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상성 (1)
“……그래서 이번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홀로 황제를 방문한 이후, 난 곧바로 아베르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처럼 피닉스 라인의 신뢰할 수 있는 멤버들을 소집해, 방금 황제와 대면했던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하긴 드로 네 페리엘의 망토가 발동됐으니 알 만하다. 천사장이나 다리우스와 싸울 때조차 못 봤던 건데 황제를 치자마자 발동됐다니……. 얼마나 대단한 몹인지 바로 감이 와.”
“야! 거기서 살아나온 것도 대단한데? 그동안 우리가 퍼킬해 온 보스들도 대단한 놈들투성이였지만…… 네 말대로면 그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잖아!”
지옥불 형님과 축빙 형님의 말과 같이, 천상궁은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을 장소였다.
물론 나 또한 무척 위험했던 건 마찬가지.
만약 그곳에 안팎의 어그로가 차단되는 푸른 장막 결계가 없었다면.
혹은 내게 단테리오의 팔찌라는 ‘스킬 가속’ 효과가 없었다면…….
결단코 나는 그 안에 잠입해 시동을 걸어볼 생각 따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값진 정보들을 얻어왔네요. 크림슨 나이트가 총 20명이란 사실. 그리고 이미 마계화가 진행되어 암흑 스킬과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등등은 정말 알짜배기 정보잖아요?”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 결과, 나름의 소득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전했다면 반드시 실패했을 정도로 중요한 정보들을 사전에 알아냈으니까.
“그래. 라챤이 말대로 소득이 있긴 했지. 한데 그게 보람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네? 형님, 보람이 왜 없어요?”
“드로가 안 좋은 소식도 함께 가져와서 그렇지.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는…… 레이드는 꿈도 못 꿔볼 만큼 황제가 강력하다는 암울한 정보를.”
현중이나 할법한 사기가 저하되는 소리를 한 사람.
그건 다름 아닌 지옥불 형님이었다.
‘지옥불 형님마저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설령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마지막 순간에도, 동료와 부하들을 다독여 줄 것 같은 형님이 이렇게 말한 이유.
그건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을 황제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격 시마다 데미지의 100% 반사 뎀을 주는 패시브라니……. 보스 몹한테 잘도 그런 걸 만들어서 넣어뒀어. 하필이면 그것도 현존 최강의 몹한테!”
“텄어요! 이건 절대 안 돼요. 시도도 가상하고 드로가 고생도 많이 했지만…… 잡으라고 만들어둔 놈이 아니네요. 지금까지 이런 말 여러 번 했던 것 같지만, 이번만큼은 진짜 제대로 텄어요!”
“현중아. 또 시작도 전부터 초 칠래?”
“지환아, 이게 초 치려고 하는 소리 같냐? 지금 우리가 가진 템들이 얼마나 많냐? 괜히 레이드한답시고 들어갔다가 도망도 못 치고 전멸해버리면 어떡하려고? 태성 좀 빨리 잡아보겠다고 서두르다가, 괜한 역전의 빌미만 만들어줄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래 드로야. 나도 이번만큼은 축굴이 의견에 동의한다. 반사 데미지라면 원딜러들 위주로 공격해야 할 텐데, 강력한 근접 딜러인 크림슨 나이트만 20명이 호위하고 있다니……. 그 안까지 갈 수 있는 인원도 한정적일 텐데, 도무지 조합을 어떻게 짜야 할지 감조차도 잡히지 않는구나.”
항상 내 의견에 동의해왔던 지옥불 형님이 맞는지,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밝혀왔다.
그리고 아직 수긍하지 않았을 뿐, 사실 나 또한 비관적인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칠 수가 있어야 뭘 잡든가 하지. 반사 데미지 때문에 공격조차 못 하는 놈을 만들어두면 어쩌란 거야?’
레벨 차이로 공격이 헛방 나거나…….
혹은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보유해 데미지가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 해도 지금보다는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레벨이야 시간을 투자해 더 올리면 되고, 데미지가 약하면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새로운 스킬들을 배우면 될 테니까.
한데 공격하는 족족 반사 데미지를 감수해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잡으란 말인가?
대략 가늠해봤던 놈의 풀피는, 유저 만 명이 공격해도 죽지 않을 만큼 많고도 많아 보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게 기본 패시브 스킬였다는 게 더 절망적이죠. 차후 어떤 고난도 페이즈가 펼쳐질지 모르는데 첫 베이스 스킬이 그 정도라니……. 빠른 포기를 할 수 있게 해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야 하려나요?”
