괴수 군단과 함께 전투를 벌이다 보니 탱킹에 대한 부담이 적었고.
다소 과감하게 사냥하더라도 위험하면 마계 몹들 사이로 합류하면 되니 죽을 일도 없었다.
또한 전장의 페어리들은 없어지면 금세 채워져 마계 몹들과의 전투에 합류해오다 보니, 리스폰 속도도 말도 안 되게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놈들도 대부분 몰이 사냥 식으로 다수의 페어리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이런 꼼수를 부대 단위로 부릴 수 있었던 건?’
정말 타연은 대단한 게임임이 분명했다.
통합 랭킹 1위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퍼스트 클리어 유저인 나로서도, 전혀 짐작도 못해 본 플레이 방식이 존재한다니!
인간의 적인 마계와 빌붙고, 우리의 아군이나 다름없는 페어리들을 사냥하는 모습.
이런 괴상한 플레이는 상상도 해본 적 없기에 새삼 다리우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연에서 내 상대가 될 만한 놈은 역시 그 자식밖에 없다고.
여하튼 이곳을 뒤로하고 필드를 조금 더 누벼봤다.
첫 파티가 태성 놈들의 최외곽이었는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많은 태성 길드원들을 마주칠 수 있었고.
그중에서는 홍당무와 일도양단을 비롯한 몇몇 네임드 유저도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나 새벽같이 일어나 열심히 사냥 중인 모습이었다.
‘근데 정작 넌 어딨냐……?’
하지만 그중에 다리우스의 모습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놈들의 규모는 얼추 150명 정도로 파악됐다.
상급 길드의 정원이 500명인 걸 감안하면, 태성 1군 길드의 절반 정도는 이곳에 와있다고 간주해도 무방.
1군 내에서도 히든캬드와 같이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저는 초대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1시간, 그리고 2시간, 3시간.
어느덧 오전을 지나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다리우스는 접속하지 않았다.
우리 길드원들도 전원 접속한 지 오래됐지만, 도무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리우스.
하지만 이곳 말고 놈이 갈 만한 곳도 딱히 없었기에, 계속 은신을 재시전하며 태성과 조금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서 대기했다.
(나: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중인데?)
(연우: 수중왕국 입구에서 다시 필드전이 벌어졌다고 해서 벨루타에 왔어요. 오빠는 계속 그 안에 계실 거예요?)
(나: 응. 놓칠 수 없는 기회잖아? 무조건 한 번은 솔킬을 시도해 보려고.)
(연우: 알겠어요. 그럼 조심하세요!)
핑, 휙!
기다림이 따분해 잠시 귓속말을 나누고 있던 그때.
고개를 돌려 갑자기 날아온 화살을 가까스로 피했다.
‘뭐, 뭐야? 은신이 벗겨졌…… 아닌데?’
황급히 몸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10성 은신이 유지 중인 상태.
유저는 물론이고 이곳의 어떠한 몬스터도 나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걸 확인했는데, 이렇게 정확한 헤드 샷이 날아오다니?
논타겟팅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적중당해 은신이 벗겨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올려다보니, 비스듬한 하늘 위 거대한 몬스터로부터 다시금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블랙 드레이크에 올라탄 타이탄만 한 크기의 몬스터.
<괴수 군단 사령관 제르몬>
퀘스트에서 언급했던 이곳 마왕군의 사령관.
심연에 잠식된 베르몬의 뒤를 이어 새롭게 괴수 군단장이 된 이곳의 보스 몹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