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예행연습 (2)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구나.”
“와, 넌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진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언제 이렇게 멘탈이 세졌지?”
새벽까지 이어졌던 고된 행군.
특별했던 테오시스까지의 만남을 끝으로, 로그아웃한 나는 침대 위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돌아온 아침.
조금 더 일찍 일어난 현중이가 보던 커뮤니티 반응 글들을 엿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걸 의도하고 다리우스가 벌인 일인데……. 여기에 휘둘리면 놈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밖에 더 되겠어?”
“뭐야, 그 이유 때문인 거야? 무던해진 게 아니라 놈한테 지기 싫어서 마인드가 괜찮았던 거냐? 이럴 땐 비록 니가 동생이지만 조금은 존경스럽구나!”
“누차 말하지만…… 현중아, 타연 안에서든 밖에서든 형은 나라니까? 그리고 괜찮은 건 아냐. 유저분들께 죄송한 마음이야 당연히 들지. 송구스럽기도 하고. 말 그대로 당장 어쩔 수가 없을 뿐…….”
예상한 대로 커뮤니티에서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격렬한 비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친 태성 새끼들... 어제만 두 번 죽었다..... 내 경험치 누가 보상해줄 거냐?
└그러게 누가 흑풍단 짓거리하래?
└└나 흑풍단 아니거든? 염색도 안 한 건데 심연 망토 차고 있단 이유로 공격해도 되는 거냐고!
└└└오해살 짓 하긴 했네ㅋㅋㅋ 난 공격 안 하던데? 이참에 사냥터 한적해져서 좋기만 좋더라
-다리우스나 산드로나 둘 다 똑같은 놈들임.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우리 같은 새우들인 거고.
└같은 생각임. 얼마 전엔 산드로네가 필드 휩쓸고 다니더니, 막상 태성이 휩쓰니깐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음.
└└그러니까 말야. 지들끼리 싸우는데 왜 엄한 유저들이 죽고 있냐고?
-다들 지금 산드로 레벨업 중인 거 모름? 버닝스타 전원이 하룻밤 새 레벨업 개많이 했음!
└ㅋㅋㅋㅋㅋ 개돼지 따위는 자기들 땜에 죽든 말든 눈곱만큼도 상관없단 거지 뭐
└└머야... 난 그동안 드로를 열심히 응원해왔구먼....다 뻥카였던거야...? 이렇게 통수를 치네....증말 실망이 크다...
└└└나도 랭킹 게시판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오늘부로 흑풍단원 탈퇴다 탈퇴! 카악 퉤퉤!
자세히 살펴본 건 아니지만.
잠깐 스치듯 본 몇몇 글들만 읽어 봐도 우리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실컷 싸움하던 놈들이, 정작 적들이 활발히 나서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레벨업만 왕창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려했던 대로잖냐 현중아. 드로가 모르고 한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침울해지자 옆에 있던 축빙 형님이 다독였다.
“그래도요 형. 지환아, 이대로 계속 가만있을 거냐? 욕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 텐데?”
“응. 아무리 봐도 이 길이 맞는 것 같아. 천계 통제에 캐슬 테러 등, 제대로 괴롭혀도 봤고 마신검을 뺏었는데도 이런 반응이라면…… 결국 카이저 형님의 방법이 답인 것 같다.”
황제 도전.
SS급이라는 극악 난이도의 퀘스트.
퀘스트 부여를 비롯해 최근 드러난 여러 정황을 종합해봤을 때, 현시점에서의 트라이가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듯 보였다.
-형이 괜히 당장 테오시스를 만나보라고 했던 게 아니다. 앞으로 네가 싸워야 할 제국 황제에 ‘빙의’라도 사용한다고 가정해봐라. 그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니 놈이 섣불리 빙의할 시도조차 못 하도록 미리 경고해둘 필요가 있었던 거지. 여하튼 일이 이렇게 진행됐으니 한번은 만나 봐야겠지?
-네? 누구요?
-제국 황제 말이다. 놈이 얼마만큼 강한 놈인지…… 잡으려면 미리 가늠은 해봐야 할 테니까.
테오시스와 헤어진 후 형님과 나눴던 대화.
그 결과, 오늘 난 레벨업에 앞서 필히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황제의 침소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베일에 싸인 장소, ‘천상궁(celestial palace)’이었다.
“혼자 괜찮겠어?”
“카이저 형님 커플이 안내해주시기로 했으니 혼자는 아니지. 어차피 황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도 길드원 중에선 나밖에 없고.”
