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월드 보스 레이드 (1)
“훼라리 소환!”
그리고 정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난, 허공에 훼라리를 소환해 올라탔다.
“엇, 뭐야? 돈 안 주고 튀는 거냐!”
“당장 빠져, 이 멍청아!”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홍길동.
하지만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띠링!
하고 나에게, 어그로 감지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
내 풍부한 레이드 경험상, 지금은 명백히 위험 상황!
그것도 아주 ‘긴급’한 순간이었다.
『붙잡아라!』
금세 마법진 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칼 데드라는 역시나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그것도 가장 위험하고 까다로운 다중 군중 제어 계통의 스킬을.
[어둠의 손길에 당하여 훼라리가 5초간 속박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홰를 치며 날아오르려던 훼라리.
내 애룡은 지상을 박차는 대신 오히려 주저앉았다.
어느새 지상에서 돋아난 검은 손들이 두 발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친! 등장하자마자 속박의 손길을! 그것도 광역으로 걸었단 말야?”
현재 나는 루이투스는 물론, 천사장의 보살핌까지도 쿨타임인 상태.
이 상황에서 타연 내 동급 최강으로 설정된 ‘초거대’ 보스 몹의 어그로를 혼자 감당한다는 건,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이대로 브레스라도 쓴다면?’
그냥 사실 여부와 위치만 확인하러 온 곳에서 자칫 죽을 수도 있다니?
순간적으로 엄습한 위급함에 몸 안의 세포들이 전부 깨어나는 듯했다.
“모두 저한테 올라타요! 램보 소환!”
[귀신 발걸음!]
나는 묶여버린 훼라리는 과감히 역소환시키고 대신 램보를 소환해 갈아탔다.
그리곤 내 외침에 다가온 당당이와 무살 형님을 차례로 태우고는 전속력을 다해 산등성이를 내려갔다.
“크악!”
뒤편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돌아보니 흩날리는 잿빛 먼지가 눈에 띄었는데 위치로 보아 홍길동의 잔해 같았다.
‘멍청한 놈! 아니, 덕분에 도망칠 여유가 생겼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멀리서도 먼지가 눈에 잘 띄도록 배경이 되어준 검은 비늘.
넓었던 석벽 앞이 좁아 보일 만큼 빌딩처럼 거대한 크기.
최초의 초대형 보스 몹 ‘히드라’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블랙 드래곤이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는 붉은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도망치거라 미물들이여! 눈물 흘리거라 인간들이여! 이제 망각의 시대는 끝났도다. 다시 공포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니!』
그리고는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지,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뭐, 뭐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 우리.
유유히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산맥 아래로 향한 미스틱 드래곤은 금세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게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는 퇴장이었다.
“저희를…… 쫓지 않네요?”
“그러게. 분명히 어그로가 끌렸었는데.”
당당이의 말대로 놈은 우리가 도망치든 말든 조금도 관심 없는 모습이었다.
‘설마 가까이 다가온 유저들만 공격하는 패턴? 물론 그런 놈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그럼 보스 몹으로서의 의미가 있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홍길동의 제보가 사실이라 미스틱 드래곤의 행방을 찾아냈다는 것.
그리고 놈의 정체가 우리의 예상대로 칠흑 같은 블랙 드래곤이 확실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목표의 절반은 달성했다.
그리고 이제 나머지 절반, 놈의 레이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일만 남았다.
“이만 이곳에서 벗어날까? 더 뒤져봤자 흑벽엔 별다른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럴까요? 비록 등장 위치가 랜덤인 것 같지만…… 뭐 저렇게 큰 놈이니까 어디서 발견돼도 되겠죠? 일단은 조금 있다 진행할 군단장 레이드나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알겠어요, 드로 형.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홀연히 떠난 칼 데드라의 모습에 다시 돌아와 흑벽을 살펴봤다.
하지만 역시나 이곳은 놈의 등장만을 위해 준비된 장소였는지, 특별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레어가 아니라 봉인되어 있던 전설.
미스틱 드래곤을 테론 대륙에 풀어준 것으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그리고 약속은 약속.
마을로 돌아간 나는 홍길동을 만나 약속한 제보비를 고스란히 건네주었다.
물론 놈은 그 돈을 받은 대가로…… 타연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됐지만!
* * *
“조금만 더 집중해 주세요! 이제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드로야, 잠시 두 발자국만 빠져! 곧 광역 쓸 것 같다!”
“오케이!”
둥글게 펼쳐진 진형.
우리 길드 전원이 모여 레이드를 시작한 지도 벌써 30분이 지났고.
제각각 발 빠르게 움직이며 저마다 숨돌릴 틈 없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슬슬 끝이 보이는구나!’
마지막 페이즈에 돌입하면서 외형이 변화된 보스 몹.
