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황제 도전 (5)
“대탐이, 그리고 저! 이렇게 투 탱킹으로 각자 하나씩 잡겠습니다!”
“알겠어요!”
“네!”
이미 같은 멤버로 몇십 개 되는 구성을 시뮬레이션해둔 터라, 전부 두 갈래로 나뉘어 팀을 이루었다.
메인 딜러는 나와 카이저 형님, 그리고 힐러는 축빙 형님과 라푼젤.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치고는 각 길드 최강들만 뽑아서 만든 것 같은 올스타급 멤버의 두 팀이!
‘그렇다고 놀랄 것도 없지.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까!’
불평불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
초반 난이도야 어떻든 간에, 결국엔 극악의 레이드가 될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레이드를 위해 참으로 많은 준비를 했다.
연막이 통하지 않거나 금세 흩어지는 상황.
크림슨 나이트가 한꺼번에 전부 몰려오거나 예상 밖의 적군이 참전하는 상황.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가 함께 따라 나오는 상황 등등.
최악의 경우 처음부터 모든 타이탄을 꺼내 들 경우까지도 가정해봤으니…….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니들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냥 족족 다 잡아 족쳐주마!”
인간형 몬스터의 치명적인 단점 또 한가지.
그건 덩치 차이로 필드 보스에겐 통하지 않던 몇몇 스킬들이, 이놈들에겐 고스란히 통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유저를 상대하는 것과 같이!
[라이트닝 배리어!]
[급소 공격!]
단일 타겟의 유저를 대상으로 최강의 스킬로 손꼽히는 두 스킬.
크림슨 나이트 오라이언은 내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덜컥 공격을 멈췄다.
매초 단위마다 반복되는 상태 이상 효과에, 제자리에서 버벅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크큭! 큭! 큭!”
지직, 지직!
어느덧 10개로 늘어난 뇌전 줄기는 단일 타겟인 녀석에게 쉴 새 없이 감전 효과를 일으켰고.
무려 10연속 경직을 먹이는 급소 공격은, 녀석의 반격을 계속해서 캔슬시켰다.
비록 잠시였지만, 이 정도는 힐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상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아무리 필드 보스급이래 봤자……!”
피통만 많을 뿐 다리우스보다 강할까?
놈을 치켜세워주는 것 같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오라이언을 공격하며 든 생각은 이거였다.
한때는 무적처럼 보이던 다리우스를 잡기 위해 나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온갖 아이템과 스킬, 업적, 그리고 테크트리 초기화 등등.
그 모든 것들은 철저히 다리우스라는 ‘유저’를 이기기 위한 것들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대인전 최강의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크림슨 나이트가 아무리 보스급 몬스터라 해도, 나에겐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질은 다를지언정 눈앞에 보이는 외관은, 늘 내가 썰어 재꼈던 유저들과 조금도 다른 바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으니까.
“저격 모드!”
그렇게 급소 공격의 10연격이 이어지는 동안, 라챤이 또한 뒤에서 마음껏 프리딜을 날렸다.
그리고 축볼 누님의 무한 파이어볼 공격도 끊임없이 날아가 적중했다.
쉭! 쉭! 푹!
[크림슨 나이트 오라이언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크림슨 나이트 오라이언으로부터 2,33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
하지만 상태 이상이 무한히 이어질 순 없었고, 자유의 몸이 된 녀석이 맹렬히 공격해왔다.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놈은 아직 악령화가 되기 전 단계이기 때문.
또한 불과 며칠 사이지만, 저번에 왔을 때보다 방어력이 근 2배나 높아진 덕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흡사 컨트롤 없이 맞다이 결투를 벌이는 유저들처럼.
회피하려는 모션 하나 없이, 오직 시스템 판정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피가 닳기는커녕 조금씩 차올랐다.
현중이와 연우 등이 타이탄을 소환해서 내가 탱킹을 맡게 되자, 곁에서 블러드 웨폰을 걸어준 탓이었다.
‘괴물은 이 자식들이지만…… 어쩌면 나야말로 진짜 괴물이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최강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 둘을 한 몸에 지닌 내가 최강의 피흡 버프까지 받자,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원래는 테크트리 변경으로 최대 HP가 적어져 위험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신의 가호와 디바인 장비들을 추가하면서 그 약점 또한 없어졌다.
근 10만에 가까워진 HP.
체력 스탯을 거의 찍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
만약 다른 딜러였다면 몇 대 버티기 힘든 엄청난 공격력을 가진 오라이언이었지만, 내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크흑! 크림슨들이여, 폐하를 부탁한다!”
