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최고의 업적 (1)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현중이었다.
신검을 주운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사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늘 나를 챙겨줬던……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놈을 제외한 그다음은 당연히 지옥불 형님이다.
이제는 친형이 있었더라면 이만큼 의지하고 따랐을까 싶을 정도로, 고맙고 또 고마운 사람.
“있잖아. 계속 도움만 받았는데 정작 뭐 하나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형님이.”
“아하! 카이저 형님 말하는 거구나!”
그리고 카이저 형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고마운 것이라면 우리 길드원들이 더 앞설지 모르지만, 여러 난관과 고비 때마다 큰 도움을 준 거로는 카이저 형님을 따라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서로의 이해관계로 시작됐을지 몰라도, 지금은 지옥불 형님만큼이나 날 아끼고 챙겨주시는 형님이지.’
그런 형님은 퀘스트를 깨는 데 도움을 받았다는 핑계로 지금껏 템 한 번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번 레이드에서도 큰 도움을 주셨지만, 황제와 미스틱 드래곤을 잡도록 길을 알려준 사람 또한 실은 카이저 형님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묵묵히 지켜만 보시던 형님께 보답할 기회가 생겼다.
동시에 좋은 구실로 손을 내밀어 볼 기회도…….
“맞아. 기왕 아주 좋은 선물이 생겼으니 드리면서 제안해 봐야지. 무길드 생활은 이제 그만 청산하시라고.”
* * *
-담에도 또 요론 디바인 재료 생기믄 무조껀 나허고 하는 거유? 알겠쥬? 그때도 혼자는 오지 말구, 꼬옥 얼굴 님이랑 함께 방문허구유!
한 번에 무려 디바인 템 6개 재료 분을 가져와 의뢰했고.
그 결과, 역대급 제작 성공의 기쁨을 함께 나눈 테디베어.
이번 일로 한층 더 높아질 그의 명성은, 조만간 우리 아베르 성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3연속 대성공이라니…… 정말 대박이었어! 덕분에 이런 미친 세트 옵션도 붙어버렸고 말야.’
새로 얻은 디바인 갑옷 세트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으나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주된 방어력을 책임지는 갑옷 3피스답게 대략적인 수치만 해도 50%, 체력은 1만도 넘게 올라버린 것.
구두룡의 가죽 갑옷 세트도 레전더리라 뛰어난 템이었는데, 역시 디바인급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나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사전에 예상했던 것들.
지금 내가 기분 좋은 이유는 추가로 붙은 희귀한 세트 옵션 때문이었다.
* 역작의 품격: 명장의 갑옷 무구를 전부 착용하면 적용되는 세트 효과입니다.
- 체력이 50% 이하로 떨어질 시 모든 데미지를 20% 감소시킵니다.
정말 갑옷에 잘 어울리는, 그리고 역시나 디바인급다운 옵션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서버 내 단 1개밖에 구현되지 않는 디바인 템의 유일성(uniqueness).
동일 도안으로 다수가 제작된다는 제작템의 모순은 옵션의 랜덤화로 상쇄됐다.
같은 이름의 장비라 할지라도 제작템의 스펙이나 옵션은 조금씩이나마 달라서, 완전히 똑같은 템은 만들어질 수 없는 구조.
흔히 말해 제작 과정에서의 대성공과 별개로, ‘상등품’과 ‘하등품’을 결정짓는 스펙의 수치나 선호 옵션 등의 차이는 제작 당시의 ‘운’에 달려있었고.
그 결과 이번 디바인 갑옷 피스에는 비록 내장 스킬 옵션이 붙지는 않았지만, 대성공답게 스펙과 옵션이 상당히 훌륭하게 제작됐다.
또한 단 한 피스라도 없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대성공 템답게 세트 옵션이 정말로 괜찮은 게 떠버렸다.
“그나저나, 정말 어디 계시는 거지?”
이런 흡족한 마음과는 별개로, 카이저 형님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드도 없이 라푼젤과만 붙어 다니는데 귓속말은 꺼둔 상태였기 때문.
혹시나 요정계에서 사냥 중이신가 필드도 둘러봤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랭커급이 갈 만한 곳이 한정됐다 해도, 형님은 사냥보다는 퀘스트 위주로 플레이하는 스타일.
선물을 주려 하는데도 막상 받을 사람을 찾을 수 없자 다소 허탈했지만, 이 불편함 또한 타연 특유의 매력요소이기도 했다.
여하튼 재입장 시간제한이 있는 요정계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리스탈 캐슬을 살펴봤는데…….
“오잉? 여기 계셨어요?”
어이없게도 별 기대도 없이 찾은 도시의 입구 근방에서 너무도 쉽게 형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냐, 그 반응은? 드로 너, 혹시 날 찾아온 거냐?”
“네, 맞아요. 이런 데 돌아다니실 거면 귓말 좀 켜고 다니세요. 한참 찾았잖아요.”
