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월드 보스 레이드 (3)
“월드 보스급이라고요?”
타연을 접하기 전까지, 수많은 게임을 경험해보았다.
그렇기에 형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월드 보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라 게임마다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쓰였지만, 한 가지만큼은 동일했다.
일반적인 보스급을 뛰어넘는 강력한 몬스터.
세계관 내에서 최강급이자 필드 전역을 넘나들기도 하는, 그야말로 끝판왕급 보스라는 사실이.
“스토리상 용족은 마족과 동등한 관계. 따라서 드래곤은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흔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아니지.”
“아직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직전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칼 데드라는 마계와는 별개로 신마전쟁 이후에도 온갖 패악을 저지르다 용사들에 의해 봉인된 존재로 알려졌다. 숱한 전설에 등장하고 NPC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놈인 만큼, 놈은 다른 드래곤들과는 구분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놈일 거야.”
“그렇군요. 그래서 형님은 칼 데드라가 기존에 없었던 초대규모급 레이드 보스로 만들어진 거란 것이고요?”
“사실 타연 같이 방대한 맵을 만들어뒀으면, 나라도 이런 생각이 들 것 같다. 수많은 유저들이 다 함께 힘을 합쳐 무언가에 대항하는 구도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물론 제2의 신마대전인 마왕군과의 전쟁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당장은 미스틱 드래곤을 통해 유저들에게 맛만 좀 보여주는 거지.”
형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은 정말 이제껏 나왔던 그 어떤 필드 보스와도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놈이라는 걸.
애초에 어디에 있는지, 뜨면 어느 곳을 돌아다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보스 몹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기존 최고의 대형 보스 몹보다 2배는 거대한 크기, 동시에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데미지를 주는 말도 안 되는 광역 스킬 등등.
그저 백 명 안팎의 공격대만으로도 잡을 수 있는 필드 보스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현실을 모르는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골치 아프게 됐네요. 이러려고 제가 천만 골드나 쓴 게 아닌데…….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잡아야 하는 놈이라면 저희가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없잖아요? 거기다 원하던 템은 먹기조차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말이 수만 명이지 레벨이 높다면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도 가능할 거다. 그리고 돈이야 아깝긴 하다만 그게 아니었다면 이놈이 언제 타연에 등장했을지 모를 일이지. 만약 놔뒀다면 몇 달은커녕 일 년은 더 지난 후에야 봉인이 풀렸을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욕 좀 먹고 있다고 해서 너무 신경 쓰진 마라.”
“저요? 전 괜찮아요. 쭉 봐오셔서 알겠지만, 이래 봬도 멘탈이 제법 강하잖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형이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해오면서 느낀 점은…… 당장은 풍파에 시달릴 순 있어도 뿌리만 견고하다면 결국엔 바람은 잦아든다는 것이었다. 네가 잘못한 게 없다면 지금 쏟아지는 비난들도 결국엔 없어지고 만다. 반드시!”
“…….”
내가 벌인 행동으로 유저들이 피해를 봤단 사실이 한없이 미안했지만, 실은 형님께 가장 죄송했다.
하필이면 미스틱 드래곤이 형님의 영토이자 리버스 국의 수도나 다름없는 번스타인 성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형님은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내게 이런저런 충고와 함께 위로까지 건네고 있었다.
“그러니 너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자책하지 마라. 어차피 그렇게 만들어진 몬스터인데 지금 당하나 나중에 당하나 결국 벌어질 일이었다. 그저 최초로 나타났던 거라 호기심에 다가온 유저들만 호되게 당했던 거지, 앞으론 유저들이 직접적으로 피해 볼 일은 적을 거야. 물론 우리 같은 성주들 입장은 다르겠지만, 후훗.”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도 갑자기 당한 봉변에 경황없으실 텐데…….”
“하하! 이 정도는 신경 쓰지 말랬지? 게임 열심히 잘 해서 봉인을 푼 것뿐인데, 내가 거기에 죄를 물을 사람 같으냐?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둔 일루전이 사죄한다면 모를까 네가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리고 자고로 이런 말도 있잖아.”
“네? 어떤 거요……?”
“매도 일찍 맞는 편이 낫다! 우리 성은 이미 공격하고 갔으니까 앞으로 공격받을 일도 없겠지. 남은 성이 24개나 있는데 말야! 하하하!”