“아무리 너라도 그 안은 위험할 텐데……. 그렇다고 네 말대로 우리가 뭐 딱히 도와줄 것도 없네. 그냥 조심히 잘 시도해보란 말밖에는 못 해주겠다.”
“그거면 됐지. 설마 형님이 시동 걸러 갔다가 죽을 놈으로 보이냐? 이 산드로 님이?”
“요놈 요놈……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요즘 자의식 과잉이 위험 수준이구먼? 인마, 넌 뭐 유저 아니냐? 피가 0이 되면 죽는 건 너도 마찬가지니까 조심해!”
“알겠다 알겠어. 내 목숨 하나에 걸려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조심 안 하겠냐? 그리고 태규 형님?”
“응?”
“이 자식 괜히 딴짓하지 않고 레벨업에만 집중하도록 잘 좀 케어해 주세요. 툭하면 사기 저하되는 소리나 해대니까, 저 올 때까지 옆에서 길드창도 못 쓰게 감시 좀 잘해주시고요.”
“하하! 알겠다. 현중아, 오늘부터 죽어라 닥치고 사냥이다!”
“태규 형…… 언제는 저희가 안 그랬어요?”
어제와 같은 무한 사냥은 불가능해졌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요정계는 여전히 최고의 몹 몰이 사냥터였다.
일단 몹 몰이의 필수 조건인 안전이 페어리들을 통해 담보된 곳이었고.
다른 유저들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몰이 사냥으로 인한 시비나 동선, 리스폰 주기 등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원거리 몹들이 거슬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천계보다는 어림잡아 1.25배 정도는 효율이 더 좋을 거야.’
물론 이중으로 경험치를 주는 심연 몬스터들만 한 효자 몹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다수의 유저와 함께 사냥하는 것과 독식한다는 건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렇게 현 정세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레벨업에만 전념해주기를 주문하고는 타연에 접속했다.
어느덧 새벽에 카이저 형님과 헤어지면서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서였다.
* * *
슈웅!
[가이라 제국의 수도, 오스타그에 도착했습니다.]
접속하자마자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오스타그로 순간이동했다.
[은신!]
언제나 타연 최고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제도의 광장.
북적거리는 이곳엔 의외로 경비병들이 배치되지 않아, 공간이동으로 방문하는 데 문제없었다.
심지어 도시 전역에 은신을 감지하는 병사도 많지 않아, 수배 중인 유저라 해도 요령만 있다면 이곳의 편의 시설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수도 밖에는 제국의 그리폰 순찰대가 날아다니고, 지상 곳곳에도 수비 병력들이 랜덤 배치되어 있지만.
수배나 제국과 적대 관계인 유저들을 고려한 개발사의 배려 때문인지, 정작 도시 자체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그 덕에 내가 종종 달켄 같은 이곳에만 있는 NPC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형님이 기다리신다고 했던 곳이…… 저긴가!’
그렇게 은신 상태로 조심스레 이동한 결과, 인적이 드문 고급 저택 단지 안에서 익숙한 탈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얻어 타는지 모를 제국 군단장만의 특권, 팔두마차였다.
“형님!”
“오, 왔냐? 어서 타라!”
“네, 감사합니다!”
지붕 위에 걸터앉아있던 카이저 형님.
안내를 받아 마차에 오르자 먼저 들어와 있던 선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셨어요, 오빠!”
“어, 그래 푼젤아.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내가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지?”
“그럼요. 저희도 조금 전에 접속했어요. 아무튼 오셨으니 바로 출발해 볼까요?”
“그래. 형님께 준비 다 됐다고 말씀 좀 전해줘.”
그리고 곧바로 팔두마차의 말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외곽으로만 향하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엔 오히려 안쪽인 오스타그 황궁을 향해.
“정말 형님과 네가 없었다면 어디서 뭐부터 해야 했을지…… 앞이 다 깜깜하다.”
“에이, 무슨 말이에요 오빠. 어떻게 됐든 알아서 잘하셨을 거면서!”
“아니 정말이야. 처벌을 받고 수배가 풀린다면야 모를까, 현 상태로서는 정말 답도 없었을 거야. 사실 수배 중인 몸으로 이렇게 황궁 안으로 대놓고 들어간다는 게 말이나 돼?”
이히히힝!
시내 안이라 평소의 빠른 속도 대신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는 말들.
그렇다 보니 도시 안을 순찰 중인 경비병들도 제법 마주쳤지만 단 한 명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시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팔두마차 안에 있으면 모든 제국군의 어그로로부터 완벽히 차단되는 것이다.
