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월드 보스 레이드 (4)
“저희보고 레이드에 참여하라고요?”
수천만 타연러 중 단 200명밖에 없는 천상계 유저, 랭커.
이제 그중 80% 정도는 태성 라인과 피닉스 라인, 두 진영에 속해 있었다.
원래는 이 정도 비율까지는 아니었지만, 치열해진 스펙 경쟁과 두 진영의 신규 사냥터 선점으로 인해 중립 유저들의 비율이 확연히 줄어들게 된 것.
특히 최근 있었던 시공의 틈새와 천계 지역의 공개는 양극화를 가속화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네. 현재 로만 전자 측이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랭커만 해도 8분이나 계시죠? 그 외 랭커급에 이른 분들도 30분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잘 알고 계시군요. 얼마 전 저도 게시판 끝자락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총 9명의 랭커를 보유하게 됐긴 합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요.”
“아! 관우 님도 랭커가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현실에서도 바쁘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여하튼 그건 그거고……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렇기에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중립 상태로 있는 랭커들의 향방이 중요했다.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았기에 자유로운 그들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다른 진영에 속하는 순간 상당한 전력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일종의 캐스팅보터(casting voter) 역할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제안을 왜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물론 저희가 뛰어난 유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이 돼드리긴 힘들 텐데요? 당연히 저희가 태성 측에 힘을 보태줄 리도 없으니 퍼스트 킬을 저쪽에 빼앗길 염려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저희의 전속 팀원들은 기업 이미지상 유저 간에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한쪽 라인에 힘을 보태 저희의 정체성을 잃는 손해를 택하고 싶진 않군요.”
말하자면 우리와 맺은 스폰 계약은 꼼수였다는 뜻.
하지만 나는 그들이 우리 라인에 합류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고레벨 보스 몹에게 데미지 보정 페널티가 없고 명중률이 높은 랭커 한 명의 존재는, 딜링 측면에선 어지간한 고레벨 유저 수십 명보다 나았다.
그러니 비록 그들이 소수일지라도 미스틱 드래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도움이 돼줄 수 있었다.
또한 염려하는 바와 다르게 그들은, 기존의 정체성을 버릴 필요도 없었다.
“전 저희와 함께 태성을 상대로 싸워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레이드를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죠.”
“산드로 님…… 말씀에 어폐가 있군요.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엄연히,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항입니다. 아직 미스틱 드래곤이란 놈에 대해 잘 모르셔서 하는 말씀 같은데…… 놈은 고작 수백 명이 힘을 합쳐 잡을 만한 보스 몹이 아닙니다. 타연에 최초로 등장한 월드 보스. 즉, 최소한 수천 명 이상의 유저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잡을 만한 놈이죠.”
“수천 명이라고요? 그렇다면 산드로 님이 하신 말씀은……?”
“네, 예상하신 게 맞습니다. 로만 전자의 랭커들은 대규모 혼전 레이드 현장에 그저 ‘참여’만 해주시면 됩니다. 놈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한 명 한 명의 일반 유저로요.”
수천, 수만 명의 레이드 인원이 피닉스 라인의 유저들로만 채워지게 될까?
당연히도 그건 아니었다.
놈의 공습과 레이드 도전 소식을 알려지게 되면, 수많은 유저들이 그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 아베르 성을 방문할 것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참전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테고…….
그렇게 로만 전자의 유저들 또한 레이드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대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가장 최강이자 최고 레벨의 보스 몹인 만큼, 랭커 한 분 한 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추후 드랍 템에 있어서도 정확한 공헌도 계산에 따른 공정한 분배를 약속드릴 테니 저희와 함께 해주세요. 이미 100분이 넘는 랭커분들과 피닉스 라인의 전 길드들이 참여를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시고 벌써 그만큼의 인원을 모았다니……정말 산드로 님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유저시군요. 좋습니다. 듣고 보니 이번 레이드를 놓친다면 오히려 저희가 큰 손해일 것 같군요. 보나 마나 끝내주는 업적도 줄 것 같으니까요.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산드로 님.”
“정말 잘하셨습니다. 함께 영원히 기록될 추억을 한 번 만들어 보자구요. 전 유저들이 참여했던, 최초의 월드 보스 퍼스트 킬이라는 전설을!”
* * *
-마지막으로…… 실무자인 로만공식계정 대신 저를 콕 집어 뵙자고 하신 건, 궁금하신 게 있어서겠죠?
-역시 관우 님이시네요. 맞습니다. 혹시 새로운 소식이 있었나요?
-젠티스의 행방에 관한 조사는 계속 수소문 중입니다. 최근 성과가 좀 있어서 조만간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저희의 계약 사항 중 하나였으니, 최선을 다해 조사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관우와의 만남을 끝으로 만나야 할 유저는 전부 다 만났다.
지옥불 형님과 세운 작전의 준비를 거의 다 끝마친 것.
이제 조금의 아쉬움을 채워줄 마지막 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뭐냐? 사냥하라고 닦달할 땐 언제고 바쁜 사람 불렀어? 파티 사냥 때문에 이렇게 나 혼자 빠지면 곤란해.”