“하핫! 정말 그렇겠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지옥불 형님.
이제 함께 한 시간도 적지 않게 됐지만, 내 생각은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형님을 닮고 싶다는…….
정말이지 형님과 같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그러니 당장 대비를 하자. 안 그래도 네가 이곳에 오는 동안 생각해본 방법이 있는데…….”
“벌써요?”
“아직 우리밖에 당하지 않아서 단정 짓긴 이르지만…… 놈은 아마 안전지대가 아닌 지역 중,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을 위주로 공격할 것 같다. 우리 번스타인을 먼저 방문한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고.”
“오오, 그럴듯한데요? 안 그래도 홍길동이 퀘스트 도중에 놈이 풀려나면 대륙 전역을 공격할 것 같다는 암시가 있었다고 말했어요.”
“역시 그렇군. 아무튼 그 가정이 맞다면 다음 타자로 공격할 곳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굳이 첫 타자로 제국을 치지 않은 걸 봐서 그곳은 예외로 둔다면…… 분명 인구 밀도가 높은 ‘유저’ 소유의 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될 수 있다는 프로게이머.
그들 중에서도 전설이라고 불리는 지옥불 형님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는 사이, 형님은 조그마한 단서들을 토대로 이미 어지간한 분석은 전부 다 끝내놓으신 것이다.
“맞다. 다음 타자는 태성이나 너희 프리덤 국, 그중 인구수가 많은 성 중 하나가 될 확률이 높다. 지금으로서는…… 아마도 너희 아베르 성이 될 확률이 가장 높겠지.”
“뭐예요? 그럼 굳이 저희가 미스틱 드래곤을 찾아 나설 일도 없겠네요!”
유저와 유저 간의 전투가 주를 이루는 공성전.
이번엔 태성이 아닌, ‘다른’ 종류의 적이 우리 성을 쳐들어오는 걸 가정한 수성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단일 몬스터 최강.
날아다니는 공중 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미스틱 드래곤의 침공을!
* * *
[핑크래빗: 계속 제보를 받고 있는데.... 어디에도 미스틱을 발견했다는 사람은 없네요. 그 큰 게 보이지 않는다니... 정말 이 정도면 증발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요?]
[산드로: 그래요? 확실히 페가수스 라이더들이 수천 명은 가뿐히 넘어가는데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네요. 어디 다른 차원에 있다가 딱 공격할 때만 슉하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축복받은얼굴: 오, 그럴싸한데? 게임이니까 그렇게 구현해놨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잖아?]
미스틱 드래곤의 번스타인 침공 이후.
타연에는 또다시 신선한 충격이 가해졌다.
내가 그렇게나 호들갑 떨며 찾던 미스틱 드래곤이 떡하니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그놈이 첫 등장부터 직접 도시를 찾아와 유저들을 학살했다는 건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놈의 정확한 습격 메커니즘이 밝혀지기 전이기에, 그런 놈이 겁나 필드에 나가는 걸 꺼리는 유저들이 생겨났고.
가뜩이나 태성의 무차별 PK에 지쳐있던 유저들의 원성은 다시금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나, 산드로에게.
[산드로: 뭐야, 채팅창 보고 있었냐? 어때, 드레이크는 부화 끝났어? 마음에 드냐?]
[축복받은얼굴: 진작에 끝났지! 지금 내 다크썬더의 코스튬을 찾아보고 있으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얼마나 멋진 놈으로 나타날지!]
[산드로: 컥! 다크썬더? 설마 그걸로 이름 지은 거 아니지?]
[축복받은얼굴: 맞는데? 어때, 간지 쩔지? 졸라 강해 보이지 않냐?]
[산드로: 넌 정말 답이 없구나.... 중2병도 저 정도면 말기다 말기.]
[축복받은얼굴: 뭔 헛소리야? 네 훼라리는 뭐 잘 지은 이름인 것 같냐? 니 작명 센스는 생각 못 하고 어디서 지적질이죠?]
[축복받은무빙: 둘 다 채팅창으로 뭐 하고 있냐.... 이런 놈들이 타연의 최정상 랭커들이라니... 어디 가서 이런 티는 절대 내지 마라. 정말이지 창피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길드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지옥불 형님의 충고대로 난 이런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길드원들에게 미리 당부했다.
