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타개책 (2)
어렴풋이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다리우스가 죽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
좌절과 상실감에 빠져 있어도 모자랄 놈이, 이렇게나 빨리 결단을 내리고 움직인다는 것이.
“형님 말씀대로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만약 운영자가 도와줬다면 이렇게 과감할 만도 하죠!”
그동안 난 마음속에 커다란 돌 하나를 얹어둔 채로 타연을 해왔다.
언제 어디서 게임 속 시스템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단 한 번만 죽어도 비가역적인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로선, 그 누군가인 ‘운영자’가 다리우스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 잘났던 다리우스조차도…… 고작 두 번의 죽음만으로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다리우스를 처치하게 되니, 감춰져 있던 운영자의 존재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지금의 운영자는 게임에 개입할 수 없는 어떤 제약 사항이 생긴 게 확실해 보인다.”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어제 다리우스가 마신검을 드랍하도록 놔뒀을 리 없었을 테니까요?”
“맞다. 여하튼 그래서 다리우스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 것 같다. 예전과 같이 직접 도와주기 어렵다면, 대신 간접적으로라도 도와달라고.”
“그건 바로 2.0 업데이트 이후 아직 풀리지 않은 콘텐츠에 관한 정보겠고요.”
“정확히 그거라고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그럴 확률이 높지. 혹은 여러 선택지를 들고 와서 정답을 물어봤을 수도 있고. 여하튼 그 덕에 놈은, 연이어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길 수 있었던 거야.”
사실 놈의 플레이가 남들과는 좀 다르다는 걸 종종 느껴왔다.
시공의 틈새, 그리고 이번 요정계…….
평범한 유저들이라면 한 번도 찾기 힘든 히든 필드를 몇 번이나 최초로 찾아냈다.
그러면서도 금지 개방과 같이 전체 알림이 뜨는 곳은 귀신같이 피해서, 선점으로 인한 독식 효과는 오롯이 전부 누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더 잘된 일일 수도 있겠네요.”
“뭐?”
이스터에그(easter egg).
개발자들이 게임 속에 재미로 숨겨놓는다는 특별 요소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찾아내기 힘들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유저들이 고생 끝에 알아낼 만한 정보를 다리우스에게만 알려줬다면?
스토리상 너무 빠른 발견과 진행이 잦아졌던 이유가,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면……?
“그동안 증거 영상을 찍을 수 없는 타연에서, 운영자의 개입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거든요? 사실 현장을 적발하더라도 저희가 유일한 목격자라면 제재할 방법도 마땅찮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조금씩 흔적을 드러내고 있잖아요. 실시간 개입 증거는 절대 잡아낼 수 없겠지만, 정보 유출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정황 증거가 쌓이다 보면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될 거예요. 어차피 그 유출자는…… 이오네스나 테오시스. 둘 중 한 명일 가능성이 99%니까요.”
용의자가 수없이 많다면 정황 증거 따위로 범인을 특정 지을 순 없다.
한데 지금 같은 경우는 용의자가 고작 단둘에 불과했다.
조금씩 정황 증거를 모으고 난 후, 둘의 행적을 조사해본다면?
분명 조금이라도 더 의심되는 누군가가 간추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땐 불법 정보 유출을 토대로 타연에서 영원히 퇴출시킬 수 있었다.
“하긴…… 어쩌면 이건 네 말대로 증거를 만드는 실수일 수도 있겠구나. 지금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다리우스를 계속 궁지에 몰아넣다 보면 더 큰 흔적을 남길 수도 있겠지.”
“네. 그러면 일단 그렇게 정리하고, 전 얼른 나가봐야겠네요.”
“어디에? 필드로?”
“네. 그렇다고 놈들의 뜻대로 놔둘 수만은 없잖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절 몰아세우기 위해 흑풍단뿐만 아니라 무고한 일반 유저들까지 무차별 PK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내 성격상, 놈들의 이번 전략은 정말이지 환멸이 들 정도로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태성 길드, 그리고 태성 라인.
오늘 시작된 놈들의 행보를 보고 나니, 하루빨리 해체시켜야겠단 기존의 생각이 한층 더 강해졌다.
* * *
[당근당근단검: 드로 형, 어디 계세요?]
[산드로: 레던 들렀다가 지금 막 번스타인 성에 왔는데, 왜?]
[당근당근단검: 방금 다시 또 공틈을 한 번 싹 쓸고 갔대요. 이 자식들 이젠 요령이 생겼는지 한두 개 파티로는 안 다니네요. 무조건 100명 단위 이상으로 빠르게 치고 빠지나 봐요.]
