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예행연습 (3)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할 거다. 이 안으로 수배 중인 유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니까.”
“네, 형님. 안 그래도 긴장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황제의 보금자리이자 침소가 있는 궁전.
업무를 위해서 황궁의 주성으로 종종 나온다고 들었으나, 스토리상 황제가 이곳에 칩거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이유가 마왕 소환을 위한 준비였던 건지는 몰랐지만…….’
천 년 전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현 황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한 그 때문인지 이곳 천상궁 내부는 오직 선택받은 극소수의 병력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여하튼 우리로선 번거롭지 않아 잘된 일이다.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몰려들면 위협도 위협이지만 정신없었을 거잖아?”
“네. 그 대신 하나하나 보스 몹만큼이나 강력한…… ‘그’ 자식들이 튀어나오겠지만요.”
제국의 황제를 죽이겠다니?
원래라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대륙 모든 왕국의 병력을 다 합쳐도 절반이 되지 않을 만큼, 수십 만의 병사들과 수백 기의 타이탄들이 지키는 황제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형님이나 나는 거기에 관한 의문은 조금도 갖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싸워 이겨야만 황제를 죽일 수 있었다면, 내게 뜬 ‘황제 도전’이나 형님께 뜬 ‘황제 암살’ 같은 퀘스트가 존재했을 리 없으니까.
“그래. 놈들 규모를 파악하는 게 오늘 이곳을 찾아온 주목적이기도 하니까. 황제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가장 까다롭고 귀찮은 첫 관문은 아마 ‘크림슨 나이트’겠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드러난 놈들이 10명이니 예상은 20명 정도? 그것도 황궁에 배치되어있는 10명은 계산에서 제외한 숫자다.”
“역시 많기는 많네요.”
황제의 직속 친위대, 크림슨 나이트.
이미 한 차례 겪어본 바 있는 놈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네임드’ 보스 몹 수준의 스펙을 자랑했다.
부하 몹으로 네임드 보스급을 소환하는 몹이라니…….
역시나 괜히 SS급 난이도로 책정된 건 아니었다.
“네. 그러니 잘 좀 부탁드릴게요.”
“그럼! 애초에 이걸 하자고 꼬드긴 게 난데 대충 도와줄 순 없지. 우리 라푼수와 함께 단 한 개의 정보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주마.”
“맡겨 줘요, 드로 오빠. 제가 우리 오빠 때문에 랭커가 된 게 아니란 걸,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드릴게요.”
“에이, 네 찐 실력이야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뭘.”
“자, 이제 그만. 도착했다.”
형님의 말과 함께 멈춰선 마차.
완만했던 오르막 다리를 건너 도착한 천상궁의 정문은 화려함 그 자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정원 속에 세워진 하얀 궁전은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층고가 워낙 높아 어지간한 성들과 비슷한 높이였다.
덕분에 정문 또한 넓고 높았고 각종 화려한 문양의 음각들이 문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 양옆에는 특별한 존재들이 서 있었다.
“이야, 여기는 확실히 스케일부터가 다르네요. 타이탄 문지기라니!”
제국의 상징색인 붉은 망토를 길게 드리운 강철 거인.
솔저급인 가이라 나이츠와 다르게 생긴 타이탄 2기가 마치 거대 동상처럼 궁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저것들도 조심해야 한다. 안에 기사가 타고 있으니 마차에서 내리면 바로 공격할지도 모르지.”
“이거 진짜 겁나서 마차 밖으로 나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식, 엄살은……. 그래도 황제의 명으로 마법사들은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잖아? 하긴 그랬다면 애초에 혼자서 여기에 따라올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마왕 소환과 관련된 짓을 벌이느라 그런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곳에 한 명도 없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복마전(伏魔殿) 같은 곳.
대충만 훑어봐도 사망 신호가 느껴지는 구석이 벌써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랭킹 1위가 되고 나면, 더 이상 이런 도박은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기를 쓰고 따라잡겠답시고 무모한 도전도 참 많이 했다.
한데 어쩌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일을 시도하려는 중이었다.
“…….”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끝난 거냐?”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심호흡 한 번 했어요. 그럼 나가볼 테니 두 분 다 잘 지켜봐 주세요.”
“그래. 조심해라.”
“조심하세요, 오빠.”
하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주저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강한 적이나 어려운 난이도라 할지라도 결국 모든 건 깨라고 만들어 둔 것.
게임 속 스토리마저도 황제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가정하고 있었으니, 그걸 달성할 유저는 나 ‘산드로’ 말고는 없다!