어차피 그렇게 만들어진 보스 몹이니까 당장의 비난과 오해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그리고 비난이 하루빨리 사라지게 만들려면, 역시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놈을 퍼킬하는 게 최선이라고.
그래서 전혀 동요하지 말고, 하던 대로 스펙 향상에만 집중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그 말을 이렇게나 잘 들어 처먹는 놈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축복받은얼굴: 아, 형님은 맨날 내가 말만 하면 뭐라 그러시더라? 전 국민의 욕받이인 드로 놈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저놈이 욕먹든 말든 아직 나 멋있다는 유저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 팬들은 무시하는 거예요?]
[산드로: 됐다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싸움을 하겠냐? 그나저나 흑풍단의 주요 길마들까지 전부 다 만나봤으니.... 이제 한 곳만 남았네요.]
[연우: 고생이시네요 오빠. 저희야 사냥만 하느라 상관없지만.... 피닉스 라인의 동맹 길드와 화랑, 피스메이커, 흑풍단 등등... 정말 몸이 하나라도 남아나지 않겠어요.]
[산드로: 그래도 다들 함께하시기로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다행이지.]
[무적살라딘: 남은 한 곳은 어디야?]
[산드로: 원래는 염두에 없던 곳인데, 갑자기 떠올라서요. 딱히 큰 길드는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랭커들이 많은 곳이 있더라고요. 합류만 한다면 큰 힘이 돼줄 것 같아요. 앗,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요. 지금 만나니까 헤어지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막 약속했던 생명의 숲 인근에 도착하자, 만나고자 한 인물들이 보였다.
그래서 채팅을 멈추고는 훼라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탓.
멋진 제비 돌기로 지상에 착지한 다음, 함께 기다리고 있던 로만전자와 관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두 분 모두.”
“반갑습니다, 산드로 님.”
“오랜만이군요.”
일전 나를 비롯해 우리 버닝스타 길드 전원과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회사, 로만 전자.
곧이어 박태후 측에게 우리의 개인 정보가 유출되어 따지는 과정에서 그들과 데면데면한 사이가 돼버렸지만, 사실 로만 전자 측에서도 불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로 간의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관우는 그 불만을 토로해왔다.
“이번에도 또 대형 사고를 쳐버리셨더군요……. 아무리 계약 조건에 플레이에 관한 제한 사항이 없었다곤 해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최근엔 유저들의 비난이 너무나 폭주해서, 스폰 계약 체결을 주도한 사람을 징계 줘야 하는 목소리마저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어요.”
“아이고…… 그건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계속 그렇게 진행되더라고요. 그래도 저희가 다리우스를 킬하거나 태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던 건, 꽤 원하셨던 그림이 아니었나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버닝스타에 관한 민심이 너무도 빠르게 급하강하고 있는 건 큰 문제입니다. 정말 이미지가 좋았던 길드인데, 이렇게 악화일로만 선택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대로라면 정말 스폰 계약을 조기에 해지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저희 전략상 당장은 공개할 수 없어요. 그리고 스폰 계약 또한 돈도 돈이지만 저희의 안전을 위해 받아들였던 건데…… 생각보다 도움은커녕 위협만 주셨으니 조기에 끝내신다 하더라도 상관없고요.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저희 버닝스타는 조만간 태성 길드를 해체시켜버릴 건데요?”
“물론 저희 측 잘못은 몇 번이나 사죄드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게 정말입니까? 태성을 곧 해체시킨다는 것이요?”
오늘은 처음부터 대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관우.
그가 나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며 쳐다봤다.
“물론입니다. 지금의 비난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나중 가시면 전부 다 이해하실 날이 올 테죠. 물론 현재 벌어진 미스틱 드래곤의 행패는 큰 문제죠. 그래서 당장 이것부터 해결할 생각인데…… 그래도 저희와의 계약을 해지하실 건가요?”
“하하! 그럼 그렇지! 역시 산드로 님이시군요! 하긴 숱한 비난에도 크게 연연해 하지 않으시길래, 무슨 계획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하는 관우.
확실히 게이머에 앞서 기업인이라는 느낌이 더욱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그쪽에서도 힘을 조금만 보태주시죠?”
“네? 힘이라니…… 무슨?”
“로만 전자 측에 있는 랭커 분들 말이에요. 이번 한 번만 저희에게 힘을 좀 빌려주세요. 함께 미스틱 드래곤을 레이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