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황제 도전 (1)
여전히 세찬 산바람이 불던 가트엘 산맥의 휴포드 마을.
오랜만에 들른 그곳에서 난, 형님 바로 앞에 낙사함으로써 룬 카투나를 넘겨드렸다.
초창기 신검을 창고에 맡기고 3일 밤낮으로 레벨 다운하던 시절의 경험과,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안전히 사망할 수 있는 곳이라 택한 장소였다.
물론 몬스터나 누군가에게 죽는 것이, 기분상 썩 내키지 않아서 택한 방법이기도 했고.
‘쩝. 뭐라도 하나 줄 만하지 않았나? 하긴 죽는 게 하나의 업적이 된다는 것도 어폐가 있긴 하지.’
레벨업만 근 400번 넘게 하는 동안 한 번도 죽지 않았던 나.
이런 진기록은 타연 내에서도 드물게 분명했기에, 죽는 순간 업적이 뜨지나 않을까 기대했지만.
[사망하였습니다.]
[등록해 놓은 안전지대에서 부활합니다.]
그저 오랜만에 보는 평범한 메시지만 재확인한 채 끝이 났다.
물론 신장 전달이라는 목적은 무사히 달성했지만.
-정말 믿기지가 않네. 내가 로드급 타이탄의 라이더라니! 힐 때문에 자주는 못 소환하겠지만, 이게 있으니 진짜 죽을 일이 없겠어!
획득 직후, 형님은 타이탄 봉인 해제를 위해 10레벨 다운을 감행했다.
어차피 힐러라 공격할 일은 없어 레이드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
기존에도 타이탄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로드급은 특별한 스킬들로 무장한 타이탄이었기에 형님은 충분히 만족해하셨다.
당당이와 연우가 먼저 디바인 템을 가져간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렇게 즐거워하는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의 미안함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이제야 나왔냐?”
“뭐야, 벌써 로그아웃했었어? 너 자꾸 레벨업을 쉬엄쉬엄한다?”
“인마, 오늘도 열 몇 시간을 한 줄 모르겠다. 쉴 땐 좀 맘 편히 쉬자!”
“이게 아직도 뽕 맞은 게 안 빠졌네? 황제는 드래곤이랑 다르다니까? 하필이면 소형 몹이기도 해서 용살검이 별 힘도 못 써! 그러니 레벨 1이라도 더 올리고 가야지.”
“알겠다, 알겠어. 그나저나 날짜는 아까 말한 대로 픽스된 거야?”
“맞아, 모레 새벽. 래빗 님이 하루만 시간을 더 달란 것도 있었고, 나도 레벨업 하나만 더 하고 들어가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피닉스에선 아직 지옥불 형님밖에 모르고 있다.”
“비밀 엄수가 중요한 레이드니까 단도리 잘해라.”
“그럼! 지금 우리가 가진 템이 얼만데? 만약 실패를 하더라도 누군가의 방해로 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하지.”
“인마, 재수 없게 실패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크큭, 겁나냐?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진짜 완전 사지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황제를 치는 건 다른 여타의 레이드와 궤를 달리했다.
다른 레이드에서는 실패할 것 같으면 도망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황제 같은 경우는 레이드에 실패하면 그대로 몰살당할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이유는 하나.
적진 한가운데 몰래 잠입해서 암살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예행연습 때 내가 혼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말 그대로 ‘나 혼자’라서 가능했던 일.
우리 길드원들이 황제와의 전투를 시작한 후, 천상궁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는 확률은 제로였다.
설령 천상궁을 빠져나온다 한들, 결계 밖은 여전히 황궁 안인지라 포위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
결국 이번 레이드는 모두가 목숨뿐만 아니라 각자의 소중한 디바인 템들을 걸고 하는 도박에 가까웠다.
지금 우리 길드원들과 동료들은 대부분, 디바인 템 하나 정도씩은 들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다들 미완성 스킬북으로 뭘 익히려나?”
“어라? 그거 니가 전부 조언해 주지 않았어?”
“다들 일대일로 조언해 주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각자 직업이 다른 만큼 스스로가 자신의 장단점과 필요한 스킬을 가장 잘 알 거 아냐. 그래서 말 그대로 조언만 하고 선택은 각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뭐야, 그럼 나는? 난 네가 무조건 그림자 밟기를 익히라고 해서, 다른 끌리는 게 있는데도 배운 건데!”