놈은 그밖에도 여러 광역 스킬과 단일 타겟 스킬을 번갈아 가며 사용해왔지만, 결국 변변찮은 피해는 주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래도 필드 보스급이 맞기는 한지, 타이탄일 때보다 오히려 시간은 더욱 많이 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령화로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숨 고를 새도 없이 옆에서 전투 중인 대탐이 팀에게 다가가며, 머릿속으로는 지금까지 파악한 정보를 취합했다.
분명 지난 번에 만난 크림슨 나이트들은 외형이 악귀처럼 변하면서 ‘마기에 물든’이라는 수식어를 단 악령화 상태가 됐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상대하던 오라이언은 그냥 인간 모습인 채로 평범하게 죽어버렸다.
그때와 다른 점은 단 하나.
지금 싸우는 곳이 침소가 아닌 1층 홀이라는 것.
다시 말해, 놈들은 곁에 황제가 없다면 악령화 모드로 강화되지 않는단 뜻이었다.
“잘됐어요! 초반이 조금 빡셌지만 오히려 더 좋은 거였네요!”
“갑자기 뭔 소리냐? 어째 지금 혼자만 여유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하핫! 형님, 아직도 잡고 계시면 어떡해요! 꼭 이렇게 제가 도와드리러 와야겠습니까?”
“끄응.”
아직 대탐이 팀이 상대하던 크림슨 나이트는 피가 1/3이나 남아있었기에.
나는 카이저 형님 곁으로 다가가 공격을 보태며 내가 알아낸 것들을 빠르게 공유해주었다.
“여기서 상대하면 비록 타이탄을 한 번 거쳐야 하지만…… 황제와 함께 악령화가 되는 것보단 수월하단 뜻이지?”
“네, 맞아요. 더군다나 악령화가 진행되면 지금 먹히는 CC기들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크림슨 나이트는 침소보단 여기서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할 거예요.”
“흐음…….”
퍼억! 쾅! 쾅!
인간형 몬스터이라고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빠르게 휘두르는 검만큼이나, 놈들의 단일 타겟 공격력은 그 어떤 필드 보스보다도 강력했고.
중간중간 제국 검술이라는 스킬을 사용해 넉백이나 스턴기를 쉴 새 없이 시전했다.
“그레이터 힐!”
만약 이놈들이 처음 본 침소에서처럼 10명 단위로 뭉쳐서 집중공격해왔다면.
그건 나라도…… 아니, 현중이라 할지라도 순삭당할 만큼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있었다.
원래도 강력한 놈들이라 초반부터 타이탄을 활용해 최대한 수를 줄이는 게 목표였지만, 스스로 달려온 것치고 너무 쉽게 분리된 것.
덕분에 나는 공격하는 도중에 형님과 즉흥적으로 이후의 전략 회의까지 나눌 수 있었다.
“크흑! 크림슨들이여, 영웅의 전당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 남은 로얄 나이츠도 전사했다.
[산드로: 셋 다 어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연우: 방어력을 강화해서 그런지 버틸 만해요!]
[축복받은얼굴: 뭘 더 버텨? 빨리 좀 도와줘! 이러다 죽겠다!]
[당근당근단검: 이 자식들 AI라 그런지 역시 패턴이 단순해요. 소환 시간 내에 역소환 당할 일은 없어 보이는데요?]
순간 동시에 올라온 답장 중 한 명은 상반된 의견이었지만, 잠시 스치듯 살펴보자 그럭저럭 잘 막아서는 것 같았다.
[산드로: 그 소린 최소 5분은 더 버틸 수 있다는 거네. 자! 그럼 왼쪽에 있는 놈부터 하나씩 빼갈 테니까 실수하지 말고 버텨줘!]
[축복받은얼굴: 옥케이! 이제 좀 살만하겠네!]
타이탄들 간의 전투는 스펙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컨트롤이 가장 관건이었다.
하지만 일반 유저들도 AI의 전투 패턴은 금방 파악하기 일쑤였는데, 타연 최고의 컨트롤을 자랑하는 당당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홀로 2기의 타이탄을 막고 있었으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는 당당이.
여기서 한 대를 빼가 연우와 현중이가 각각 한 대씩을 맡게 되자, 더는 타이탄에 신경쓸 필요조차 없어졌다.
“오! 피를 좀 깎아 뒀네?”
“좋아! 이 자식도 빨리 해체하자!”
모든 레이드, 특히 처음 해보는 레이드는 초반이 가장 위험하다.
