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요정계 정벌 (2)
너른 들판에 울려 퍼진 우렁찬 목소리.
그 메아리에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사냥 중이던 수십 명의 태성 놈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으휴, 저 화상!”
“방 빼라니…… 멘트 한 번 저렴하구나…….”
“냅둬요. 저놈도 맺힌 게 많았잖아요?”
왜 부끄러움은 항상 주변 사람들의 몫인 건지.
어쨌든 상관없었다.
이곳 또한 다른 차원인지라 귀환 주문서가 먹히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확인해 두었으니까.
“버닝…다! 여… …게 …거지!”
“…른 뭉쳐! …해! 끼들아!”
웅성웅성.
늑대를 발견한 양 떼 무리마냥 소란스러워진 놈들 진영.
그러더니 정예들답게 당황한 와중에도 금세 한군데로 뭉쳐 전투를 준비했다.
“현중아. 선두에 서라고 했지, 누가 적들 대비할 시간 주라고 했냐?”
“어때서 그래? 겁나?”
“미쳤냐? 내가 누군데? 나 산드로야!”
“준비 다 끝난 것 같으니 달리겠습니다. 다들 잘 따라오세요! 자, 사냥 시작!”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서는 현중이.
그 뒤를 축빙 형님과 축볼 누나가 발맞추어 뒤따랐다.
“와순이 소환!”
“페가수스 소환!”
그리고 각자의 펫들을 소환해 넓게 퍼지며 놈들을 둘러싸듯 접근했다.
“와아아! 다 죽어랏!”
“한 놈도 놓칠 수 없다!”
“형은 이날만 기다려왔어! 너희 태성 간부 조지는 날!”
가슴을 진탕시키는 모두의 외침.
선두에 선 현중이와 축빙 형님 무리는 금세 놈들과 맞부닥쳤고.
“신벌의 일격!”
“신성 번개!”
각자 새로 익힌 강력한 전직 스킬들을 사용하며 맞서는 태성의 정예를 공격했다.
‘다들 마음껏 푸세요.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그간 길드원들은 아직 내 기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는 해보지 못했다.
그저 공성전이나 소규모 필드전에서나 태성 놈들을 잡아봤을 뿐.
천계 통제나 캐슬 테러도 나 혼자 벌였던 일이라, 정작 함께 태성을 무너뜨리자고 모여놓고는 주야장천 레벨업만 해왔다.
물론 그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지만, 나만큼 쌓인 걸 시원하게 풀어본 기억이 없었을 터.
그래서인지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공격하는 모습에선 광기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포스 필드!”
“파이어 월!”
순식간에 뭉친 놈들의 숫자는 대략 백여 명.
물량 공세로 유명한 태성답지 않게 많진 않았지만, 전부 최정예들이었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티에스 나이츠 소환!”
번쩍! 번쩍!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겠단 듯이, 들판에 거대한 타이탄들이 무려 20기나 소환됐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붙은 지 얼마 됐다고 다들 뒷걸음질로 잠시 거리를 벌렸다.
[라스트챤스: 와! 저게 다 몇 대냐?]
[당근당근단검: 그러게? 태성 라인의 라이더들은 죄다 여기 모여있었나 본데?]
[축복받은무빙: 양아치 새끼들. 밑에 놈들한테는 온갖 더러운 일 다 시켜놓고 지들은 여기서 느긋하게 렙업하고 있었어? 이놈들만 진작 나섰어도 우리가 이렇게나 클 수 있었겠냐고?]
[산드로: 이게 잘나고 잘난 태성 간부들의 수준인 거죠. 아무튼 오히려 잘됐어요. 잡으면 먹을 것도 많겠네요!]
머더러 상태가 아니라면 드랍률이 낮다.
하지만 타이탄의 정수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걸 수차례 확인한바.
저 많은 타이탄 라이더를 전부 잡아버리면 최소 정수 3, 4개 이상 드랍할 게 확실해 보였다.
[태세 전환!]
[그림자 밟기!]
그래서 난 이번만큼은 길드원들에게 양보하고자 설렁설렁 임하던 자세를 고치고, 가장 근방에 있는 타이탄에게 붙었다.
그리곤 가차 없이 양손의 두 신검을 타이탄을 등 뒤로 쑤셔 넣었다.
“윽! 산드로?”
원래라면 대형 타입인 타이탄은 용살검이 더 효과적!
하지만 굳이 마신검과 바꿔 차진 않았다.
이유는 +2 스킬 레벨업 옵션 때문.
이도류 마스터리 같은 패시브 스킬 하나만 해도 8성일 때는 데미지 감소가 10%였는데, 맥스 단계가 되면서 오히려 +10% 추가로 변했다.
‘공격력 +20% 업적인 귀족 처단자 업적을 얻겠다고…… 제국의 수배까지 감수하기도 했었는데!’
물론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는 안 했겠지만, 여하튼 신검 두 자루를 함께 찼다는 게 얼마나 사기적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캉! 캉!
