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월드 보스 레이드 (2)
덜그덕 덜그덕!
기파랑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뼛조각들.
하나둘씩 제각각 이를 맞물며 모양을 갖춰가더니, 이내 훼라리의 딱 두 배쯤 되는 크기의 소환물이 완성됐다.
살과 비늘이 없는…… 오직 뼈로만 이루어진 드레이크가!
<기파랑의 본 드래곤>
“와! 이거 뭐야? 간지 쩌는데?”
“네크로맨서 개사기였네! 해골용 소환도 가능했던 거야?”
“와, 이놈 크기 좀 봐. 원래 군단장이 타고 다니던 그 크기 그대로잖아?”
퀭한 어둠밖에 없는 빈 동공.
연신 차가운 입김을 뿜어내는 이빨밖에 없는 주둥이.
비록 뭔가 허전해 보이고 덩치도 큰 편은 아니었지만, 머리 위에 보이는 ‘본 드래곤’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다.
아니, 특별한 게 맞았다.
지금껏 타연에는 이런 소환물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으니까.
“원래는 실전용이 아닌 그냥 감상용으로 주어진 건가 싶은 신규 스킬 떴었어요. 저도 굳이 배울 생각은 없었는데, 이 재료 템이 나온 김에 남는 스킬 포인트로 방금 익혔네요. 다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얻은 이놈, 앞으로 잘 써먹을게요!”
모든 게임 속 네크로맨서의 로망, 데스 나이트와 본 드래곤.
하지만 설마 타연에도 둘 다 구현해 두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몰라도 본 드래곤 소환은, 아무리 봐도 다수의 일반 유저들이 쉽게 익힐 만한 스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네크로맨서네요! 제대로 키우려면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직업이라더니……. 드레이크나 드래곤이 주는 재료 템을, 일반 유저들이 뭔 수로 구하겠어요?”
오크 로드 데스 나이트에 이어 블랙 드레이크로 만든 본 드래곤까지.
자신이 소환한 본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타 보는 기파랑을 보며, 새삼 솔플의 최강자는 네크로맨서란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조련 장갑만 있다면 나도 펫을 두 마리씩 꺼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착용 중인 윌리펑의 전투 장갑이 월등히 좋을뿐더러 내게 안성맞춤인 템이었다.
피스 별로 끝판왕급 템을 갖추고 있다 보니 감내해야만 하는, 일종의 폐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드레이크의 알만 남은 거지?”
“맞아. 자, 이게 무슨 템인지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죠? 필요하신 분?”
“…….”
나와 대탐이를 제외한다면, 다들 한 번쯤은 욕심을 낼 만한 템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드랍 템 중 최고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디바인 방패겠지만, 다음으로는 이 템의 가치가 가장 높았다.
괴수 군단장이 타고 다니던 블랙 드레이크.
레이드 초반에 썰어버렸던 그 몬스터를 자신의 펫으로 만들 수 있는 템이었으니까.
“그리폰의 알처럼…… 마탑에 가서 부화시키면 바로 타고 다닐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다리우스가 타고 다니던 그 드레이크와…… 똑같은 놈이겠죠.”
“형처럼 드레이크를 일대일로 꼬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사실상 현재로선 드레이크를 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겠네요.”
“거기다 다리우스가 탄 놈을 보니, 레벨은 오히려 훼라리보다 더 높아 보이더라! 이런 템이 드랍된 건 역시 퍼스트 킬이었기 때문이겠지? 아마 다음 드레이크 알이 드랍되려면 한참은 걸릴 거야.”
처음 훼라리를 꼬실 때보다 평균 레벨은 상당히 높아졌지만, 여전히 드레이크 테이밍을 시도할 수 있는 유저는 극히 드물었다.
테이밍 과정에서 힐링은커녕 그 어떤 사소한 버프라도 받으면 실패 판정이었기에, 사실상 어느 정도의 딜링과 자가 힐이 있는 성기사 정도만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공격력이 약한 편이라 빨리 잡기는 힘들었으니, 지금은 더욱 붐비게 된 센츄라 화산 지대에서 방해받지 않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사실상 이 알은 최소 훼라리와 동급 이상의 드레이크를 품고 있었고…….
부화만 시키면 누구나 놈의 주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그 값어치는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다들 드레이크만은 저한테 양보해주시면 안 돼요? 딴 건 다, 심지어 앞으로 디바인 템이 나오더라도 전부 양보해 드릴게요!”
“응?”
한데 분배 중에도 계속 조용하던 현중이가 갑자기 욕심을 드러냈다.
