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무적 버닝스타 (3)
“와, 여기서 이게 뜨다니!”
단기간에 정말 많이도 죽였나 보다.
유저 만 명을 PK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이 업적을 획득한 걸 보니.
[업적: 만인살(S)]
* 타이탄 연대기를 플레이하는 유저 1만 명을 살해했을 시에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공격력 +15%)
* 업적 효과로 머더러 상태가 되면 지속 시간이 5배로 증가합니다.
랭커들 사이에서 공격력을 무척이나 많이 올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업적.
그리고 머독이 본격적으로 ‘살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된 업적.
이걸 뜬금없이 지금 이 순간에 획득하게 될 줄은 몰랐다.
페가수스 공격으로 낙사시킨 것도 전부 PK 카운팅에 포함된 덕분이었다.
“드로 형님, 뜨긴 뭐가 떴단 거예요? 뭐 강화라도 하셨어요?”
“여기서 무슨 강화질이야? 너 맨날 그 소릴 입에 달고 사니까 현중이 그 자식이…….”
“네? 현중이 형이 왜요? 뭐 강화라도 한 거 있어요? 탱킹하는 거 보니 뭐 바뀐 템도 없던데.”
“됐다 이놈아. 갑자기 업적 하나가 떠서 놀랐어. 이제 형도 만인살 플레이어다.”
“헉! 정말요? 그 얻기 빡세다고 유명한 업적을요?”
잠시 설명 좀 본다고 정지한 사이, 뒤에서 열심히 공격을 날리던 둘도 잠깐의 휴식 타임을 가졌다.
한데 내 말에 라챤이보다는 오히려 당당이가 더 놀라는 기색이었다.
“제가 그거 얻으려고 반년 넘게 머더러로 살았는데…… 벌써 얻으셨다고요? 대체 하루에 몇 명이나 죽이고 다니신 거예요?”
“최근에 천계 통제하고 캐슬 테러 다니느라 좀 많이 죽이긴 했잖아. 근데도 좀 모자랐었는데…… 오늘따라 놈들이 이렇게 제대로 몰아 줬네? 대체 페가수스만 몇 마리를 죽인 건지 모르겠다. 전부 스치면 한 방들이라서.”
이리저리 태성에 대한 공격을 자행하고 다녔지만, 그래 봤자 하루에 죽일 수 있는 유저는 몇백 명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정말로 작정했다면 하루에 천 명 이상도 가능했겠지만, 나는 철저히 태성의 고레벨 유저들만 골라서 죽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암만 그렇더라도, 본격적으로 PK한 지 몇 달도 채 안 됐는데 1만 카운팅이라니.
내가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위업이었다.
“만 번 채우는 동안 한 번도 죽지 않았으니까, 개이득이긴 하네요!”
“하핫! 그렇긴 한가? 아무튼 공중은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인 거 같은데…… 맞지?”
“그런 것 같네요. 수도 생각했던 것보단 적은 편 아니었어요? 올림푸스 쪽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것 같고요.”
“밝히긴 그렇지만 그쪽과도 미리 얘기를 맞춰둔 게 있어서…… 아무튼 그래도 태성이 가진 페가수스 라이더가 고작 이 정도일 린 없는데? 뭐지, 내분이라도 난 건가?”
신나게 썰어 재끼다 보니 몇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원래 내 예상대로였다면 레이드가 끝나는 순간까지 적들을 정신없이 막아서는 게 정상이라는 것.
따라서 이렇게 잠시나마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는 건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을.
“속사정이 뭔진 모르겠지만…… 이러면 저희도 좀 빠져서 드래곤 팀에 합류할까요?”
“라챤아, 혹시 모르니 그래도 여기 있자. 당당이와 네가 간다고 어차피 딜이 드라마틱하게 늘어나진 않잖아? 이 형이라면 모를까.”
“에이, 그래도 저희 레벨이 있잖아요. 레벨 보정 때문에 저 한 명이 흑풍단 백 명보다 더 딜이 많이 박힐 걸요?”
아닌 게 아니라 레이드가 시작된 지 10분가량이 지났는데, 아직 드래곤의 체력은 80%에도 미치지 못했다.
레이드 한 번에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될지 모른다니.
원래라면 지금처럼 서버가 두 라인으로 양분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잡아낼 수 없는 구조의 보스 몹이 확실했다.
하지만 태성은 실수로 보유 중인 타이탄의 대부분을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덕분에 바리케이드는 생각보다 튼튼하게 유지 중이었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우리도 레이드에 참여할 각이 나올 것도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칼 데드라가 감당 못 할 페이즈 변환을 보여주거나, 혹은 태성 놈들의 제대로 된 공격을 한번 막아서든가. 이 둘 중 하나가 되기 전까진 방심하지 말자.”
철저한 역할 분담.