“당당 군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답이 없나 보군요. 생각해보면 당당 군처럼 전원 다 테네시 단검으로 무장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이 풀릴 템이 아니니 힘들겠고…….”
“오, 카이저 형님!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역시 찾아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다들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죠? 어차피 쉽게 깨져버릴 퀘스트였다면 SS급이었을 리 없잖아요!”
“뭐, 현재로선 다들 100레벨씩 더 높아진다 해도 잡을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드로 말대로 다들 연구해봐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래도 제국과 직접 전쟁을 치러 승리하는 것보단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역시 카이저 형님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어떤 어려운 퀘스트도 남의 도움 없이 척척 해결해온 형님이라 그런지, 드러난 정보 중에서 비관적인 점보다는 가능성 부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럼 일단 포기하지 않는 거로 오늘 회의는 마무리하겠습니다. 다들 레벨업에 매진하는 한편 공략 방법을 고민해 주세요. 혹시 알아요? 전직한 직업의 아직 배우지 않은 스킬 중에서 실마리가 있을지요?”
“맞아요. 원래 가장 앞서가다 보면 길이 없어서 헤맬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들 그 길 중간에서 낙오되지 않게 스펙을 좀 더 키워봅시다!”
“현중아. 넌 스탠스 좀 하나로 해라. 사내자식이 뭐 그리 오락가락하면서 사람들 헷갈리게 만드냐!”
“하핫! 죄송합니다, 축빙 형님!”
그렇게 전 멤버가 모였던 간만의 회의는 뾰족한 해결책 없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다들 하나둘씩 요정계로 레벨업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난 나만의 할 일을 찾아 공간이동술사를 향해 이동했다.
* * *
“태성은 절대 굴하지 않는…… 크윽!”
“타연의 암 덩어리 자식아! 횡포 좀 그만 부려…… 커헉!”
푹! 푸욱!
태성 라인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
놈들은 죽기 직전에 반드시 한마디씩 내뱉고 죽었다.
무슨 지령이라도 받은 건지, 매번 비슷한 투정을 들어주는 것도 이제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암 덩어리는 태성이죠. 전 그걸 잘라내는 일을 하고 있을 뿐.”
“웃기지 마라! 지금 너 한 명이 타연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먼저 걸어온 싸움에 응한 것도 잘못입니까? 그걸 이렇게 더티한 방법으로 맞선 당신들의 잘못을 왜 저한테 뒤집어씌우나요? 물론 다리우스가 시킨 대로 하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변명이 될 순 없죠.”
“그게 무슨 억지냐!”
“억지가 아니라 팩트입니다. 제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싫다면야…… 늘 말해왔듯이 길드에서 당장 탈퇴하시면 되고요.”
간만에 올라온 천계.
잠시 이곳에 방문하는 일이 줄어들자,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태성 라인 유저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한 번 올라오면 48시간이라는 재입장 제한이 있는 필드.
따라서 난 한 시간 동안, 루네아, 테터리욜, 이테른 등등의 지역을 쉬지 않고 넘나들며 사냥과 PK를 벌이는 태성 놈들을 찾아 정리했다.
“또 그 소리냐! 어디 한번 두고 봐라! 결국 나중에 누가 웃게 될지는…… 크헉!”
솨아아.
더는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도둑을 지상으로 돌려보내 줬다.
“만약 탈퇴한다면 살려주려고 했는데……. 왜 하나같이 어리석은 선택만 택하는 건지…….”
놈들과의 전투는 마치 늪과도 같았다.
마치 칼로 물을 베고 있는 것 같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싸움.
레벨업에 바쁜 와중에도 틈을 내 이곳에 찾아온 만큼 뭔가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했지만, 놈들은 여전히 타협보단 죽음을 택했다.
“솔직히 전…… 방금 죽은 사람 말에 동의해요.”
“……네?”
한데 뒤에서 누군가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금 전 태성 파티에게 공격당하던 흑풍단 파티원 중 한 명이었다.
“이대로면 결국 산드로 님이나 버닝스타 분들의 입지가 줄어들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타연은 점점 망겜으로 소문나 유저들로부터 외면받게 될 거고요. 즐겁고 재밌자고 접속한 게임에서 계속 괴롭힘만 당한다면, 아무리 환상적인 게임이라고 해도 누가 계속하겠어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놈들이 이렇게 나올지 예상 못 했던 제 실수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서 놈들을 막고 만회할 방법을…….”