이런 자만감이 아닌 자신감을 장착한 채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확인해 볼 사항이었던 은신 감지 여부부터 확인해 보았다.
[은신!]
톡.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지만.
“…….”
여전히 이곳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빠? 마차 밖으로 나가신 거 맞죠? 괜찮은 거예요?”
“어, 나왔어. 다행히 아직까진 괜찮네. 은신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10성 은신이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상 왠지 후자 같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어쨌든 입구서부터 도망칠 염려는 덜었다는 사실.
내친김에 타이탄이 서 있는 문 앞까지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로얄 나이츠> <로얄 나이츠>
외형도 외형이었지만, 머리 위로 보이는 이름부터가 가이라 나이츠와 달랐다.
역시나 솔저급이 아닌 나이트급 타이탄.
그러고 보면 크림슨 나이트들이 소환할 타이탄은 최소 이 정도급 타이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형님, 들어가 보시죠?)
(카이저: 확실히 괜찮은 거지?)
(나: 네. 마법사들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은 아무도 감지를 못하네요.)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형님과는 파티조차 맺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딨는지 볼 수조차 없는 형님과 귓속말로 대화하자, 곧 형님도 마차에서 나와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라. 폐하를 뵙겠다!”
스윽.
형님이 다가가서인지 아니면 명령을 들어서인지, 굳게 닫혀있던 문은 그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실내.
‘헉!’
원래 상상했었던 천계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넓은 중앙 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내부는 휘황찬란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에 부족해 보였다.
벽을 빼곡히 메운 명화와 각종 금은보화로 만든 장식품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대리석 바닥과 그를 비추고 있는 5단의 대형 샹들리에까지.
부유 중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곳에 왜 ‘천상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형님은 이미 몇 차례 와봐 감흥이 없는지, 텅 비어 있는 실내를 묵묵히 가로질러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미리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면적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황제의 사치스러운 침소가 있는 곳이었다.
(카이저: 이렇게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직 남아있는 퀘스트 핑계로 가능했다는 걸 명심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봐둬야 해.)
(나: 네, 잘 알고 있어요. 형님은 행여 전투에 휩쓸리지 않게 조심만 해주세요. 푼젤이한테는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절대 힐은 주지 말라고 한 번 더 당부해 주시고요.)
우리가 이렇게 과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전적으로 이 천상궁을 둘러싼 푸른 결계 때문이었다.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키는 고대 마도 시대의 보호 마법.
시공의 틈새에서는 심연의 침략을 막아냈고, 수중왕국에서는 바닷속 한복판에서 물을 밀어내 도시를 만들었다.
요정계에서 또한 비슷했는데, 이 결계를 몇 차례 겪어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가지 특성을 알아내게 되었다.
어제 괴수 군단장이 푸른 결계를 사이에 두고 되돌아갔던 것처럼, 이 결계를 사이에 두고 각각 안과 밖의 어그로가 차단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고, 유저가 마왕을 소환하려는 황제를 처단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이렇게 어그로가 차단되지 않는다면, 황궁의 그 많은 병력들을 상대해가며 황제를 잡을 수 있는 유저는 몇 년이 지난다 해도 나타날 수 없을 테니까.
끼익.
그렇게 올라온 2층엔 화려한 문이 3개 있었고, 형님은 그중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문을 열었다.
채챙!
그러자 요란한 쇳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열 명의 크림슨 나이트들이 동시에 검을 빼 드는 소리였다.
“신분과 목적을 밝혀라!”
“나는 제국 제8군단장의 사령관, 카이저 백작이다! 황제 폐하를 알현해 드릴 말씀이 있다!”
당당히 가슴을 편 채 말하는 카이저 형님.
그 옆의 라푼젤은 아직 자작에 불과했지만, 함께 파티를 맺고 있어서 그런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괜찮아!’
정말 개발자의 배려인 걸까?
아니면 10성 은신이 잠입할지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열 명이나 되는 크림슨 나이트들과 마주했지만 내 은신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형 몹이라 해도, 하나하나가 네임드 보스급 스펙이란 걸 고려해보면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
이쯤 되니 뭔가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하지만 곧 드러날 황제의 실물을 볼 생각에 걱정은 제쳐두었다.
착착착!
신원이 확인되자 다시금 착검하는 크림슨 나이트들을 뒤로한 채, 형님은 침소 중앙에 있는 커다란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휘장이 내리어진 화려한 캐노피 뒤로 실루엣 하나가 감돌고 있었고.
“제국의 하늘이자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뵈어요!”
