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더티 플레이 (4)
‘이런 제기랄!’
줄곧 사령관은 전장의 후방에 있을 거로 생각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놈은 고정형이 아닌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스타일.
그것도 심지어 드레이크를 타고 다니는 비행 타입의 몹이었다.
픽! 픽!
워낙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이라 첫 화살 이후로 피하는 건 크게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은신 해제만큼 곤란한 건 놈의 이상 행동.
태성 놈들의 눈에는 갑자기 보스 몹이 나타나 아무것도 없는 맨땅을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군단장 왜 저래?”
“그러게. 뭐 땜에 여기까지 나왔지?”
시야를 내려 지상을 보니, 안 그래도 막 사냥에 열중하던 태성 유저들도 이상한 듯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다리우스는 구경도 못 해봤는데 잠입을 들킬 순 없는 법.
서둘러 언덕 아래로 피해 화살 각을 좁히면서, 몹들이 없던 반대편 들판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괴수 군단장은 공중을 크게 선회하더니 계속해서 쫓아왔다.
픽! 픽!
각이 나올 때마다 쏘아지는 화살들.
하지만 이미 난 언덕을 내려와 건너편 유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상태.
나는 과감하게 램보를 소환하고 몬스터 라이딩까지 활성화시켜, 순식간에 전장에서 멀리 벗어났다.
“와! 어그로가 아직 안 풀렸네? 아니다. 놈은 태성과 한편이니까 어그로 끌릴 게 나밖에 없긴 하구나.”
끈질기게 추격하듯 따라온 제르몬.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태성 놈들은 따로 흩어지지 않고 일정 지역에서만 사냥했다.
그래서 다행히도, 놈의 이상 행동에도 불구하고 뒤쫓아온 태성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저나 뭐 이딴 보스 몹이 다 있지? 근데 보니까 바로 알겠네. 다리우스가 블랙 드레이크를 어디서 얻었는지!”
보스 몹만 만나면 끝나는 퀘스트의 난이도가 A급이길래, 나는 마계 병력을 뚫고 도달하기가 힘든 거로 생각했다.
한데 그건 착각이었다.
놈은 정말로,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기 참 힘든 놈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선행했을 다리우스는 힘들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페가수스 따위는 가까이도 다가가기 전에 격추되겠지만, 내겐 최강의 맷집을 자랑하는 펫이 있었으니까.
나는 램보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이동해, 결국 처음 내가 나왔던 크리스탈 캐슬을 보호하는 푸른 장막에 도착했다.
제르몬은 이때까지 연신 원거리 공격을 날리며 끈질기게 쫓아왔다.
아직 한 번도 공격받지 않아서 그런지, 화살 평타 공격만 해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훼라리 소환.”
키에엑-!
어쨌든 그것도 이젠 끝.
목적지에 도착한 난 곧바로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놈을 향해 날아올랐다.
푹! 푹!
“키엑! 키엑!”
역시나 훼라리의 커다란 덩치로는 공중에서 놈의 화살 공격을 제대로 피하기 어려웠고.
보스 몹답게 평타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일단 다가서는 걸 목표로 놈에게 접근하자.
『중간계의 인간이 요정계에는 어쩐 일이냐?』
제르몬이 돌연 공격을 멈추고 대사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됐구나! 이게 맞았어!’
순식간에 반 피 이하로 떨어진 훼라리.
하지만 레드 드레이크와 블랙 드레이크는 공중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휴전 상태로 돌입했다.
『그런가…… 아직 중간계에는 ‘수호자’들의 명맥이 남아있는 모양이군!』
“수호자?”
『여하튼 하찮은 인간이여…… 네가 들고 있는 건 옛 신들이 만든 무기 중 하나로구나……. 한때 베르투스 님의 앞길을 방해했던 귀찮은 물건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그리고 보스 몹이었던 녀석은, 어느새 얌전한 NPC라도 된 듯 차분하게 정보를 뱉어댔고.
그건 어디서도 듣기 힘든 고급 정보들이었기에, 나는 한 마디도 놓칠세라 최대한 집중해 경청했다.
『하지만 이제는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옛 신을 추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겠지……. 인간이여, 비록 종은 하찮기 이를 데 없지만 너는 다르구나. 특히 암흑신의 신기, ‘룬 제스베라’를 소유한 자라면 더욱이……. 그렇다면 자격은 충분하다!』
계속 거만한 멘트를 내뱉는 제르몬.