“누가 저희를 찾는다고 그러세요 오빠. 원래 귓말 거의 꺼두고 다니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곁에는, 늘 그래왔듯 연인인 라푼젤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타연에서 가장 강한 커플일 이 두 사람.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사람과 계속 함께 게임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급히 찾아왔다.
내 진심이 그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하핫! 두 분을 탓하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드리고 싶은 게 생겼는데 갑자기 연락이 안 되니까 안달이 좀 났었네요.”
“응? 분배는 아까 다 끝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지금 착용한 갑옷이 새로 제작한 거냐? 어때, 제대로 성공은 한 거야? 설마 그 재료 템 가지고 레전더리가 떠버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게 궁금하신 분들이 귓말도 꺼두고 계셨어요? 성공했어요. 그것도 3피스 전부 대성공으로요!”
“뭐? 그게 진짜냐!”
“와! 오빠, 축하드려요! 최초의 디바인 템 제작인데 크리티컬이 뜨셨다니! 역시 드로 오빠네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두 사람.
그런 그들에게 잠시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말해주었다.
“아무리 도안으로 만든 제작템이라도 대성공 디바인이라니……. 정말 타연에 신이 있다면 너한테 가호라도 내려주고 있나 보다.”
“에이, 가호는 무슨 가호예요. 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다 보니 운도 따랐던 거죠. 형님이나 푼젤이가 없었더라면 제가 이걸 만들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서로한테 윈윈이었던 거지. 우리도 네 덕분에 수많은 퀘스트들을 해결해서, 제국의 군단장도 되고 신창도 얻게 됐잖아.”
“투 메르타스 때부터 해서 최근의 공성전과 미드까지…… 도움은 드렸어도 직접적으로 뭘 드린 적은 없잖아요. 그래서 형님께 이걸 선물로 드리려고요. 이제 레전더리 장비도 하나씩 졸업하셔야죠?”
“응?”
갑자기 다가와 교환창을 열자 형님께서는 당황했고.
이내 테디베어의 이름이 새겨진 드래곤 스케일 3피스가 올라오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자기야, 뭘 그렇게 놀라용?”
“드로야, 이걸 갑자기 왜……?”
“말씀드렸잖아요, 선물이에요.”
“디바인 장비. 그것도 한 개도 아닌 3개나 되는 걸 지금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하긴 두 분을 영입하기 위한 선물. 혹은 뇌물로는 부족한 편이긴 하죠?”
“뭐라고?”
“둘 다 언제까지 밖에서 외롭게 플레이하실 거예요? 이제 방황은 그만하시고 들어오시죠, 저희 버닝스타 길드에!”
순간 입을 다문 두 사람.
그 상태로 서로 눈빛을 몇 차례 주고받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호호!”
“하하! 하하하!”
“……왜요? 왜 웃으시는 건데요? 푼젤아, 너도 갑자기 왜 그래?”
우리 길드에 들어오란 말이 어디가 웃기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형님께서 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드로야, 내가 전에도 말했지. 너라면 다리우스 대신, 나의 좋은 적수가 돼줄 수 있을 거라고. 라이벌, 혹은 목표가 없는 게임만큼 재미없고 허무한 게 또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이지.”
“그 말씀은…….”
“한데 말이다. 그랬던 내가 최근엔 좀 생각이 바뀌게 됐다. 우리 푼수랑만 함께 하는 것도 충분히 재밌고 즐겁지만…… 너희 버닝스타와 함께하며 만든 추억이 너무 많아졌거든.”
“맞아요. 각종 레이드와 신규 필드, 인던 공략, 공성전 등등…… 덕분에 저희 둘뿐이었다면 할 수 없었던 재밌는 콘텐츠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드로 오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는 라푼젤.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님이 말을 이었다.
“형은 드로, 너를 보면서…… 줄곧 갖고 있던 게임 속 인연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게 됐다. 사람들 간의 교류를 끊고 게임 속 콘텐츠에만 집중했던 것도, 예전 길드 생활에서 데였던 것들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였지.”
“…….”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도 대개는 가면을 쓴 채로 이루어진다.
하물며 현실도 아닌 ‘게임’ 속에서의 인연은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친해지고 쉽게 어울리지만, 그만큼 쉽게 깨지기 쉬운 관계였던 것이다.
매일 같이 함께 사냥하며 돈독했던 길드원들이 한낱 템 앞에서 죽일 기세로 싸웠던 일.
자신의 연인인 줄 알면서도 몰래 라푼젤에게 집적댔던 동갑의 친구.
늘 쉽게 도움을 요청하며 이용만 실컷 하다가 베풀 때가 되면 탈퇴한 유저.
길드 내에서 파벌을 만들어 다투다가 길드가 나눠진 사건 등등.
형님은 그렇게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바에야, 그냥 둘이서만 플레이하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차라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 실망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울 오빠는 점점 냉소적이고 불친절한 유저로 변했어요. 다행히 최근엔 원래의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지만요!”