오늘 레이드를 준비하며 세웠던 방침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봉인을 푼 미스틱 드래곤이었지만, 실상 나는 놈이 죽을 때까지 검 한 번 못 찔러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걸 기획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우리 길드의 역량을 신뢰한다는 걸 의미했고…….
길드원 중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쉴 테크를 버리는 순간부터…… 모든 걸 잘하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생각은 버렸으니까.’
현중이에게 용살검을 넘겨준 것도 실은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맞아요 라챤 형님. 드로 형 말씀대로 일단 계획대로 해봐요. 현중 형님이 정말 탱킹을 잘하고 계시잖아요.”
“아무튼 레이드는 이제 막 시작한 것에 불과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릴 테니까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위급해지면 당연히 우리도 합류해야지. 오늘을 놓치면 한 달 후에나 다시 찾아올 놈이니까.”
아베르 성만큼 놈을 잡기에 적격인 성도 없다.
한 달을 기다리게 되면 그만큼 태성의 횡포도 더 길어지는 셈.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미스틱 드래곤을 잡아낸 다음, 최대한 빨리 황제도 잡아내는 게 답이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지긋지긋한 태성 라인과의 전쟁도…… 끝이 보이게 되리라!
* * *
슈슈슈슛! 쾅쾅!
마치 비처럼 날아가는 많은 화살, 그리고 마법들.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칼 데드라에게 집중된 지도 어느덧 20분이 더 흘렀다.
하나 이 긴 시간 동안 지속된 공격에도 녀석의 체력은 이제야 막 절반에 도달했다.
“대체 몇 명이 치고 있는데 피다는 속도가 저따위인 거죠? 저런 놈을 정말 잡으라고 만들어 둔 건가?”
“그래도 큰 피해 없이 잘들 해내고 있잖아. 반피나 깎아냈으니 녀석이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잡는 것도 문제없겠어. 저렇게 유저들도 딜을 보태주시고 계시니까.”
“하긴…… 생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 중이긴 한 것 같아요.”
레이드가 점점 진행되면서, 태성의 공격이 생각보다 거세지 못한 이유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반 유저’들의 참전 때문이었다.
칼 데드라의 거대한 크기와 스킬, 등장하는 위치와 습격 방식 등을 고려해볼 때…… 놈은 결코 소수가 독식하도록 만들어진 놈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괜히 ‘월드 보스’란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라는 뜻.
놈이 등장한 이후, 이곳 아베르로 공간이동해온 유저들의 수가 어제나 그제 습격당한 성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초반에는 순전히 구경 차 비싼 이동비를 지불하고 온 유저들만 있었지만, 곧 너 나 할 것 없이 물밀 듯이 넘어왔던 것이다.
피닉스 라인, 그리고 흑풍단이 힘을 합쳐 레이드를 시도 중이라는 기막힌 소식이 전 서버에 순식간에 퍼져버렸기에.
그래서 외성 마을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고, 곧 유저들은 마을 외곽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보게 되었다.
근래 들어 자신들이 필드에 나다니지도 못하게 만든 원흉, 태성 라인의 병력들을.
물론 그렇다고 함부로 덤벼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놈들을 방해하고자 누군가가 입구를 막아서기 시작했고, 그에 동참한 유저들 때문에 결국 태성의 페가수스 라이더나 지상 병력들은 원활히 이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초반에 있었던 태성의 공세가 어딘가 허접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막자를 한다 한들, 마을은 넓었고 우회할 길은 많았던 것.
내가 막 공중에 뜬 페가수스들을 대부분 정리했을 때쯤, 태성은 바리케이드를 뚫을 준비를 마치고 막 진격하려던 상태였다.
-다들 월드 보스를 구경만 하고 계실 겁니까! 다 함께 한꺼번에 필드로 나가서 레이드에 합류합시다! 이렇게 드래곤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늘 말해왔던 대로, 피닉스 라인의 바리케이드는 오직 태성의 길드 마크만을 공격할 것입니다! 걱정 말고 나갑시다! 저 보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모든 유저들의 것입니다!
한데 그 순간,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며 먼저 마을 밖으로 나섰다.
그는 다름 아닌 마검사 로만전자.
오래된 랭커이자 인지도만큼은 톱급인 그와 그의 팀들이 앞장서자, 다른 일반 유저들도 분위기를 타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즉 다시 말해…… 이번 레이드에서 일반 유저분들을 대표해주는 역할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워낙 인지도가 있는 분들이시니 유저분들도 자연스럽게 뒤따를 겁니다. 월드 보스를 함께 잡는다는 경험은 쉽게 찾아올 기회가 아니니까요.
내가 관우에게 했던 조언을 다행히 그들은 그대로 이행했고.
내 노림수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맞아! 유저들이 힘을 합쳐 잡으라고 만들어둔 보스를, 왜 태성 놈들 때문에 구경만 하고 있는 건데? 우리도 나가서 함께 공격하자! 그래서 업적이라도 나눠 갖자!