경쾌한 타이탄의 피격음과 함께 위급함을 느낀 라이더의 물음이 들려왔다.
“대체 여기엔 어떻게 온 거냐!”
“당신들도 와있는데 우리라고 못 올 이유는?”
“이 개 같은 버닝스타 놈들! 언제까지 우리 발목만 잡고 늘어질 거냐!”
“길드 해체할 때까지요?”
“이익! 닥쳐!”
몸빵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타이탄 라이더로부터 대화 시도가 있었지만 금방 단절됐다.
놈의 예상과는 다르게 훨씬 이른 시간 만에 타이탄이 역소환된 것이다.
“뭐, 뭐야!”
그리고 그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유저.
그는 다름 아닌 태성의 부길마, 동키호테였다.
“처음부터 월척이 걸렸구나!”
[귀신 발걸음!]
[급소 공격!]
다급히 뒤로 물러서던 것도 잠시.
나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놈을 경직에 빠뜨려버렸고…….
파지직!
활성화해둔 라이트닝 배리어의 감전 효과까지 곁들어져, 놈은 도망도 치지 못하고 금세 죽어버리고 말았다.
반짝이는 무언가.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고.
[타이탄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오, 좋아! 역시 알짜배기들이라니까?”
첫 킬부터 타이탄의 정수를 손에 넣게 되었다.
[라스트챤스: 캬! 정예가 괜히 정예는 아니네요! 시작하자마자 타이탄 정수라뇨!]
[산드로: 보고 있었어?]
[라스트챤스: 그럼요! 저는 항상 형님 타겟이 보조 딜 1순위인걸요! 암튼 빨리 움직이세요! 놈들도 곧 눈치챌 거 같으니까요!]
[산드로: ㅇㅋ!]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동키호테를 죽이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타이탄을 향해 움직였다.
퍼벙! 챙! 채챙!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타이탄과 태성군을 상대로 제각각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타이탄을 향해 연신 테네시 단검과 화살을 날리는 당당이와 라챤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힐러들만 골라 치는 대탐이와 그를 보조하는 무살 형님.
그리고 막강한 체력으로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현중이와 함께 공격 중인 기파랑의 데스 나이트.
태성의 최정예를 상대하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수를 상대로 소수가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역시 든든하구나. 다들 너무 잘 컸어! 이러면 한 놈도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데?’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사전 브리핑에서 미리 주의를 준 게 몇 가지 있었다.
요정계 필드만의 특징과 이놈들을 상대할 때 유달리 조심해야 하는 점에 대해서.
“남은 타이탄은 벽을 쳐라! 그사이에 전원 퇴각해!”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대로 놈들 사이에서 큰 고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얼핏 바라보니, 일도양단이 지른 소리였다.
[산드로: 퇴각 시작했습니다. 다들 집중해 주세요!]
[라스트챤스: 하여간 일도양단 저놈, 머리도 나쁜 놈이 생존본능은 기가 막히다니까!]
아군 외에는 한 명도 보지 못한 숨겨진 사냥터.
그곳에 갑자기 적이 쳐들어 와 전투를 시작한다면, 대다수는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출입구로 생각했던 곳에는 문지기도 둔 상태였을 테니까.
놈들의 포탈이 어딨는지는 몰라도 이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있진 않았을 터.
그래서 놈은 살아날 남은 구석을 찾아냈다.
멀리 있을 포탈로 도망치는 것보다 안전한 장소인…… 뒤쪽 마계 몹들 틈바구니 안으로!
[축복받은얼굴: 생각보다 빨리 후퇴하고 있네요. 다들 놓치면 안 돼요!]
[산드로: 축볼 누나, 부탁드릴게요! 일단 저와 당당이는 가장 안쪽에 있는 놈들을 뒤쫓겠습니다!]
[축복받은파볼: 웅 알겠어!]
[당근당근단검: 알겠습니다!]
내 오더와 동시에 전장에 솟구치는 거대한 두 갈래 화염 벽.
누님은 이중 영창으로 파이어 월을 사용해, 놈들의 퇴로 경로를 크게 제한했다.
그러는 한편 와순이를 탄 라챤이도 저격 모드보다는 멀티플 샷을 쏘아대며 놈들에게 계속 화살비를 내렸다.
이유는 하나.
놈들이 전투를 뒤로 물러서며 전투를 회피한 뒤, 로그아웃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는 페어리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바로 로그아웃이 되지 않았지만, 뒤로 물러나 10초만 버티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실로키네 소환.”
하나 나에게는 그런 놈들의 속셈을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휘이이잉-
페어리와 마계 마물들이 넘쳐나는 필드.
그 안에서 뒤엉킨 우리 버닝스타와 태성 라인의 유저들.
공중에 하얀 매 한 마리가 소환됨과 동시에, 서늘한 돌풍이 모든 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도질!]
