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대성공 (2)
“히야, 그 짠돌이였던 지환이가 이렇게 변했다니. 이 형님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넌 툭하면 그 소리더라? 이젠 너도 벌 만큼 벌고 있으면서 맨날 그 소리냐?”
“제보에 천만을 쓴 것도 모자라 이번엔 2천만 골드 치 쇼핑이라니……. 너 게임에 너무 몰두해서 감을 상실한 거 아니냐? 자그마치 20억이야 20억.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 가격이라고!”
“우리? 감을 잃은 건 내가 아니라 너구만. 인마, 돈 한 푼 안 보태놓고는 무슨 우리 집이야. 워딩 정확히 해라. 우리 집이 아니라 내 집에 얹혀살고 있다고.”
“키야! 이거 봐 이거 봐. 쪼잔한 근성은 예전 그대론데, 타연에 관련된 것만큼은 완전 딴사람이라니까?”
조금 전 많은 길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난 지옥불 형님께 2천만 골드를 바로 턱 하니 건네드렸다.
단돈 백만 골드도 들고 다니는 유저가 드문 이 타연에서 순수 골드로만 2천만이라니.
아무리 무게가 없는 골드라 할지라도, 이 정도를 늘 갖고 다니는 유저가 있을 줄 몰랐는지 모두 깜짝 놀랐다.
본의 아니게 돈 자랑을 하게 된 셈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라. 형이 항상 말했잖아,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타연을 돈으로 생각했다면 너나 나나 여기까지 절대 못 왔다. 그러니까 너도 항상 명심하고 있어. 스펙 상승, 그리고 동료들. 이 둘한테만큼은 절대로 아끼지 말라는 거.”
무언가 하나를 얻을 때마다 단순히 그 하나만큼 좋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비나 업적, 레벨업 등의 스펙 향상은 언제나 그보다 더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준 것이다.
태성을 무너뜨린다는 일념 하나에만 집착하다 보니, 여유를 부리거나 만족할 시간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렇게 한눈팔지 않고 나와 길드의 성장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 다리우스는 정반대였다.
가진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릴수록, 나와의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부하들을 계속 방패막이로만 삼다 보니 정예들 또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것이 녀석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그래서 우리 길드가 받을 분배 템으로 스킬북을 요구한 거냐? 동료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그럼! 디바인으로 나온 도끼와 갑옷은 딱히 쓸 사람도 없고 너무 한 명한테만 몰빵이잖아. 대신 드랍된 미완성 스킬북 5권 전부를 우리가 가져가면, 그 5명만큼은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지. 너도 충분히 실감했을 텐데? 비록 한 개일지라도 타 직업군의 스킬을 익힌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지?”
“하긴 그렇긴 하더라. 내가 그밟 하나로 생존력은 물론 전투력까지 급증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직접 익혀본 사람만이 그 진정한 위력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5권을 전부 다 가져올 수 있었던 걸 테고.”
“사실은 지옥불 형님을 비롯한 다른 동맹 분들이 배려해 주신 게 더 커. 우리가 디바인 무기나 장비보다 스킬북을 달라고 말했으니까. 최고 공훈 길드인데도 디바인 템을 마다했으니 다들 조용히 양보하신 거야.”
“그런 거였어? 아무튼 칼 데드라가 대박이긴 했네. 투 메르타스와 황실 창고에서는 겨우 한 개씩 얻었던 걸 무려 5개나 드랍하다니. 흩어진 것들까지 감안하면 이번에 6, 7개는 나온 것 같은데?”
“그것도 래빗 님께 바로 부탁해뒀지. 아직 대부분의 유저들은 그 스킬북의 진가를 잘 모를 테니 매물로 나오면 바로 구매해 달라고. 이번에 분배 못 받은 길드원들도 섭섭하지 않게 빨리 챙겨드려야지.”
그리고 곧 시도할 황제 도전에서도, 어지간한 디바인 템 한두 개보단 미완성 스킬북 5권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렇게 현중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외성 마을에 도착했다.
“바로 대장간으로 향하는 걸 보니 준비는 이제 다 된 거야? 딱 한 세트 더 만들 수 있다고 했나?”
“어. 그때 알려준 도안대로라면 각 피스당 2개씩, 총 6개 만들 수 있다.”
황제를 잡는 데 필요한 암흑 내성의 디바인 갑옷.
그걸 제작하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지만, 대부분은 대장장이가 시간만 들이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중요한 건 딱 3개뿐이었다.
바로 바다왕의 꼬리지느러미, 성룡의 뼈와 비늘, 그리고 카오스 스톤.
이중 투 뮤탄과 미스틱 드래곤은 둘 다 퍼스트 킬답게 2세트를 제작할 만큼 충분한 양을 드랍했지만.