-사실 지금은 두 라인 간의 전쟁이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태성의 뒤치기 아니야? 레이드하는데 뒤치기 각이나 잡고 있는 걸 우리가 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함? 나도 피닉스 라인 도와서 드래곤이나 잡아보련다!
-나도 나도! 저 큰 드래곤이 죽는 모습을 나도 보고 싶어!
투 메르타스가 처음 공개됐던 시절에도 놈의 실물을 한 번 보고자 수많은 유저들이 목숨을 바쳤다.
한데 지금은 바로 눈앞에 있을뿐더러, 마을 밖으로만 나가면 원거리 공격으로 숟가락도 얹을 수 있는 상황.
이걸 태성 라인이 막고 있었으니 꼴불견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최근 우리에 대한 시선이 나빠졌다 한들, 직접적인 원흉인 태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와아아아! 가자! 가자!
그렇게 일반 유저들이 한꺼번에 수백, 수천 명씩 몰려나와 피닉스의 바리케이드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으며 드래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태성 라인의 유저들은 얼떨결에 그 중간에 껴서 제대로 된 진격은 해보지도 못했다.
마왕군 소속이 된 태성 길드는 킬을 해도 머더러가 되지 않는 대신, 정당방위 표식조차 뜨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필드에 피닉스의 바리케이드가 두텁게 펼쳐지고 그 옆에 일반 유저들까지 수천 명씩 메우게 되다 보니…….
놈들은 결국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마을 안에 갇혀버린 모양새가 돼버렸다.
“아직 방심하기는 일러. 태성이 당장은 가만히 있더라도 끝까지 지켜만 볼 놈들은 아니니까. 이렇게 된 이상…… 아마 레이드가 끝나기 직전에 총력전을 벌이려고 들 거야. 방해로 레이드가 실패해도 좋지만, 그럼에도 성공한다면 템을 스틸할 목적으로.”
“아무렴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형님!”
워낙 수가 많았기에 지금도 통제가 안 되어 마을 밖으로 삐져나오는 태성 놈들이 있었다.
그런 놈들을 칼같이 잘라내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곳은 현실이 아닌 게임 속 세상.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 이곳으로 넘어올 테니, 결국엔 마지막 한 방 싸움이 관건이었다.
“와! 저 성기사 진짜 뭐지? 타연에 저 정도 되는 탱커가 있었나?”
“자기는 축복 님도 몰라? 성기사 랭킹 1위도 모르면서 무슨 타연을 하고 있어?”
“나야 랭커엔 관심 없으니까 몰랐지……. 와, 근데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오네. 어떻게 저 큰 드래곤을 혼자 탱킹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힐과 버프가 따라줘도 대체 장비가 뭐길래……!”
“장비빨이 아니라 컨빨이라고 해야징. 저 회피 무빙과 방패 디펜스 좀 봐봐. 우리 길드에도 저 반만큼이라도 하는 탱커가 있었다면 에록 인던 보스는 진작에 잡았을 텐데!”
공중에 떠 있는 우리 아래쪽에서, 열심히 화살을 당기고 있는 궁수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그리고 녀석에게 감탄하는 소리는 이곳뿐만 아니라 주변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들려왔다.
초반에 함께 공격하던 타이탄들이 역소환된 후부터 지금까지…….
칼 데드라의 주변에는 오직 현중이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짧게 마주했지만 녀석의 어그로 패턴은 무조건 가까이 있는 대상이 우선이었어. 그 성향이 강해서인지 거리가 멀어지니까 미련 없이 어그로를 놔버리더라.
-그게 사실이라면…… 네가 이 검을 준 이유는 역시 나 혼자 탱킹하란 뜻인 거지?
-맞아. 그런 패턴은 개발자들도 설마 미스틱 드래곤의 DPS를 계속 견뎌낼 수 있는 유저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 못 해서 만들어둔 걸 거야.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의외로 쉽게 잡을 수도 있어!
현중이에게 용살검을 맡기던 날.
뒤늦게 부담감을 느끼던 녀석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내 기대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었다.
처음 상대하는 보스 몹이라 스킬이나 공격 패턴 등이 전부 낯설 텐데도,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탱킹 중이었던 것이다.
“으라차!”
“호잇! 히압!”
물론 때때로 괴상한 기합 소리를 외치는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나와 달리 나름 멋지게 봐주는 유저들도 많은 것 같았다.
여하튼 멋지든 그렇지 않든 그건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치 녀석의 단독 공연과도 같이 드래곤을 홀로 탱킹하는 모습.
수만 명이 넘는 유저들의 눈에 녀석의 이 기막힌 활약이 똑똑히 각인되었으니, 오늘이 지나면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버닝스타 길드에는 나 산드로와 필적할 만한, 정말 스페셜한 유저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