태성 놈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드를 돌아다닌 지 벌써 3시간.
하지만 내 생각만큼 놈들을 소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패턴이 점점 익숙해졌는지, 더욱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변한 것이다.
마치 나 혼자 히트 앤 런 작전을 벌였던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100명 단위의 게릴라 부대들이 필드를 종횡무진 휩쓸었고.
라인끼리는 같은 지역 내 소규모 네트워크라도 구축했는지, 내가 떴다 하면 곧바로 그 지역에 있던 놈들이 귀환해 버려 허탕 치기 일쑤가 됐다.
[라스트챤스: 이 자식들 미쳤네요. 평판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나 봐요. 좀 전에는 태초의 섬에서도 학살을 벌였다는데요? 이대로 태성의 이미지가 나락에 처박혀도 상관없다는 건가?]
[축복받은얼굴: 뭐? 태초의 섬? 그게 정말이야?]
[라스트챤스: 네, 진짜예요. 무슨 아이디가 불순하다나 뭐다나? 그딴 이유로 죽여서, 지금 커뮤에서 욕 엄청 처먹고 있어요!]
[축복받은얼굴: 진짜 단체로 미쳤구나? 이제 막 게임 시작하는 초보존에 무슨 흑풍단이 껴 있다고 죽여!]
한편, 점점 놈들의 행위는 도를 지나쳐갔다.
[연우: 오빠! 동시다발적으로 PK를 하니 도무지 막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죽여도 머더러가 되지 않으니 선공을 칠 유저는 저희 라인밖에 없고요!]
[축복받은무빙: 정확히 말하면 선공을 칠 수 없는 건 아니더라. 마계 진영 유저는 머더러 표시가 뜨지 않을 뿐이지, 먼저 쳐서 죽이더라도 머더러가 되질 않아. 근데 이거 패치할 사항 아닌가? 유저들끼리 구별 가능한 방법 정도는 당연히 마련해 뒀어야지!]
그 와중에 몇 가지 정보들도 밝혀졌다.
그중 가장 심각한 건 다른 게임들에선 당연히 존재하는 ‘진영 구별’ 기능.
마계 진영을 택해 중간계 ‘인간’으로 분류되는 유저를 선공해도 페널티가 없다면, 응당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존재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미친 일루전 당장 패치 안 하냐! 최소한 유저가 마왕군 소속인지 구분은 가능해야 할 거 아냐! 게임 이렇게 대충 만들 거면 다른 게임은 어떻게 했는지 복붙이라도 하든가!
이렇게 된 상황이다 보니 다들 필드에 나갈 리 만무.
일반 유저들은 안전지대인 각 지역 마을 광장에 모여, 다들 대규모 시위를 하듯 게임사를 규탄하는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일루전에선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즉시 긴급 패치에 들어갔어. 근데 지금 이 상태를 방치한다는 건…… 이게 버그나 잘못된 업데이트는 아니란 뜻이겠지. 애초에 그랬다면 다리우스에게 이런 전략을 쓰라고 코칭을 했을 리도 없고 말야.’
여하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공간이동술사 앞도 유저들로 가득해 소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씨앙! 타연 갓겜이라고 했던 거 취소다 취소! 뭐 이딴 망겜이 다 있어!”
“아 몰라 몰라! 나 보름간 인던 돌아서 먹은 6 테반 떨궜어. 이거 보상 안 해주면 일루전 본사 찾아간다!”
은신을 쓴 채 인파를 뚫는 도중에도, 피해자들의 불만이 들려왔다.
“하! 고작 레어급 6테반? 난 반년간 모은 거 다 털어서 산 피같은 4강검을 드랍했는데? 태성 이 개자식들, 내가 다 죽여버리고 만다!”
“그게 태성만의 잘못이겠어요? 지금 너희가 당한 걸 태성은 산드로한테 계속 당하고 있었는데요?”
“그거야 지들끼리 전쟁하다가 벌어진 일이고! 그 불똥이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한테 튀냐고!”
그리고 다리우스의 더러운 의도는 조금씩 먹히고 있었다.
결국엔 나를 탓하는 유저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당신이 흑풍단이 아니란 보장도 없잖아요? 전 태성 라인과 세 번이나 마주쳤지만, 공격 안 하던데요?”
“그거야말로 네가 태성 라인인 탓은 아니고?”
“믿기 싫음 말든가요. 아무튼 태성도 잘못이지만, 이렇게 상황을 몰고 온 산드로도 잘한 건 없다고 봐요.”
“맞아! 다리우스도 항복하면 멈춘다고 했잖아! 유저들이 이렇게 피해막심인데, 그깟 항복 하나 안 하는 거 보면 산드로도 양아치 새끼인 건 마찬가지지!”