문제는 카오스 스톤이었다.
이번에 괴수 군단장이 드랍한 것으로는 한 세트 정도밖에 만들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이것 또한 타연에서 가장 유능한 장사꾼이 해결해 주었다.
바로 우리 길드의 살림꾼, 핑크래빗이.
-길마님, 카오스 스톤이 필요하시댔죠? 그게 매물로 나왔는데 추가로 구매하실 생각 있으세요?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게 어떤 템인데 매물로 나와요?
-아직 거래소에 올라가지 않고 먼저 상인 연합 길마들한테만 의뢰가 들어왔는데요, 확실히 카오스 스톤이 맞아요. 며칠 전에 드랍됐대요.
-이상한데요? 분명 괴수 군단장을 퍼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놈이 뜨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텐데……. 애초에 요정계에 갈 만한 유저도, 잡을 수 있는 유저 자체도 극히 드물고요.
-괴수 군단장이 요정계에서만 뜨는 건 아니잖아요.
-네? 그럼 어디서요?
-시공의 틈새요! 그곳에도 전대 군단장이 보스 몹으로 리스폰 되잖아요! 거기서 나온 것 같던데요?
-맞다! 그렇구나! 그럼 바로 구매해주세요. 얼마가 들던지요!
시공 포탈을 여는 퀘스트 템이었던 카오스 스톤.
포탈을 활성화했기에 당연히 더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틈의 예전 군단장은 이제 카오스 스톤을 재료템으로 드랍 중이었고.
그 때문에 2세트 분의 필수 재료를 모으는 건 크게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제작 의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동안 다른 준비 템들의 제련은 충분히 해두셨다고 했으니까.”
“와, 나도 긴장되기 시작한다. 그 쫄보인 강지환이 설마 디바인 템을 바로 강화하겠다고 한 번에 2세트나 만들 줄이야! 역시 워너비 인생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항상 이런 따라쟁이들이 바로바로 생겨난다니까!”
“뭐래? 그냥 여분이 생겨서 해보는 거지. 누가 누굴 따라 해?”
“부끄러워하긴.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하다. 드래곤 것만 20억이지, 다 합치면 3, 40억은 넘을 것 같은데……. 아마 역사상 두 번째로 비싼 강화 러쉬가 될 거야.”
“응? 이 정도면 최초 아니냐? 누가 이만큼이나 돈 들여서 강화했단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듣진 못했지만 직접 보긴 했잖아. 이 형님의 용살검 러쉬를. 캬캬!”
“아오, 넘겨받은 걸 러쉬한 거면서 생색은 드럽게 내는구나! 됐다! 얼른 들어가기나 하자. 기다리시겠다.”
다른 길드원들과 달리, 자신을 행운의 토템이라 칭하며 기어코 따라온 현중이.
녀석과 함께 대장간으로 들어가자, 테디베어가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는지 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왓슈? 은제 오나 했구만유!”
“하핫! 아직 드래곤을 잡은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그러세요?”
“손이 원체 근질근질하니께 그러지유.”
필요한 것들을 말했지만 설마 이렇게 큰일을 저지르고 올 줄은 몰랐던 테디베어.
단기간에 그 엄청난 월드 보스를 잡아내고 재료를 마련해 와서 그런지, 첫인상과 달리 호의적인 태도로 변해있었다.
“나머지 재료들은 전부 준비되셨죠?”
“그럼유. 숙련도 9성 찍는답시고 맹그러 놓은 주괴가 산더미라고 했잖유. 이제 의뢰만 걸면 돼유.”
“그럼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진행할까요?”
“으흐흐, 좋지유! 그럼 바로 제작 모드로 전환할게유. 요 주괴와 가죽 끈들 다 줍고서 저한티 말 걸어유!”
인벤토리에서 나머지 준비 재료들을 전부 꺼내 땅에 떨군 테디베어.
그런 다음 그는 바로 대장간의 모루로 다가가 포즈를 잡았다.
일명 ‘제작 모드’.
생산 유저에게 아이템 제작을 의뢰할 경우, 여느 NPC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시스템이었다.
이 제작 모드 상태의 유저에게 말을 걸면, 제작자가 설정해둔 골드를 의뢰비로 지불하고 템을 제작할 수 있었다.
괜히 의뢰한답시고 먼저 재료 템을 넘겨줬다가 사기당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사꾼이 까는 좌판과 비슷한 툴이었다.
[‘드래곤 스케일 상의’ 제작에는 필요한 재료와 300,000골드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의뢰하겠습니까?]
[YES]
[모든 재료를 충족했습니다. 제작을 시작합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테디베어의 제작 가능 목록 창에 뜬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고.