“넌 좀 케이스가 다르지. 특별 관리 대상이라고나 할까? 괜히 마음대로 고르라고 했다간 또 간지니 뭐니 하면서 효율성 개똥망인 거나 배웠을 게 뻔한데…… 그걸 가만 놔둬?”
레이드를 조금 미룬 또 다른 이유.
그건 길드원들이 미스틱 드래곤의 부산물이라는 특별한 보상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건 역시나 미완성 스킬북 5개.
축빙 형님, 축볼 누나, 무살 형님, 당당이, 그리고 연우.
이렇게 총 5명이 나눠 가진 스킬북을 활성화하려면 모든 마스터들을 방문해야 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어떤 것을 택하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지 충분히 고민할 시간도 필요했다.
물론 그렇더라도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었기에 이틀이라는 시간을 두었다.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이달의 공성전이 3일 후로 다가왔기 때문.
그에 맞춰 3중첩으로 받고 있는 신의 가호 또한 유효 기간이 2일밖에 남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신의 가호 획득법을 모두에게 공유했기에, 다음에도 3중첩을 전부 받을 거란 보장이 없는 상태.
그래서 고민 끝에 디데이를 모레 새벽으로 잡았다.
“어? 우리 지환이 로그아웃했네?”
“형님. 어떠셨어요? 7신기와 함께한 오늘 하루가?”
그렇게 현중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태규 형님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며 말을 건네왔다.
“말해 무엇하냐? 신장, 그거 정말 미친 템이더라! 힐러한테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정말 다신 안 나올 거야!”
“역시 괜히 7신기가 아니죠? 어때요, 자신이 생기셨어요? 이번 레이드?”
“물론! 기본 스펙도 환상적이지만, 일단 쿨타임을 절반으로 줄여주고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게 사기 수준이야. 변한 건 무기 하나밖에 없는데도 원래의 나보다 적어도 3배. 아니, 4배는 더 강해진 것 같다.”
“어라? 강화는 내일 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0강화인데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냥 그 자체로도 사기야 사기! 그동안 힐러 무기는 특별히 좋은 게 없었어서 그런지, 완전 체감되던데? 다들 파티 사냥하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확실히 7신기, 이름값 제대로 하더라!”
디바인 무기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7신기.
내가 괜히 타연이 종료되는 날까지도 탑티어 무기일 거라고 단언한 게 아닐 만큼, 형님은 벌써 감명을 깊이 받은 모양이었다.
특히 스태프와 가장 잘 맞는 주력 직업이기도 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끼신 것 같았다.
“그래도 앞으론 무척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절대 필드에 혼자 나가선 안 되고, 늘 파티 상태로 나가셔야 하고요. 특히 오늘 봉인을 푼 타이탄은 웬만하면 소환하지 마시고 늘 쿨타임을 유지하고 다니세요. 알겠죠?”
“형이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하나만큼은 무조건 살리겠다고. 내가 이걸 어떻게 건네 받았는데 설마 위험하게 플레이하겠어? 걱정 마라. 아무리 내가 신장으로 강해졌다 한들, 내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지환이 너의 생존이다. 타연 최고의 힐러는 타연 최고의 딜러를 위해, 늘 조심 또 조심히 플레이하마.”
“엇? 타연 최고의 탱커는 거기서 왜 빼고 그러세요? 둘 다 섭하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함께 있는 우리 3명은 전부 각 분야에서 탑을 찍은 상태였다.
나 혼자만이 아닌 길드 전원이 함께 성장하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투 트랙’ 전략이, 정말 보란 듯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이번 레이드도 겁나는 건 없었다.
그저 내가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심란했던 것일 뿐.
그것도 축빙 형님의 조언으로 훌훌 털어버린 지금, 남은 건 하나였다.
황제를 죽이고 진정으로 타연의 정상이 되는 것!
“아무튼 미스틱 드래곤까지 잡고 나니까 이제 조금씩 실감 나는데? 뭐가 됐건 모레면 결판이 난다는 게. 과연 우리가 황제를 잡고 제국이 될지……. 그래서 타연에서 태성 라인 놈들을 완전히 해체해 버릴 수 있을지 말야.”
“그렇게 돼야지 현중아. 이번 계획은 아직 누구도 모르는 작전이니까 성공 확률도 높고 말야. 그러니까 얼른 자고 내일 하루 최선을 다하자. 후회하지 않을 레이드가 되려면 내일 빡세게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려 그려. 이 형님이 너를 꼭 황제로 만들어주마. 대신 알지? 형한테 공작 정도는 내려줘야 하는 거? 나도 카이저 형님처럼 아이디 위에 칭호 하나 정돈 달아봐야지. 제국의 공작, 축복받은얼굴! 키야! 생각만 해도 간지 나는데!”