“항복 안 하면 양아치임? 졸라 편한 사고방식이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유저 간의 말다툼 소리.
뭐가 됐건 간에 하나만큼은 대성공이 분명했다.
바로 유저 간 갈라치기.
공격이 시작된 지 고작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필드에서 마주치는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판사판이다 이건가?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본인 피해에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유저들 속성을 이용해서?’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점차 예상할 수 있었다.
당장은 태성을 향한 원성만 들리겠지만 이게 일주일, 혹은 한 달간 이어지게 된다면?
나와 우리 길드뿐만 아니라 피닉스 라인의 근간을 흔들 만큼, 거대한 안티 세력이 조성될지도 몰랐다.
(카이저: 드로야, 잠시만 나한테 와볼래? 함께 이야기 좀 할 게 있다.)
그러던 중, 새벽에 뵀던 카이저 형님이 나를 찾았다.
은신 상태로 힘겹게 공간이동술사에 도착한 나는, 목적지를 바꿔 형님에게 이동했다.
* * *
“죄송해요 형님. 계속 기다리고 계셨죠? 갑자기 일이 터져서 깜빡했네요.”
“응? 아, 요정계 이동을 말하는 거냐? 지금 상황에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냐?”
“네?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 아니세요?”
새벽에 함께 이동석을 찾아낸 카이저 형님께, 나는 다리우스를 솔킬할 때까지만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한데 이젠 요정계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다리우스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으니 양보해 드릴 생각이었다.
“그 정도야 귓속말로 하면 되는데 형이 굳이 널 불렀겠냐? 지금 머리가 복잡하지? 갑자기 다리우스가 이딴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올지는 생각 못 해서?”
“맞아요 형님. 아무리 놈을 이해하려고 해봐도 놈은 태생부터가 저와 다른 놈인가 봐요. 저라면 아무리 빡치고 궁지에 몰려도 이딴 발상은 하지도 못하고 차마 시도도 못 할 텐데요.”
“세상일이 전부 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놈인 거지. 남을 배려하고 매너 있던 행동들도, 사실은 지 이미지를 생각해서 부렸던 위선인 거고.”
“그런 놈이 한 나라의 국왕이자 타연 최대 세력의 수장이라는 게 진짜 비극이네요. 아무리 돈이 좋다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놈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도,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안 되고요.”
“돈이 되니까.”
허심탄회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던 중.
카이저 형님은 지옥불 형님과는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네? 놈이 돈을 그렇게나 많이 뿌린다고요? 얼마나요?”
“그게 아니라 PK를 통해 아이템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됐잖아. 내 생각이지만…… 아마 곧 있으면 태성 라인에 가입하고자 하는 유저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거다.”
“그게 무슨……? 지금 엄청나게 욕을 처먹고 있는데, 놈들한테 가입하려고 할거라고요?”
“그래. 아무리 드랍률이 낮다 해도 유저에게서 드랍되는 템은 최소 레어급 이상에다 강화도 되어 있지. 거기다 보스 몹처럼 리스폰 경쟁할 필요 없고 킬 난이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다. 그런데 아무리 죽여도 머더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평소 PK에 고팠던 유저들에게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건이 또 있을까?”
타연 필드에서의 평화가 지켜지고 있는 이유.
그건 유저가 유저를 죽이면 머더러가 되고, 그러면 드랍률이 급등한 상태로 모든 유저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런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시스템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카이저 형님의 말처럼, 놈에게 편승하는 세력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다.
“점점 타연이 미쳐 돌아가겠네요. 정말 그렇게 된다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데요? 이대로면 패치를 안 할 수가 없겠어요.”
“유저는 몰라도 개발자가 그걸 예상 못 했을까? 하려면 당장 했겠지. 그걸 기대하면서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래서 그런데…… 어떻게 대응할지는 생각해봤냐?”
“일단 필드부터 돌아다니느라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놈이 이용하는 게 ‘마계’ 진영이다 보니, 찾아보면 ‘천계’에도 그에 대항할 시스템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요…….”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너무 막연해. 그보다 형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도전해볼 생각이 있냐?”
“정말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면야 당연히 형 말씀에 따라야죠!”
“새 질서가 생겼다면 또 다른 새 질서를 만들어 덮어버리면 되겠지. 이렇게 된 이상 태성 라인 놈들이 더는 필드에 얼씬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려라.”
“네? 제가요? 어떻게요……?”
그리고 카이저 형님은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드로야, 유저 최초로 황제가 되어라. 현 제국의 황제를 죽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