땅! 땅!
그는 곧바로 마치 NPC처럼 고르면서 세찬 망치질을 시작했다.
“제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검이라면 모를까, 모루에서 갑옷을 만드는 건 언제 봐도 깬다니까?”
“현중아, 조용히 좀 해줄래? 지금 중요한 순간이거든?”
“앗, 쏘리. 지금 좀 예민하겠구나!”
최초로 도전하는 디바인 템 제작.
아직 스펙과 옵션을 모르는 상태였기에 암 속성 내성이 과연 원하는 만큼 뜰지 긴장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굳이 생산 유저에게 제작을 의뢰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쫄깃한 순간이었다.
‘떠라 떠라 떠라 떠라!’
일명 크리티컬이라고 불리는 ‘대성공’.
그 발동 확률이 NPC보다 유저가 훨씬 더 높았던 것!
정해진 템을 제작하더라도 크리티컬이 뜨게 되면, 원래 스펙보다 더 좋은 수치가 뜨거나 추가 옵션이 랜덤으로 붙기도 했다.
그래서 망치질 도중에 이펙트가 뜨는지 극도로 집중해 지켜보았으나.
[‘테디베어의 드래곤 스케일 상의(디바인)’를 획득했습니다.]
“와우! 성공했슈! 내 이름이 새겨진 최초의 디바인 템!”
바라던 대성공은 뜨지 않은 채로 템이 제작되어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렇더라도 원하던 디바인 템이 제작됐단 사실은 변함없었다.
‘어차피 대성공은 덤이잖아?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도 만족이야. 원하던 속성 내성이 제대로 붙었잖아!’
그래서 서둘러 옵션부터 살펴보자, 여러 옵션 중에 암 속성 내성 +20%나 붙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테디 님. 바로 다음 피스도 제작해볼까요?”
“워메, 바로유? 하긴 세트 효과가 붙는지 궁금하시겠쥬. 그럼 바로 갈게유!”
말이 떨어지자 다시 제작 모드로 돌입한 테디베어.
이번에는 갑옷 하의를 의뢰했고…….
“뭐냐? 또 안 뜬 거야?”
이번 역시나 그저 평범한 디바인 템이 떠버렸다.
‘지금이닷! 연달아 두 번이 안 떴으니까 바로 하면 뜰 거야!’
그리고 다시 또 제작 의뢰.
갑옷 3피스의 마지막인 견갑까지 시도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이펙트도 구경할 수 없었다.
“텄네 텄어. 하여간 이 자식은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니까? 어째 3개나 제작하면서 크리티컬 하나가 안 뜨냐?”
“인마, 원래 그렇게 크리가 잘 떴으면 애초에 대성공이란 이름이 붙었겠냐? 네 번째에 성공하면 그래도 평타는 치는 거야!”
“그 말은 이번에도 실패하면 평균 이하란 소리잖아. 형이 했으면 첫 방부터 떴을 거다.”
“아오, 이 자식이. 그럼 니가 해보든가! 템 넘겨줄게!”
“……어? 오냐, 넘겨봐 봐. 이 성스러운 형님께서 네 저주를 씻겨 줄 테니까!”
그냥도 디바인 템이라 충분히 만족스러운 템인데, 옆에서 자꾸 현중이가 신경을 살살 긁으니 기분이 팍 상했다.
의뢰해서 제작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이 재료템들을 모으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기왕이면 최고의 결과물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웠고.
그런 복잡한 마음과 홧김에 나는, 나머지 1세트 분의 재료를 전부 현중이에게 넘겨줬다.
“어디 한 번 얼마나 잘 뜨나 보자. 어차피 크리티컬 안 뜨더라도 강화할 생각으로 2세트 만들던 거니까, 너가 다 만들어 봐. 대신 한 피스라도 안 뜨기만 해봐라!”
“형님은 너완 다르다니까? 인생은 될놈될! 오늘 또 이 형님께서 너에게 인생이 무언지 가르쳐주마!”
“헛소리 작작 좀 하고! 디바인은 확실히 확률이 다르다는 걸, 너도 한 번 깨달아……!”
현중이 녀석은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테디베어에게 다가갔고, 주저 없이 제작을 의뢰했다.
땅! 땅! 땅!
곧바로 제작을 시작한 테디베어.
그가 방금과 다름없는 망치질을 시작했고.
번쩍!
어이없게도 그의 망치는, 채 한 번 내려치기도 전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떴다 떴어! 봤냐 지환아! 이게 바로 형님, ‘축복받은’ 얼굴 님의 운빨이시다!”
“…….”
그리고 나는…… 분하게도 하려던 말을 속으로 되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