‘하긴. 우리 길드의 메인 탱커인데…… 종이 몸인 페가수스로 활약하려니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 녀석이 라챤이나 당당이처럼 치고 빠질 수 있는 포지션도 아니니까.’
사실 우리 중, 드레이크 탑승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현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비록 다리우스같이 라이딩에 특화된 돌격 기사는 아닐지라도, 수호 기사에겐 자가 힐과 다양한 자버프 등이 있었으니 강한 펫을 가질수록 유지력과 생존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렇네? 알은 현중이가 가져가면 딱이겠네. 드레이크를 펫으로 갖게 되면 서로 체력을 공유할 수 있는 드래곤 라이더 업적도 주어지잖아? 가뜩이나 몸빵킹이 됐는데 더 끝내주게 변하겠는데?”
“맞다! 그렇겠구나? 드로가 가진 그 업적을 얻게 되면, 피가 엄청 뻥튀기되는 셈이잖아? 올…… 우리 현중이, 언제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확실히 길드의 메인 탱커가 됐더니만 책임감이 좀 생겼나 봐?”
그런 현중이를 기특하게 바라보는 축빙 형님과 축볼 누나.
하지만 녀석은 그런 의도로 말했던 게 아니었다.
“네? 무슨 소리들 하세요? 업적이요?”
“응? 탱커 역할을 더 잘하려고 양보해달란 거 아니었어?”
“잉? 그건 하나도 생각 안 해봤는데…….”
“뭐야? 그럼 뭐 땜에 알을 갖고 싶다는 건데? 설마 스피드?”
“그야 당연히 엄청 간지 나니까요. 그것도 철철철철!”
“…….”
현중이의 어이없는 발언에, 이곳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나 탐내는 아이템을 갖고 싶은 이유가 고작 ‘외형’ 하나 때문이라니?
봐도 봐도 녀석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듣고 보니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검은 용을 탄 채로 날아다니던 다리우스.
나 같은 도둑이 아닌 기사가 타고 있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긴 했으니까.
“검정이라서 좀 걸리긴 하는데…… 뭐 블랙 앤 화이트도 나름 멋지긴 하잖아요? 아쉽지만 내 올 화이트 아이덴티티도 이참에 한 번 변화를 줘 보죠 뭐. 아참, 다들 동의하시는 거예요? 제가 알을 가져가는걸?”
“……빨리도 묻는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너 대신 가져갔다가 얼마나 눈총받으면서 게임 할지 눈에 훤하다.”
“저도 포기요. 저희 분배 원칙이 원래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거잖아요? 현중이 형만큼 블랙 드레이크가 필요한 사람도 없어 보여요. 물론 좀 의미는 다르지만…….”
중증의 룩덕 환자.
룩에 살고 룩에 죽는 현중이 놈을 마지막으로 분배는 끝이 났다.
겉에 차고 있는 게 많을수록 드랍하는 템도 많다는, 타연에만 있는 속설이 그대로 들어맞은 레이드였다.
이렇게 길드원 대부분을 만족시킨 레이드는 끝이 났지만, 아직 우리에겐 하나 더 잡을 것이 남아있었다.
하늘 어딘가로 사라진 미스틱 드래곤.
그놈을 찾기 위해 요정계를 나오려는 순간, 놈의 행방을 알려주는 귓속말이 들어왔다.
(지옥불: 드로야, 다시 귓속말을 켠 걸 보니 레이드가 끝났나 보구나? 군단장은 무사히 잡았니?)
(나: 네, 형님. 전원 노다이로 퍼킬에 성공했습니다.)
(지옥불: 잘됐구나. 그럼 우리 번스타인 성으로 당장 와봐라. 너에게 보여줄 게 있다.)
* * *
“이럴 수가…….”
“조금 놀랐지? 갑자기 나도 이런 일을 당하니까 말이 나오질 않더구나.”
“아니 형님! 이렇게 당하셨으면서 어떻게 귓속말을 그렇게 느긋하게 보내실 수 있어요?”
“어차피 벌어진 일인 걸 뭘. 신경 쓰지 마라. 너희라도 군단장 레이드에 성공했으니 다행이구나.”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형님……. 이게 다 제가 놈의 봉인을 풀어서 벌어진 일인걸요…….”
여전히 가장 많은 유저들이 붐비는 성 중 하나, 번스타인.
이곳으로 공간이동하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외성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잔불들.