하지만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계속하다 보면 눈에 익게 되는 법이고.
힘든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이 딱 그렇게 레이드가 안정화되는 순간이었다.
각자 난입한 크림슨 나이트들을 막아서느라 바빴던 조금 전과 달리, 전 파티원들은 끌고 온 로얄 나이츠를 필드 사냥터에서 사냥하듯 편하게 공격했다.
여느 필드에서의 사냥법과 다를 바 없이, 순식간에 정형화된 전투 상황으로 고착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이걸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각 유저들의 실력이자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번쩍!
둘로 나눠졌던 파티가 하나로 뭉쳐 공격하니 타이탄은 훨씬 더 빠르게 역소환됐다.
그리고 튀어나온 크림슨 나이트는 방금 죽인 놈들과 다를 게 하나 없어서 수월히 잡아냈다.
몸빵과 공격력은 강했지만, 마찬가지로 혼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해서 쉽게 죽어버린 것이다.
“자, 다음!”
그렇게 하나 더.
“그리고, 다음!”
또 하나 더.
“그냥 이젠 다 같이 잡자!”
순조롭게 타이탄들을 하나씩 꺼내 잡던 우리는, 결국 두 기만 남아버리자 타이탄 삼인방과 합세해 한꺼번에 잡아버렸다.
“우와! 이게 말이 돼요? 각자 타이탄을 소환해대는 이 미친놈들을 잡는 동안, 피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게요?”
“라챤아. 아직 황제는 구경도 못 해봤는데 뭔 호들갑이야? 암만 강해봤자 얘네들은 그저 에피타이저야 에피타이저. 조무래기 좀 잡았다고 좋아할 것도 없어.”
“됐다 현중아. 다들 고생했습니다! 다들 방심하지 않고 무사히 첫 전투를 마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 크림슨 나이트가 사라지면서 1층 홀은 언제 전투가 이뤄졌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2층에서의 지원군은 5명이 끝이었는지 조용했기에, 우리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드로 말이 맞습니다. 다들 갑자기 타이탄들이 들이닥쳐서 놀랐을 텐데 잘 대처해주셨습니다. 하마터면 피해가 발생할 뻔했는데, 역시 버닝스타답군요.”
“카이저 형님…… 갑자기 웬 존댓말이세요? 그리고 역시 버닝스타답군요가 뭐예요. 아직도 우리가 남이에요?”
“어? 어, 좀 어색했나? 역시 우리 길드…… 다웠다고나 할까요?”
“푸흡! 그게 뭐예요. 더 어색한데요?”
긴장을 풀어주려는 건지 카이저 형님이 한껏 달아올랐던 열기를 식혀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지의 전투를 벌이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복잡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전투 속에서 자칫 타이밍을 한 번 놓쳤다가는, 그대로 전멸하거나 망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반면 같은 멤버들이더라도 정말 손쉽게 처리하고 언제 위험하기라도 했냐는 듯 수월히 넘어가는 레이드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역량.
그리고 얼마나 호흡이 잘 맞고 신뢰가 쌓인 협력이 가능한지 여부였다.
우리 길드는 순간 위험에 빠질 뻔한 상황에서 각자 최적의 자리로 이동해, 각자 역할을 찾아내 훌륭히 수행해냈다.
소환된 타이탄들이 난입하기 전에 최적의 수인 3대의 타이탄을 소환해 막아섰고, 나머지 타이탄들은 각자 두 팀으로 나뉘어 안정적으로 처리한 게 그것이다.
자칫 허둥댔다가 타이탄들의 공격에 힐러부터 죽었다면 그대로 오늘 레이드는 종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모두는 처음 겪는 일이면서도 침착히, 그리고 최적의 대응으로 이런 여유시간까지 갖도록 만들었다.
정말 믿음직스러운 최고의 멤버들.
이들이 내 동료이고 내가 그들의 대표라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죠?”
“네! 저희도 힘들겠지만, 형님께서 부담이 크겠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할 줄 알았는데…….”
“누가 먼저 잡을지는 모르지. 너희가 빨리 잡고 2층에 합류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저희만으로 잡아내려면 30분은 넘게 걸릴 거 같은데……. 아무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제 진입할 2층 레이드에 관한 전략을 말해주었다.
방금의 전투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 이상, 기존의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그렇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수정 전략을 모두에게 단단히 일러준 후, 우리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찾은 침소의 문.
앞장선 카이저 형님이 천천히 문을 열자 낯익은 실루엣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캐노피에 드리워진 긴 휘장.
그 뒤에 앉아있는 황제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