그리고 난 그런 실로키네를 안쪽으로 도망치는 놈들에게 붙인 후, 다시금 눈앞에 있는 타이탄들부터 서둘러 잡아냈다.
“으아악! 같은 랭커끼리 이게 말이나 돼!”
“같은 랭커? 레벨 차이가 몇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크흑!”
레벨 차이보다 더 심한 건 템 차이!
라고 말해주기도 전에, 치고 있던 타이탄은 역소환됐다.
“방패 휘두르기!”
그리고 튀어나온 라이더에게는 전장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는 현중이의 스턴이 날아왔다.
그렇게 나는 타이탄들만 노리면서 빠르게 이동했고.
[대형 케르베로스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흉폭한 고르곤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서큐버스로부터 2,12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
어느새 그런 내게 들어오는 몹들의 누적 데미지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쌓이게 됐다.
애초에 요정계 병력과 마계 괴수 군단의 병력들이 전투를 벌이던 필드인 만큼, 사방에 깔린 마계 몹들의 수가 장난 아니었던 것.
빠른 이속과 점멸기와 같은 이동 스킬들을 사용해 최대한 공격을 피해냈지만, 마법 공격만큼은 피가 제법 닳고 있었다.
‘확실히 레벨이 높은 몹들이야. 어쩌면 현존하는 최고 레벨대의 필드일 수도……!’
426레벨인 내게도 몹 네임이 시뻘겋길래 예상했는데, 그 흔한 마법 저항 하나 뜨지 않고 전부 다 박혔기 때문.
하지만 그래 봤자 일반 몹은 일반 몹.
아무리 레벨대가 높아도 보스도 아닌 몹에게 위협을 느끼기엔, 그동안 내가 이룬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볼텍스!”
근 백여 마리 가까이 나를 쫓는 몬스터들.
근처에 있던 태성 잔당과 몹들은 실로키네의 마법 한 방에 전부 검은 돌풍에 빨려들어 뭉쳐졌고.
난 곧바로 그 한복판으로 뛰쳐 들어갔다.
[사냥꾼의 춤!]
[회전 베기!]
순식간에 쑤욱 차오르는 HP칸!
나는 광역 스킬 공격에 이어 양손의 검을 쭈욱 펴고는 풍차처럼 휘돌았다.
드드득! 드드득!
계속해서 내 손에 걸리는 몬스터들의 피격 감촉.
사냥 시 내가 가장 애용하는 ‘멀티 히트’ 공격법이 볼텍스와 결합되자, 버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간 딜링 데미지가 극대화됐다.
그리고 +5 뱀파이어의 루비 반지.
이 반지에 붙은 체력 흡수 효과는 고작 데미지의 3%에 불과했지만…….
각종 엔드급 장비와 10성 스킬들로 무장한 내게는, 쉴 새 없이 힐이 쏟아지는 것과 맞먹는 체력 회복 효과를 보여줬다.
[축복받은얼굴: 저 괴물 자식..... 완전 블랙홀이네, 블랙홀!]
그렇게 단 3초.
이 짧은 시간 만에 뭉쳤던 몹들 백여 마리는 순식간에 정리됐고, 유저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홀몸이 돼버린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도망친 놈들을 뒤쫓았다.
“오지 마! 여긴 우리 땅이야! 가라고!”
“타연에 니 땅 내 땅이 어딨다고요?”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유저는 홍당무.
마법사답게 느린 이속 탓에 도망치는 무리 중에서 가장 뒤처져 있었다.
[연속 베기!]
[일격 강타!]
전직 스킬을 사용하며 대처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단일 타겟 공격 스킬에는 조금도 버티지 못했다.
슈우우.
하필 감전에 당해 제대로 변변찮은 공격 한번 못해보고 죽어버린 그녀.
흩날리는 잿빛 먼지를 뚫고 전진하니, 당당이가 테네시 단검으로 골고루 로그아웃을 방해하고 있는 잔당 10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이 치사한 놈들. 지 죽기 싫다고 동료들 버리면서 악착같이도 도망치는구나.”
“야 이 더러운 자식들아! 치사하게 사냥하는 데 뒤치기 와놓고선 그딴 말이 나와?”
마수와 마계 군단병들 속에서 이곳을 향해 외치는 일도양단의 모습.
놈의 어이없는 반응에 대꾸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딴 소리 할까 봐 공격 전에 대놓고 외치고 시작해줬잖아? 그리고 사냥터 뒤치기는…… 너희 태성의 주특기 아니었어?”
“닥쳐! 어쩌다 이딴 새끼랑 재수 없게 얽혀가지고!”
“그렇지? 그러니까 얽힌 걸 지금 여기서 풀어보든가.”
“뭘 어떻게 이 새끼야! 계속 나만 보면 이렇게 악착같이 공격만 해놓고선!”
열불이 나는지,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일도양단.
난 그에게 몇 번이나 알려준 해법을 다시금 친절하게 알려줬다.
“간단해. 당장 태성 길드 탈퇴하면 지금이라도 공격하지 않고 살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