카이저 형님과 라푼젤은 각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 존재를 향해 부복했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직접 휘장을 걷으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이라 제국의 황제 제피르 3세>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퀭한 눈.
피골이 상접한 것 같은 앙상한 몸매.
헐렁하다 못해 흘러내리는 왕관과 용포(龍袍).
느릿느릿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자세를 취하는 그에게선 황제로서의 위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게 특별한 부분은 있었다.
다른 여느 NPC들과 다르게 행동과 반응들이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점.
제피르는 자신을 찾아와 인사를 건넨 카이저 커플에게 마치 사람과도 같은 응대를 보여주었다.
“어서 오시오, 군단장. 일전 내가 내어준 지시를 끝마친 것이오?”
“예, 폐하. 마터스 백작의 영주령을 샅샅이 뒤져 분부하신 물건을 찾아왔습니다.”
“역시 군단장이오. 그렇다면 이리와 그 성과를 내게 건네주시오.”
일견 별다를 것 없는 퀘스트의 진행 과정.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말씀이 생각나, 퀘템을 건네주러 다가가는 형님의 뒤를 따라 황제에게 다가갔고.
피슛!
[저주받은 악령으로부터 10,550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갑자기 발밑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기운에 적중되어 은신이 벗겨졌다.
“엇! 들켰다!”
채채챙!
그리고 뒤편에서 울려 퍼지는 검을 뽑아 드는 소리.
“침입자다!”
“폐하를 지켜라!”
“적을 즉각 사살하라!”
가장 먼저 방문 앞에 있던 크림슨 나이트 10명이 차징을 사용해 빠른 속도로 돌격해왔다.
“에잇! 형님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뭐에 은신이 걸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결국엔 이런 상황이 될 거로 생각하고 왔던 터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재빠른 몸놀림!]
[사냥꾼의 춤!]
[그림자 밟기!]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무조건 확인해 보고 돌아가야 할 타겟인 황제를 향해 순간이동했고.
턱!
내가 휘두른 검은 어느새 황제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아지랑이에 가로막혔다.
“오랜만의 암살자로군……. 그 하찮은 목숨은 곧 헛되이 사라지겠지만……!”
고개를 돌려 권태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황제.
그리고는 놈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내 온몸을 뒤덮었다.
“커헉!”
[저주받은 악령으로부터 13,200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주받은 악령으로부터 13,200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
[저주받은 악령으로부터 13,200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 무슨 데미지가!’
피하지도 못하고 맞아버린 5번의 마법 공격.
덕분에 전투 시작과 동시에 나는 곧바로 반피가 돼버렸고.
[크림슨 나이트 아놀드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크림슨 나이트 레베카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
막대한 데미지에 놀란 그 잠깐 사이, 어느덧 나는 크림슨 나이트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는 집중 공격의 타겟이 되어버렸다.
‘정신 차리자, 강지환!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애초부터 황제가 녹록한 보스 몹일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상보다 약해 보이는 외관에 동요해 잠시 방심했던 것일 뿐.
역시 황제는 마계로부터 힘을 전해 받았는지 이미 강력한 암흑 마법을 구사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사냥꾼의 춤을 활성화해 회피율 95% 상태였던 터라, 쏟아지는 크림슨 나이트들의 공격에도 숨돌릴 틈은 주어졌고.
나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는 황제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턱! 턱!
하나 이번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타의 몹들과는 다른 패턴.
크림슨 나이트들은 몸을 날려 황제를 향한 내 공격들을 대신 맞아줬다.
“모든 크림슨들이 쓰러지기 전까지 폐하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크아아!”
그리고는 반격해오는 크림슨 나이트의 눈에는 어느덧 새빨간 안광이 불을 뿜고 있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과 검은 기운.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놈들의 모습에 서둘러 네임을 확인해 보았고.
<마기에 물든 크림슨 나이트 발렌>
어느새 놈들이 전부, 마계 몹 상태로 변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이미 반쯤 마계나 마찬가지인 상태구나!”
어려우리라 예상은 했지만, 아예 마계 몹이 돼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순간 당황했고.
“다크 블레이드!”
덕분에 놈이 휘두른 검은 검기(劍氣) 같은 스킬 공격을 얼떨결에 검을 들어 막았다.
딱 봐도 물리 공격이 아닌 마법 공격 같아서, 무기 방어의 데미지 감소 효과라도 적용되기를 기대한 대처였다.
한데 놀랍게도 뜻밖의 효과가 발동되었다.
[암 속성 스킬 공격을 흡수하여 8,995의 체력을 회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