“군단장님을 향하여 경례!”
“충성!”
“충성!”
그렇게 도착한 오스타그 황궁의 정문.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은 검문 대신 오히려 우리를 향해 경례를 해왔다.
“캬아, 뭐예요 형님! NPC들한테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게임하고 계셨던 거예요?”
“하핫! 뭐냐. 이런 건 처음 보는 거야?”
그 멋진 대우에, 나는 마차 밖에 앉아계신 형님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요! 제가 언제 이런 걸 볼 수 있었겠어요? 제국에는 얼씬도 안 하는데.”
“나름 군단장급이 되면 이런 대접도 받고 그래야 유저들한테 동기 부여가 될 거 아냐? 그러는 너도 너네 영토에서는 왕 대접 좀 받고 있을 텐데?”
“유저 국가라 그런지 성내 NPC들이나 좀 대우해주지 별거 없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제대로 대접받나 보네요.”
아름다운 황궁의 정원과 널찍한 대로.
얼마나 넓은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이동했다.
그리고 제국군 훈련소, 원로원과 지혜의 마탑 등등.
익숙한 건물들을 지나쳐 마침내 황궁의 주성 앞에 도착했다.
“여기는 오랜만이네요. 그대론데요?”
“뭐 변할 게 있었겠어? 황제라도 죽어야 뭔가 변해도 변하겠지.”
“흐음……. 그럼 조만간 변하긴 하겠네요, 흐흐.”
지하에 있는 황실 창고에 진입하기 위해 하늘 위에서 뛰어내렸던 건물.
이곳을 이렇게 지상에서 느긋하게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병사 수천 명과 크림슨 나이트, 마탑주까지 나타나 난장판이었는데…….’
역시 빽보다 좋고 편한 건 없는 건가?
당장 마차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딛어도 마탑주가 순간이동해올 것을 생각해보면, 카이저 형님과의 인연이 다시 한번 감사하게 여겨졌다.
“구경 다 했으면 이동한다?”
“네, 그러세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찾은 곳은 이 황실 주성이 아니었다.
다시 걸음을 뗀 팔두마차는 방향을 틀어 건물을 크게 돌았다.
그렇게 길을 따라 뒤편으로 이동한 다음, 주성 너머 깊숙한 곳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했다.
“지엄하신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지엄하신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그래, 오냐. 다들 수고가 많구나.”
밖에서는 제국 병사들의 외침이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황궁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하다고 알려진 요지 중의 요지.
황제가 거주하는 천상궁으로 향하는 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천상궁은 오빠가 유저 중에서는 세 번째로 방문하는 사람일 걸요?”
“아, 그래?”
“그럼요! 여긴 어설프게 귀족이 됐다고 해도, 백작급 이상이 아니라면 전부 다 병사들한테 막혀버리거든요!”
굳이 라푼젤의 말이 아니더라도, 형님이 이 게임 안에서 이룩한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수 없었다.
‘역시 괜히 퀘스트로 7신기를 받으신 게 아니라니까. 아마 나나 다리우스가 없었더라면…… 최초로 황제가 되는 유저는 아마 카이저 형님이셨을 거야.’
여하튼 타연 속 새로운 장소를 탐방하는 건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
특히 직접 가봐야지만 볼 수 있는 이 게임의 특성상, 이 앞에 펼쳐질 것들은 설명은 조금 들었다지만 전부 미지의 것들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 환영 마법 관문을 통과 중이다. 곧 눈앞에 보일 거야.”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형님.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게 고생이지.”
그렇게 마차 안으로 들어온 형님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 더 전진하자, 무언가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반투명한 푸른색 반원 형태의 결계.
하늘 위에선 보이지 않던 황궁의 안쪽에, 이 보호 결계가 있을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참…… 이 보호막은 정말 타연 곳곳, 안 쳐져 있는 곳이 없네요.”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곳에만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아무튼 이게 아니라면 오늘, 시동 걸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우리로선 다행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
“그런가요? 아무튼 신비롭긴 하네요. 공중에 떠 있는 건물이라니.”
천상궁.
황제가 머무는 건물이자 침소가 있는 이 궁전은 여타 다른 성들보다는 작은 크기였으나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지상으로부터 2, 3미터 정도 부유해 있는 땅 위에 지어졌다는 점이었다.
마치 운영자들의 쉼터 ‘로스트 캐슬’이 지상에 내려온 것처럼 부유 중인 성.
마차는 그곳 정문과 지상을 연결하는 다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결계를 통과해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