“인마, 드레이크 부화시킨답시고 요정계에 안 갔던 거 다 알거든? 아직도 삐져있냐? 그 다크썬더인가 하는 건 왜 안 보여주냐?”
아베르 주성 안에서 만난 현중이는 툴툴대곤 있지만 기쁜 기색을 감추진 못하고 있었다.
전 유저를 통틀어 드래곤 라이더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도 훼라리를 처음 테이밍했을 때는 하늘을 날 듯 기분 좋았으니까.
“기다려, 펫 전용 문신으로 뭘 새길까 고민 중이니까. 넌 훼라리를 너무 방치했어. 나라면 더 화려하게 가꿔주고 레벨업도 나보다 더 신경 써서 해줬을 텐데. 솔직히 말은 안 했지만, 주인 잘못 만났다고 몇 번을 곱씹었는지 모른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나저나 너 지금 레벨이 몇이지?”
“나? 418. 최근 죽어라 레벨업해서 엄청나게 올려 버렸잖아. 이젠 성기사 직업 랭킹 1위도 이놈 아니시겠냐!”
직업 랭킹 1위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나와의 레벨 차이가 이제는 10 정도밖에 안 난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아무리 천계와 요정계가 좋은 사냥터였고, 내가 이것저것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해도…….
이 녀석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한 놀라운 성장이었다.
“그럼 됐네. 그 정도면 레벨도 충분해. 아, 이걸 주기는 정말 아까운데……. 그래도 주는 게 맞겠지?”
“뭔 소릴 하는 거야? 뭐가 아까워? 설마 너 블랙 드레이크를 도로 뱉으란 거는 아니지? 이미 내 거로 만들어서 무를 수도 없어!”
“인마, 그걸 내가 왜 뺏냐? 되레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려고 왔다. 옜다, 이거나 받아라!”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친 현중이에게 다가가 교환을 걸고는, 창고에서 꺼내온 템을 올렸다.
“헉! 뭐야, 용살검? 이 자식이 내가 다크썬더 좀 자랑했다 서니, 갑자기 이딴 식으로 템 자랑을 해? 누가 이거 옵션 좋은 줄 몰라? 왜 부탁하지도 않은 걸 보여주냐고?”
“보여주는 거 아냐. 수락 버튼 눌러. 이제부터 이 용살검은 네 거니까.”
“……뭐?”
용살검 샤크 투 메르타스.
마신검을 얻기 전까지 내 주력 무기 중 하나였던 이 디바인 검은, 더는 내 것이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이번 미스틱 드래곤 레이드에서 활약할만한 무기긴 했지만, 마신검을 빼서 올 10성 스킬들을 포기하는 것이 더 손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길드원 중에서 나 대신 이 검을 썼을 때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았다.
당당이, 무살 형님, 연우 등등…….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그 결과로, 이렇게 용살검을 든 채로 현중이 앞에 서게 되었다.
“내 말대로 올 체력 스탯만 찍어서 공격력이 턱없이 약해졌잖아. 그러니 무기라도 좋은 거 껴야, 최소한의 어그로 관리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냐? 탱커가 어그로 뺏기는 것만큼 쪽팔린 것도 없잖냐.”
“너 진심인 거야? 이게 얼마짜리 무기인데 어그로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어?”
“애초에 내가 잘나서 먹었던 템도 아니었어. 우리 길드원 전원이 목숨을 걸고 먹었던 템이라서, 이게 온전히 내 꺼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다음 주인한테 양도하려고. 이제 나에겐 더 이상 필요도 없는 템인데 썩히긴 아깝잖아?”
“이 미친 새끼! 이 검이라면 거래도 가능하니까 백억은 족히 받을 수 있을 텐데!”
한 대만 스쳐도 10초간 독 도트 데미지를 입히는 투 메르타스의 독니도 물론 좋은 검이다.
하지만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엔 더할 나위 없지만, 단일 대상인 레이드 몹을 상대로는 그다지 좋은 옵션은 아니었다.
차라리 옵션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고강화된 레전더리 인던 무기가 어그로 관리에는 더 나을 정도.
그러니 이번에 우리가 상대할 미스틱 드래곤의 메인 탱커를 맡기에는, 이대로는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샤크 투 메르타스(디바인, 한 손 무기)>
* 공격력: 2280
* 근력 +150, 민첩 +150
* 모든 종류의 대형 몬스터에게 물리 데미지 +2280
* 모든 용종의 몬스터에게 물리 데미지 +2280, 마법 데미지 +2280
* 장검 관련 스킬 레벨 +1
* 장검 관련 스킬의 사용 대기 시간 감소 50%
* 동일 대상을 상대로 공격 시마다 추가 데미지 +10%(최대 100%까지 누적)
* 이 아이템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가이라 제국의 선황(先皇) 펠린 가이룩스의 명으로, 그린 드래곤 투 메르타스를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살검(龍殺劍)입니다.