하지만 마지막 대사만큼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내 추측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영원토록 경배받을 위대한 베루투스 님은 능력 있는 자를 사랑한다. 그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간계의 존재라 해도 예외는 아니지. 너의 그 훌륭한 능력을 온전히 너를 위해서 사용해볼 생각은 없느냐? 이따위 하찮은 요정계 따위는 물론이고, 중간계의 지배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냔 말이다.』
띠링!
[‘어둠의 위협: 연계 퀘스트’가 ‘어둠의 유혹: 선택 퀘스트’로 변환되었습니다.]
돌연 퀘스트 완료음과 함께 자동으로 바뀐 퀘스트창.
난 곧바로 새로워진 설명을 읽었고, 요 며칠 다리우스와 태성에 품고 있던 의문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다.
[어둠의 유혹: 선택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F
* 괴수 군단장 제르몬의 제안을 받아 마왕군에 합류하라
* 퀘스트 클리어 조건: 제르몬의 제안 수락
* 퀘스트 클리어 보상: 평판에 따른 차등 보상(예상 보상: 블랙 드레이크의 알, 괴수 군단 부군단장 직책)
‘이런 루트가 존재할 줄이야? 마왕군 합류라니!’
선(善)과 악(惡)을 선택하거나, 게임 속 특정 진영을 택하는 등의 게임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타연에서는 길드 다툼 및 국가 간 쟁투를 제외하고는 그런 시스템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유도’를 중시한다고 밝혔던 개발자들.
그 의도가 반영되어 굳이 그런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왔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2.0 확장팩을 통해 천계와 마계가 등장한 이후, 어느새 타연에는 ‘진영’ 선택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이미 업데이트되어 있었던 것.
지금 나는 그중 첫 번째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고, 이미 다리우스는 나보다 앞서 이 퀘스트를 수락한 것이 틀림없었다.
“…….”
위협적인 외형과 포즈지만 묵묵부답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제르몬.
놈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자유도 측면에서 볼 때는 이게 더 흥미로운 구도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인간이 마왕군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유저 입장에서는 더 재밌을 수밖에 없잖아?’
물론 다리우스가 단순히 재미로 선택한 건 아닐 것이다.
한때 ‘영광의 기사’라고도 불렸던 놈이 비록 게임이라지만 마왕군이 되는 걸 반겼을 리 만무.
하지만 천계에 입장조차 못 하는 상황에서 놈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결국 반전을 꾀하고자 승낙했던 게 분명했다.
거부해봤자 돌아올 이득은 없었지만, 마왕군에 합류하면 주어질 보상이 너무 탐스러워 보였을 테니까!
‘평판에 따른 차등 대우라면 한 나라의 국왕이란 게 반영된 건가? 그러면 놈도 블랙 드레이크와 부군단장을 제시받았을 거고……. 아무튼 부군단장이 되면 부하들을 마왕군에 영입하거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모양이야.’
비록 내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했지만 왠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여하튼 나로선 마왕군에 합류해봤자 얻을 게 거의 없었다.
이미 악마 사냥꾼이란 직업을 택했는데 굳이 같은 편이 될 이유가 없었고, 지금도 독점하듯 차지하고 있는 좋은 사냥터들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다리우스 놈이랑 ‘같은’ 진영이 되는 것만큼은 절대 사절이었다.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퀘스트 ‘어둠의 위협: 연계 퀘스트’를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난 주저 없이 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새 퀘스트로 변환된 기존의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다른 인간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멍청하기 짝에 없는 놈이었군.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그리고 거대 장궁을 꺼내든 괴수 군단장.
놈이 다시금 공격을 재개했지만, 이미 난 주저 없이 몸을 뒤로 뺀 상태였다.
피픽! 픽!
적중되는 화살.
하지만 나를 태운 훼라리는 곧바로 푸른 장막 쪽을 향했고.
픽! 픽! 텅!
계속해서 적중되던 화살은 어느 순간 반사음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놈의 공격이 우리가 통과한 크리스탈 캐슬 도시의 결계에 막혀버린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맞아줬으니까 인제 그만 가라.”
분명 아직 내게 어그로가 남아있는 모양이었지만, 놈은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렇게 10여 초 정도 푸른 장막 밖에서 이곳을 노려보던 놈은, 결국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 있었던 곳을 향해 유유히 되돌아갔다.
‘다리우스 자식…… 어쩐지 전직도 했는데 너무 쉽게 죽는다 싶었다.’