무너진 건물과 성벽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내성 안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주성과 그 앞 정원이 완전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괜찮다. 어차피 외형만 이런 거지, 행정관에게 골드만 주면 전부 깨끗이 복구된다는 걸 확인했다. 물론 돈은 제법 깨지겠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설마 놈이 이런 짓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신중하게 봉인을 풀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아버리는 거였는데…….”
“아서라. 그 누가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겠어? 그건 그렇고 정말 황당할 정도로 거대하고 강한 놈이더구나. 아무리 성룡이라곤 해도 투 메르타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어.”
이곳 번스타인 성을 공격한 존재.
그건 바로 미스틱 드래곤, 칼 데드라였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칼 데드라는 하늘 위를 날아와 번스타인의 내성 상공을 맴돌았다고 한다.
뜬금없고 갑작스러웠던 드래곤의 등장.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의 모습에 놀란 사람들은 호들갑을 떤 것도 잠시, 곧이어 유저들은 놈을 구경하기 위해 내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롸롸롸!
놈이 성을 향해 블랙 드래곤의 고유 스킬인 ‘애쉬드 브레스(acid breathe)’를 시전했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폐허가 된 성과 수많은 유저들의 떼죽음이었다.
‘크윽! 레이드에 집중한답시고 잠시 귓속말을 꺼둔, 그사이에 나타났었다니!’
그리고 난 그 사실을, 다시 귓속말을 켜기 직전까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여하튼 귓속말은 다시 껐지? 계속 켜 놔 봤자 한동안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거다.”
“아뇨, 지금 끄려고요. 안 그래도 장난 아니더라고요. 지금까지 들어본 욕들보다 지금 잠깐 들은 욕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 죽겠네요…….”
따라서 공간이동을 하고 이곳에 오는 잠깐 사이, 내게 쏟아진 욕설 귓속말만 해도 수백 개가 넘었다.
(토마토토: 미스틱 드래곤을 찾던 이유가 이거였나요? 유저들 필드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만들려고? 와, 태성한테 죽는 것도 어이없었는데.... 이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보스 몹을 무서워하며 겜하게 생겼네.)
(메두사2: 대체 뭔 놈을 불러낸 거예요? 산드로님 정말 실망이에요. 이거 전부 다 알고 벌인 일이죠?)
(태성태세: 죽어라 개드로!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제발 좀 타연에서 꺼져버려!)
[귓속말 기능을 껐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유저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역대급 제보비까지 걸며 어그로를 끌었던 존재.
그 미스틱 드래곤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누가 이 사단의 원흉인지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전지대인 외성 마을에 있던 유저들은 무사했지만…….
멋모르고 내성에 몰려들었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만도 천 명 이상.
그만큼 놈의 브레스는 공격력도 공격력이었지만 범위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넓었다.
도저히 공격대 규모로 레이드할 수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보아하니 예전 히드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상의 임팩트인 것 같다. 초거대 보스 몹에 붙는 ‘재앙’이란 타이틀에 무려 ‘화신’이 덧붙여진 놈이기도 하고.”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어요. 전설의 레어란 곳에 머무는 놈일 줄 알고 수배를 때렸던 건데……. 그래서 찾기만 하면 남들 몰래 조용히 잡아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일 줄이야.”
“한 곳에 머물던 놈이었어도 너희만으로 잡아내지는 못했을 거다. 직접 본 내가 판단하기에…… 놈은 어쩌면 황제보다 더 강한 보스일 수도 있어.”
“네? 정말요?”
황제를 잡기 위한 선행 코스로 택한 게 미스틱 드래곤인데…… 놈이 황제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니?
주객이 전도된 형님의 말에 난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그래. 대신 황제처럼 소수로 잡는 놈은 아닌 거지. 이곳 번스타인에 나타난 것만 해도 그렇다. 이렇게 많은 유저들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보스 몹이라니…… 놀랍지 않아? 그리고 놈이 과연 우리 성만 공격하고 끝날까?”
“아마도 다른 성도 공격할 확률이 높겠죠……?”
“맞다. 놈은 애초에 성 단위급 유저들은 모여야 대항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보스 몹인 거야. 수백 명 단위를 넘어서 수천, 수만 명이 함께 레이드에 참여할 만한 수준의!”
“수, 수만 명이라고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준 칼 데드라.
놈을 레이드하기 위해선 그렇게나 많은 유저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그래. 아마도 게임 속에 설정된 최고 등급의 보스 몹. 미스틱 드래곤은 타연에선 처음으로 등장하는 월드 보스(world boss)급 몬스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