“아니요. 이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저희 흑풍단77 길드도 이틀 새에 반 토막이 나버린 걸요? 흑풍단마저도 이럴 정도면 일반 유저들에게 생긴 반감은 말도 안 되게 깊을 거예요. 전 일개 이름 없는 흑풍단원 중 한 명이지만…… 제 말을 허투루 듣지 말고 당장 뭐라도 하셔야 할 거예요.”
“진심 어린 충고,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더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무얼 말해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불쑥 천계에 나타나 태성을 정화한답시고 굴고는 있지만, 다른 길드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레벨들은 쑥쑥 잘만 오르고 있었으니, 우리의 계획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태성과 도긴개긴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천계도 통제할 겸 머리 좀 식히러 왔는데 답답하기만 하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내가 황제가 되는 것밖에는 길이 없어 보이는데…… 도대체 잡을 방법이 없어 보이니 원.’
호쾌히 썰어버린 태성 놈들만 벌써 200명이 넘었지만, 가슴은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잠시 정리를 한다 해도, 내가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태성 놈들은 다시 또 이곳에 올라와 사냥과 PK를 자행할 것이다.
물론 피닉스 라인이나 고레벨 흑풍단들이 대항하겠지만, 놈들의 조직력과 물량을 이겨내긴 힘들 터.
결국 우리가 계속 감시하고 있지 않은 이상, 이곳에서 유저들이 받을 피해를 100% 예방하기란 불가능했다.
천계는 중요한 곳이라 시간을 내 와보긴 했지만, 막상 이런 필드가 타연 전역에 하나둘이 아닐 걸 생각해보니 한숨만 나왔다.
쿠웅! 펑!
[심연의 파편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심연의 파편으로부터 5,44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이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심연 몹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빠른 이속으로 무시하며 지나쳤지만, 이동 동선에 방해가 되면 지금처럼 순식간에 없애버리며 전진했다.
‘아무튼 천계는 여전히 경험치 하나만큼은 죽여주는구나. 각종 업적으로 인한 추가 데미지 때문에 사냥 속도도 엄청 빠르고.’
심연의 파편은 하나하나가 덩치 큰 대형급 몬스터.
그에 걸맞게 공격력과 HP가 어마어마해서 나를 제외하면 혼자 잡아내는 유저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심연 몹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업적들이 보유해 어지간한 파티들보다 훨씬 더 빠르고 수월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이놈들한테 먹히는 속성 추가 데미지만 있었어도 진짜 더 쩔었을 텐데……. 요정계는 생각도 안 날 만큼!’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심연 몹들은 전부 ‘무’ 속성이라 추가 속성 데미지가 없다는 점.
크림슨 나이트나 암흑 황제에게도 신검의 빛 속성 추가 데미지가 있었던 걸 떠올려보면…….
확실히 속성이 없는 심연의 몹들은 상당히 까다롭게 만들어진 놈들이었다.
“진짜 마신검으로 놈들 공격을 흡수하고 피가 찰 때만 해도…… 내가 놈들의 완벽한 극상성인 것 같아서 짜릿했는데……. 쩝, 아쉽구만.”
그렇게 무상성 심연 몹들을 처치하다 보니, 문득 짧았던 환희의 순간이 떠올랐다.
빛 속성과 암 속성 최강의 무기를 한몸에 지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깨달았던 놈들과의 전투 순간을.
무지막지한 추가 데미지뿐만 아니라 놈들의 스킬 공격을 흡수해서 회복했던 체력.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하다면, 어쩌면 황제 따위도 혼자서 잡아낼지 모른다는 환상도 잠시나마 들 정도였다.
물론 그 모든 걸 상쇄시키는 반사 데미지 때문에 모든 것은 엉망이 됐지만 말이다.
“반사 뎀이 조금만 더 약하면 피흡과 힐링으로 어떻게든 버티겠는데……. 그럴 순 없는 건가?”
하지만 곧바로 페리엘의 망토가 펼쳐졌던 절망의 순간까지 떠오르자,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완벽한 극상성 무기들 덕분에 혼자서도 수십 명 못지않은 데미지를 뽐낼 자신이 있었던 게 아쉬워서.
한데 그 말을 뱉은 순간, 갑자기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생각났다.
“가만! 내가 왜 속성 추가 데미지만 생각하고 있었지? 속성에는 내성으로 인한 데미지 감소 효과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