괴수 군단장 제르몬이 흘리는 푸른 피의 양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네임바의 체력 또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력한 공격력과 체력, 수많은 부하 몬스터들을 소환하는 패턴을 보유해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에 상대했던 바다의 왕, 투 뮤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레벨은 더 높을지 몰라도 소환 보스몹의 특성상 대인(對人) 스킬이 생각보다 다채롭진 않았던 것.
그 덕에 첫 트라이임에도 불구하고 레이드는 큰 고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론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겠지만.
“좋았어, 잘 피했다! 다시 붙어!”
“한 번 더 광역 쓰지 못하도록 전부 다 붙어요! 이번에 끝내버립시다!”
“다들 극딜 모드요!”
내 오더에 모든 근접 딜러들은 각자의 이동기를 사용해 제르몬에게 몰려들었다.
그리곤 저마다의 필살 스킬들을 사용해 순간 공격력을 극대화시켰고.
『크아아! 내가 고작 이런 놈들에게……!』
[업적 ‘마족 처단자’를 획득했습니다.]
마침내 요정계의 필드 보스인 괴수 군단장을 쓰러뜨렸다.
“와! 잡았다!”
“또 첫 트라이 만에 잡았네요! 역시 무적의 버닝스타!”
“하하! 몹몰이 한다고 지겹게 봐서 그런지, 도무지 무섭지가 않더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지만, 필드 보스의 퍼스트 킬을 가져가는 일은 늘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대박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르몬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
그 위에 놈이 드랍한 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필드 보스는 필드 보스구나! 드로 템 줍는 모습 좀 봐라. 대체 몇 개를 떨군 거야?”
“업적이 하나밖에 안 떠서 별론 줄 알았는데…… 역시 군단장이네요! 하긴 차고 있던 게 있는데 이 정도는 줘야죠!”
“이름만 왕이고 헐벗었던 투 뮤탄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에이, 양보단 질이 중요하죠. 어때요, 드로 형? 이놈한테도 디바인 뜬 거 있어요?”
주거니 받거니 레이드 성공의 단맛을 즐긴 축빙 형님과 라챤이.
녀석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 또한 주운 템들 중에 디바인이 있는지부터 살펴보고 있었다.
‘있다!’
그리고 다른 레전더리 템들 사이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화려한 장비 하나를 발견했다.
<에르카다(디바인, 방패)>
* 공격력: 1070
* 방어력: 1450
* 마법 방어력: 820
* 모든 능력치 +60
* 모든 속성 내성 +15%
* 방패 관련 스킬 레벨 +1
* 방패 관련 스킬의 사용 대기 시간 감소 50%
* 피격 시, 25%의 확률로 ‘어둠 보호막’ 발동
* 암 속성 마법 및 스킬을 가드 성공 시, 데미지 흡수 및 체력 회복으로 치환
* 이 아이템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괴수 군단장이 하사받은 마계의 귀중한 무구 중 하나입니다.
* “그분이 주신 이 방패로, 언제나 최전방에 앞장서리라!” -마왕군 괴수 군단장 제르몬-
“오랜만이네요. 방패가 뜬 건!”
“오, 정말? 레벤다스 이후로 처음 아냐?”
비록 타이탄 소환 옵션은 없었지만, 그래도 디바인은 디바인.
게임 속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희귀성을 제외하더라도, 옵션 자체가 레전더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와, 이 방패에도 레벤다스처럼 올 속성 내성이 15%나 붙어있네? 아쉽다. 쌍검만 아니었어도 방패를 진지하게 고민해 봤을 텐데!’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제공하는 타연이기에, 설사 도둑이라 할지라도 방패를 착용할 수 있다.
그저 방패 관련 스킬이나 마스터리 등을 익히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할 뿐.
따라서 나 또한 암 속성 내성을 높이기 위해서 레벤다스나 지금 뜬 이런 방패 등을 차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공격력을 얻기 위해 ‘마나 쉴드’라는 최강의 방어 테크트리를 포기한 내가, 오직 내성 때문에 마신검을 포기하고 방패를 찬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자, 다들 모여보세요. 드랍 템들 공유해 드릴게요.”
또한 무엇보다, 지금 얻은 템들은 나 혼자 잘해서 먹은 게 아니었다.
길드 전원이 힘을 합쳐 열심히 노력한 끝에 얻은 결과.
나보다 훨씬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직업들이 있기에 조금도 욕심나지 않았다.
“간만에 보는 부자 보스네요. 괴수군단장의 판금 갑옷 세트. 이것만 해도 완성 템 3피스고요, 활도 하나 나왔어요. 그리고 각각 장갑과 허리띠 하나씩, 마지막으로…… 블랙 드레이크의 뿔과 알. 아마 이게 가장 메인인 템인 것 같죠?”