“……여하튼 내가 봐온 너희 길드는 달랐다. 어떻게 게임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렇게 잘 지낼 수 있는 건지 의문일 정도였지. 그리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건 버닝스타 길드의 사람들이 특별한 게 아니라, 마스터인 네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갑자기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 몰랐기에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껏 몰랐던 형님의 과거와 속내를 알 수 있게 되어 뜻깊은 순간이기도 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그러…….”
“대신에 조건이 있다!”
“네? 조건이요? 지금 저희 길드에 들어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첫째, 아무리 네가 길마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고 평생 난 너의 형이다. 알겠냐?”
“와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결국 형님과 푼젤이가 저희 길드에 들어오는 날이요!”
“아직 내 조건을 다 듣지도 않고 오케이냐? 그리고 둘째! 이 디바인 갑옷 세트 같은 걸 형이나 돼서 공짜로 받을 순 없지. 그러니 형이 치르는 값을 두말하지 않고 받는다. 알겠냐!”
“값을 치른다고요?”
한데 역시나 자존심 강한 형님답다고나 할까?
그냥 덥석 받아도 되시는 데 뜻밖의 제안을 꺼내며 말을 돌리셨다.
“타연에 알려진 업적 중에서 가장 좋은 업적을 꼽으라면 당연 ‘제국 제일의 인재’ 업적을 꼽을 수 있을 거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너보다 잘 아는 유저도 없을 테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갑자기 그 얘기를 왜……. 아무튼 그렇긴 하죠? 그게 없었다면 전 지금쯤에야 랭커가 됐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드로야, 전투 관련 업적 중에서 가장 좋은 업적은 뭐라고 생각하지?”
“흠……. 아무래도 공격력을 올려주는 귀족 처단자나 만인살이 아닐까요? 올 스탯을 올려주는 다른 S급 업적들도 좋지만, 그래도 절댓값보단 퍼센티지로 올려주는 것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니까요.”
“물론 그 두 업적도 S급인 만큼 더없이 좋은 업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같은 S급 중에 그 둘을 합친 것만큼 엄청난 효과를 내는 업적이 하나 더 존재하고 있지.”
“네? S급 2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좋은 업적이 있다고요?”
“후훗. 아무리 포기하고 있었더라도 너무 놓고 있던 것 아니냐? 너도 진작에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7신기의 해방자’라고.”
“아, 맞네요! 그게 있었죠!”
지금으로부터 10년, 혹은 20년이 흐른다 하더라도 타연에는 단 7명밖에 갖지 못하는 업적이 있다.
그리고 아직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명의 유저만이 그 업적을 갖고 있었다.
각각 신검과 마신검을 뽑아낸 다리우스와 지옥불 형님.
그리고 퀘스트를 통해 신창을 획득한 눈앞에 계신 카이저 형님!
[업적: 7신기의 해방자(S)]
* 타이탄 연대기 최고의 무기, 7신기를 세상에 등장시킨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능력치 +30)
* 업적 효과로 집중 공격에 대해 매우 높은 내성이 생깁니다. (모든 물리 및 마법 데미지 -20%)
* 이 업적은 오직 7명의 유저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물뎀 뿐만 아니라 마뎀까지, 모든 데미지를 20%나 줄여주다 보니……. 사실상 디바인 갑옷 2피스 정도와 맞먹는 효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물론 이 업적을 가진 채로 좋은 장비까지 갖추게 된다면 그 시너지 기댓값이 훨씬 더 증가하게 될 테고!”
“지금은 만만해진 다리우스긴 해도, 초창기엔 이 업적 때문에 정말 강하게 느껴졌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었네요. 근데 형님. 갑자기 이 업적 얘기는 왜 꺼내셨어요? 어차피 제가 신의 선물에서 7신기를 뽑아낼 확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건 저와 인연이 없을 텐데요.”
“후훗, 7신기를 꼭 뽑기로만 뽑으란 법은 없지.”
“네?”
“오히려 뽑기보다는 다른 루트로 얻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 지금 너한테 그중 하나를 제시하고 있는 거고.”
“지금 저보고 형님과 같이 7신기를 퀘스트로 구하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그래. 사실 나도 방금 알게 돼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네가 나타나 갑자기 디바인 갑옷을 주겠다고 한 거고. 네가 먼저 그렇게 나오니 내가 꿀꺽하려야 꿀꺽할 수가 없잖아?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동생을…… 또 만날 수 있겠어?”
“꿀꺽이라뇨? 설마……?”
“그래. 이번에 내가 레이드 공헌도로 분배받은 퀘템, ‘빛을 잃은 지팡이’. 이게 아무래도 7신기 중 하나로 알려진 신장(神杖) ‘룬 카투나’인 것 같다. 모두에게 관심 받지 못했던 퀘템 하나가 사실은 미스틱 드래곤이 드랍했던 가장 비싼 템이었던 셈이지.”
“헉!”
그렇게 놀라는 내게, 형님이 마음을 굳히신 듯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눈 딱 감고 우리 푼수한테 넘기려던 걸 주마. 자, 가져가라. 그래서 이걸로 7신기의 해방자 업적을 획득해라. 그게 내 두 번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