“……넌 정말 답도 없는 놈이야.”
“이게 대성공 띄워준 은혜도 모르고 자꾸!”
“어허, 다들 그만! 얼른 자고 다들 일찍 일어나자! 할 일이 많다!”
그렇게 많은 일들로 시끄러웠던 하루는 조용히 끝이 났다.
* * *
다음 날 새벽.
길드원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펙 향상을 위해 제각각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이른 시각부터 홀로 요정계를 찾았다.
이유는 하나, 레벨업 때문이었다.
현재 나의 레벨은 429.
가뜩이나 레벨 차이가 중요한 고레벨 보스 몹과의 전투라 할 수 있다면 1레벨업이라도 더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5레벨업마다 주어지는 스킬 포인트 1개를 추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번 레벨업은 10레벨 단위다 보니 혹여 그게 뜰 수도 있고 말야.’
물론 달리 기대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미지수.
어쨌든 나는 대부분의 준비를 다 마쳐둔 상태라, 길드원들이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 내가 할 거라곤 레벨업이 최선이었다.
콰광! 펑! 펑!
이제는 익숙해진 요정계 필드의 전투 상황.
군단장을 잃은 마왕군들이었지만, 몹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페어리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바빴다.
그리고 난 그런 마계 몹들 수백 마리가 뭉쳐있는 곳 한복판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사냥꾼의 춤!]
[태세 전환!]
쾅! 쾅! 휘릭!
[고르곤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고르곤으로부터 1,13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서큐버스로부터 2,50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
혼자인 터라 모든 몹들의 어그로는 순식간에 내게로 집중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았던 나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와우! 진짜 미쳤구나! 역시 타연은 템빨이 진리라니까!”
무수히 많은 회피가 뜨는 거야 그러려니 했지만, 들어오는 데미지가 어이없었던 것.
분명 얼마 전 몹몰이 사냥을 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들어오는 데미지가 반의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상 갑옷 3피스를 바꾸고 처음 치르는 전투.
그것도 방어 특화로는 세계관 최강급인 7신기의 해방자 업적을 추가로 얻은 후의 사냥이었다.
그렇다 보니 체감되는 정도가 극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조금의 데미지 변화에도 민감한데, 이건 그걸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어력이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리덕션 효과로 들어오는 데미지 절댓값도 드라마틱하게 줄었어. 다수의 몹들을 상대하는 게 이득일 것 같아서 천계 대신 이곳을 찾은 건데…… 확실히 다대일 전투에서는 이만한 옵션이 없구나!’
기존에 차고 있던 레전더리도 좋은 방어구였지만, 한번에 장비를 3개나 디바인급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보니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마법 데미지 또한 상당히 줄어들었다.
해방자 업적으로 데미지가 20% 급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디바인 갑옷답게 기본적으로 마법 방어력의 수치 자체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
이미 다른 장비들과 업적들로 마법 CC기들에 상당히 많은 저항을 갖고 있는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죽어라, 죽어!”
이전에도 홀로 몹몰이 사냥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들어오는 데미지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많은 몹들을 몰이 사냥할 수 있었고, 종종 한 번씩 가졌던 피타임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쉴 새 없이 휘둘러지는 두 자루의 검.
그리고 이어지는 멀티 히트.
액티브 스킬을 사용할 시간도 아까워 그저 자버프들만 풀로 돌리면서 사냥하자, 인근의 몹들이 순간 텅 비어버렸다.
워낙 빠르게 잡아버리느라, 뒤에서 충원되는 마계 몹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전부 다 잡아버린 것이다.
“진짜 사냥할 맛 제대로 나는구나!”
랭커급 유저들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선 파티 사냥이 필수.
그나마도 한 번에 세 마리 이상 사냥하기엔 벅찬 수준이었는데, 나로선 그저 허수아비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분명 요정계 필드는 현재 내 레벨 대에서도 고레벨 사냥터.
하지만 현재의 내 스펙과 업적, 장비 수준은 개발자들이 세팅해둔 레벨 디자인과 많이 어긋날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즉 쉽게 말해, 몹들의 레벨은 충분히 높은 편이었지만 스펙상으로는 내가 몹들보다 100레벨쯤은 높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나는 랭킹 1위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300레벨대 유저들이 레벨업하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폭업할 수 있었고.
그렇게 6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사냥하자, 마침내 바라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신규 고유 스킬 획득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던…… 보너스 메시지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