나는 기다리는 길드원들을 위해 채팅창에 제르몬이 드랍한 템들의 정보를 전부 링크 걸어줬다.
대부분 레전더리급의 완성 템들.
확실히 예전보다 보스 몹의 레벨이 높아져서 그런지, 이제는 유니크급 따위는 나오지도 않았다.
“와, 뭐 이리 많이 드랍했지? 얼쑤? 갑옷엔 세트 착용 효과로 뎀감도 붙어있네?”
“괴수 군단장의 조련 장갑? 뭐죠? 이걸 차면 펫을 하나 더 소환할 수 있다는데요?”
각종 특이한 옵션이 붙어있는 장비들.
하나같이 타연에는 처음 등장하는 장비들이라 그런지, 보기 드문 옵션들이 붙어있었다.
“잠시만 조용! 다들 템 스펙은 충분히 확인해 봤지? 이제 템 분배를 시작할 거니까 모여 봐.”
전부 살펴보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 흐른 뒤, 축빙 형님이 모두를 불러모았다.
우리 길드만의 특별한 템 분배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다들 준비된 거 같으니 먼저 디바인부터 시작할까요? 방패라서 축굴이와 연우, 둘 중 한 명이 갖는 게 좋겠네요. 근데 축굴이한테는 이미 레벤다스가 있으니까 연우에게 줄까 하는데요, 다들 동의하시나요?”
내 말이 끝나자 거수로 투표를 진행했고.
예상대로 전원 손을 들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원래 다른 길드에서라면 각자의 참여도 및 공헌도 등을 계산해 템을 분배받곤 한다.
하지만 우리 버닝스타 길드는 달랐다.
드랍된 템을 가장 잘 활용하고 필요로 하는 직업에게 우선권을 주는 게 우리 길드의 한결같은 원칙!
각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템을 분배했던 것이, 오늘 이렇게 우리가 군단장의 퍼스트 킬을 가져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우는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운 좋게도 디바인 방패를 분배받게 되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아직 디바인을 하나도 못 가지신 분들도 많은데…….”
“드로 형이랑 장비가 겹치는 제 직업이 잘못인 거죠. 그래도 이제 무기는 두 손 다 찼으니까, 곧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잘 써주세요! 최강의 방패 기사 누님!”
당당이가 뭔가 자조적인 말투로 말했지만, 사실 다들 이런 분배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진 않았다.
그동안 테네시 단검을 넘겨주거나 암살검이나 펠아린의 부츠의 봉인을 해제하는 등, 내가 길드원들을 위해 애써온 것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3피스나 전부 받아도 되는 거예요? 이거 레전더리 장비라고요……?”
“판금 갑옷을 입을 사람이 너밖에 더 남았어? 마침 마계 군단장이 드랍한 거라 그런지, 암흑 기사를 택한 너하고 잘 어울리네. 다들 찬성하시죠?”
그리고 군단장의 판금 갑옷 세트는 성기사에서 암흑 기사로 전직한 대탐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세트 아이템의 특성상 피스 별로 나눠 갖는 건 효율이 떨어졌기에, 다들 한사코 한 사람이 전부 가져가는 게 맞다고 통 크게 양보해주었다.
그렇게 활은 축빙 형님의 서브 무기로, 조련 장갑은 라챤이, 마나 리젠률을 급격히 늘려주는 반지는 축볼 누님의 몫으로 돌아갔다.
“저기…… 죄송한데 블랙 드레이크의 뿔은 제가 가지면 안 될까요?”
“어? 뿔? 파랑아, 이걸로 뭐 제작하려고?”
이제 단 두 개만 남은 시점, 반지를 누님께 양보한 기파랑이 뿔에 대한 욕심을 어필했다.
“그게 아니라…… 그걸로 무기 같은 장비 템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제가 각인하는 데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아, 소환 매개체? 맞네, 그게 있었구나!”
재료템인 어금니를 매개체로 오크 로드 데스 나이트를 손에 넣었던 기파랑.
기존 필드에 있는 레드 드레이크에게선 나오지 않던 ‘뿔’이 드랍되자, 한눈에 매개체일 거란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제가 이중 직업을 택하느라 상위 직업으로 전직하지 않아서…… 하던 대로 소환 스킬 위주로 전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려면 계속 더 강한 놈을 구해야 하고요. 마침 상위 소환 스킬이 주어졌던 게 있는데, 딱 이놈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제가 뿔을 가져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넌 아무것도 분배받지 못했잖아! 다들 들으셨죠? 바로 투표할게요!”
볼 것도 없이 전원 손을 들어 찬성을 표했고, 뿔을 건네받은 기파랑은 곧바로 각인을 시도했다.
“본 드래곤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