내가 놈의 입장이었더라도, 지금 이런 퀘스트가 주어졌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세력은 앞설지 몰라도, 나와의 승부를 이길만한 타개책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놈의 섣부른 실수였다.
“마왕군에 합류해 몹들의 도움을 얻어보겠다고? 하하, 이 멍청한 자식!”
하지만 그 진영 선택 때문에 놈은 오히려 내게 더욱 큰 데미지를 입었던 게 분명했다.
내 신검에는 ‘악마’ 계열에 속한 것들에게 원래 공격력만큼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는 옵션이 달려있으니까!
여하튼 군단장이 돌아갔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결계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다리우스를 잡기 위해 온 곳인 만큼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귀환할 필요는 없었다.
‘제르몬의 어그로만 조심하면서 계속 죽쳐보자.’
하늘 위에서 나타나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거지, 알게 된 이상 이제는 문제없었다.
그렇게 은신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태성 놈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도중.
갑자기 길드 채팅창에 이상한 말이 올라왔다.
[라스트챤스: 다들 들으셨어요? 방금 다리우스가 썼다는 글이요?]
[축복받은무빙: 아니? 무슨 글? 놈이 커뮤니티에 뭐 올린 거 있어?]
[라스트챤스: 그 미친 자식이 결국 또 사고 쳤어요. 엄청 이미지 관리하던 놈이라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와! 완전 개 같은 놈이네요!]
[축복받은얼굴: 뭔데 그래? 라챤아, 얼른 공유 좀 해봐!]
오전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던 다리우스의 행방.
그건 타연이 아닌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라스트챤스: 놈이 또 언플을 시작했어요. 무제한 척살을 하겠다고!]
[산드로: 척살? 이미 놈은 우리 피닉스 라인과 무제한 필드전을 벌이고 있잖아. 근데 무슨 척살이 사고야?]
[라스트챤스: 형님 그 수준이 아니에요. 라인을 비롯한 일반 유저들.... 특히 흑풍단만큼은 보이는 족족 죽여버리겠대요. 지가 무슨 게임 속에서 선택받았다나 뭐라나? 시스템상 정당하다는 이상한 헛소리와 함께요!]
[축복받은파볼: 뭐? 그 개자식! 우리 세인트한테 했던 짓을 다시 또 하겠단 소리야? 그것도 수십 명이 아닌 수천 명을 대상으로?]
라챤이의 말에 곧바로 흥분하는 길드원들.
‘정당? 그리고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내 눈엔 유독 꺼림칙한 단어가 들어왔고, 난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서둘러 로그아웃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올타에 들어가 놈이 올렸다는 글을 검색해 찾아봤다.
-[공지] 태성 라인이 흑풍단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단 10분 전에 올라온 글.
그건 벌써 핫이슈 게시글로 선정되어 수많은 유저들에게 노출된 상태였고, 댓글도 벌써 천 개가 넘게 달려있었다.
“이 개자식! 진짜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구나! 제대로 붙기엔 힘드니까 이딴 더러운 플레이를 벌이겠다니!”
그리고 나는 놈이 무슨 생각을 갖고 벌인 일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근 지속된 산드로의 테러로 인해, 저희는 현재 정상적인 플레이가 무척 힘든 상황입니다.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일방적 PK 행위는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습니다. 그가 자신의 원한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저희측 유저를 죽이는 건, 사실 전부 다 ‘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우리 태성 라인도 똑같이 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앞으로 저희 측 라인은 피닉스 라인에 도움을 주었던 일반 유저들, 특히 ‘흑풍단’이라 불리는 세력을 집중 공격하겠습니다. 현재 저희는 일반 유저를 죽이더라도 머더러가 되지 않는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분명 시스템상으로 허용되는 정당한 플레이죠. 하지만 만약 피닉스 라인이 항복한다면... 그리고 산드로가 제 신검을 돌려준다면 멈출 생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타연이 끝나는 그 날까지, 저희 태성 라인은 흑풍단과의 전투를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흑풍단은 쪽수가 많고 대부분 원거리 딜러들이기에 큰 도움이 됐던 거지, 대부분은 유저 간의 소규모 전투를 감당하기에 약한 편이다.
한데 그런 그들을 전 병력을 총동원해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놈.
이게 가능한 건 놈이 밝힌 대로 선 PK를 해도 머더러가 되지 않는다는 시스템 때문.
그건 당연히, 이번에 놈이 획득한 ‘마계’ 진영이라는 특수 상태로 인한 게 분명했다.
설정상 중간계의 인간은…… 마왕군들에게 ‘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