* “아직 투 메르타스가 성룡(成龍)이 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녀석을 토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은 결국 인류의 재앙이 되어, 찬란한 천년 제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말 것입니다.” - 가이라 제국의 23대 원로원장 게투릭 벤튼스 -
‘진짜 다시 봐도 용족을 상대로는 최강의 무기인데…….’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
하지만 이대로 내 창고에만 처박혀 있는 것보단, 현중이에게 주는 편이 녀석뿐만 아니라 우리 길드 전체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욕심은 부릴 곳이 있고 부리지 말아야 할 곳이 있는 법.
시원섭섭하게 바라보던 용살검은 마침내 수락을 누른 현중이에게로 넘어갔다.
“와, 이거 간지 뭐야? 확실히 디바인 급은 외형이 투박하더라도 재질이 남다르니까 때깔이 다르구나!”
“넌 스펙보다 그 소리가 먼저냐? 일단 옵션 좀 자세히 봐봐라. 아무리 7신기라 하더라도, 드래곤 사냥에 있어서는 그 검을 따라갈 수 없어. 확실히 옵션 자체가 용살에 특화돼서 어떤 템을 가져다 비교해봐도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
“정말 그렇네? 내 꺼가 아니라서 그동안 옵션엔 크게 관심 없었는데…… 대형 몬스터 추가 데미지랑 동일 대상 누적 데미지도 상당해서, 보스 몹 레이드에도 완전 개쩌는 검이잖아?”
“다만 올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신검이나 마신검에 비하면 유틸성이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하지. 무기가 보스 몹 레이드를 할 때만 쓰이는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신검과 마신검은 가호 덕분에 +2강화와 +1강화가 됐으니까 더더욱 좋을 수밖에 없고.”
“그런가?”
“만약 샤크 투 메르타스도 3강화. 아니, 2강화 정도만 됐어도 내가 검을 바꿔 차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 검에도 장검 스킬 레벨업 옵션이 붙어 있으니까.”
나는 검에 관한 장단점 등을 말해주며 철저하게 인수인계해주었고.
녀석은 내 설명을 들으며 흡족한 얼굴로 연신 손에 든 검을 쓰다듬었다.
“2강화 정도였다면 더없이 좋았을 검이라……. 옥케이, 접수했어!”
“응? 뭘 접수해?”
“너 이거 나 주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은 거 맞지?”
“뭐 팔아버리지만 않으면 죽어서 드랍하더라도 어쩔 수 없긴 한데…… 뭘 어쩌려고 그래?”
“말해봤자 분명히 반대할 테니까…… 지환아, 당장 해볼 게 생겼다! 조금만 있다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갑자기 사라졌다.
이미 나와 대화하는 도중에 귀환 주문서를 사용해서, 캐스팅 시간을 채워 주성 중앙 홀로 귀환한 것이었다.
“이 자식이!”
그렇게 뜬금없는 말과 함께 사라진 모습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서둘러 방문을 박차 중앙 홀로 달려갔으나,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쳤구나……. 현중이 이 새끼가 제대로 미쳐버렸어!”
마음은 나도 굴뚝같았지만 차마 시도할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던 일.
녀석은 그걸 시도해 보려고 사라진 것이 확실했다.
바로 디바인 무기의 강화를!
-6강화라 그런지, 설사 디바인 활이 나온다 해도 어지간하면 무기를 바꿀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드라코닉 보우를 6강화까지 성공해 사용 중인 라챤이.
녀석은 그동안 고강화 템의 메리트에 관해 정말이지 침이 마르도록 예찬해왔다.
사실 녀석이 타연 최강의 사정거리를 갖게 된 건, 고강화 드라코닉 보우의 부가효과 때문이었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쨌든 현중이 녀석은 그런 라챤이에게 계속 자극받아왔던 게 분명했다.
[산드로: 현중이 너 어딨어! 당장 안 나타나? 너 그 검에 허튼수작 부리면 절대 가만 안 둔다! 그거 내 거 아니라고 했지? 마찬가지로 내가 줬다고 니 꺼도 아닌 거야!]
[축복받은얼굴: 뭐 그리 흥분했어? 외성 마을 거래소 앞에 와있다. 지금 오든지 말든지.]
황망한 마음에 길드 채팅창에 글을 올리자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위치를 고백했다.
아마도 빛강석을 사기 위해 거래소 앞으로 갔다 주저하고 있는 모양.
서둘러 놈이 말한 장소로 향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너 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건데……. 내가 준 검 어디 갔어!”
분명 넘겨주자마자 착용해보고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간지난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잠깐 못 본 사이에 빈손이 되어 있었다.
“빨리 대답해! 설마 너 증발시켜버린 건 아니지?”
“넌 다른 건 다 좋은데, 이런 일엔 소심해서 평생 가도 못 해볼 거다. 타연에서 10강화 띄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 헛소리야? 이러지 마라. 지금 너 장난치는 거지?”
“실패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야. 인마, 이거면 대답이 되겠냐?”
그리고 녀석은, 그 말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찼다.
드래곤 본 재질의 푸르고 긴 검신.
용살검이 틀림없는 검이 녀석의 손에 들려 있었다.
“떴다 지환아! 이 형님께서 강화에 성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