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저마다의 꿈 (2)
“어, 어서 피해요!”
“뭐? 피하긴 어디로 피해!”
그 모습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예의주시하고 있던 둘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잠시 허둥대던 둘은, 뒤로 빠지는 대신 오히려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현재 1층은 여전히 길드원들이 크림슨 나이트들과 사투를 벌이는 데 한창.
그러니 자칫 황제가 내려가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전멸이었다.
나야 속성 내성으로 치트키를 쓴 것마냥 무난히 버티고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곳에 남은 현중이와 축빙 형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크헉! 뭐야 이 자식! 뭐 이리 아파! 빛의 방패!”
빠르게 접근한 황제.
놈의 첫 번째 타겟은 현중이었다.
“그레이터 힐! 신성한 보호막! 치유의 섬광!”
그리고 그런 현중이를 향해 축빙 형님이 서둘러 갖가지 힐과 방어 스킬을 시전해줬지만.
체력바는 급속도로 줄어들어 금세 반 토막이 돼버렸다.
녀석의 막대한 HP 수치를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데미지였다.
“지, 지환아!”
“야! 절대 공격하지 말고 어떻게든 자힐하면서 버텨봐! 내가 어그로 좀 뺏어볼게!”
“그게 말이야 쉽지! 이런 미친 공격을 어떻게 버텨!”
오죽 다급했는지, 현중이는 내게 그림자 밟기까지 사용하며 황제와 거리를 벌려보았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만 번 것일 뿐.
현중이를 노리고 달려온 황제를 향해 공격해봤지만, 역시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이 자식 뭐야? 페이즈가 변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나만 공격하는 건데? 잘만하고 있던 원거리 공격은 왜 또 하질 않는 거고!”
현중이가 내 뒤로 이동했으니, 황제가 원거리 공격을 날렸다면 마신검의 흡수 효과로 숨 돌릴 틈을 벌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그러기는커녕 빠른 이속을 활용해 현중이의 뒤만 졸졸 쫓았고.
“안 되겠다! 천상의 방패!”
결국 버티다 못한 현중이는 무적 스킬을 사용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갑작스러운 패턴 변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발 그러지 않기만을 바랐던 일이 지금 이 순간 벌어졌음을.
“다시 또 빙의했구나! 테오시스!”
움찔.
갑자기 소리친 내 고함에, 분명 잠시지만 황제가 멈칫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
“당신 맞지!”
그리고 내 말에 응답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몸을 돌린 황제.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는지, 놈의 불타는 안광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무적 상태에 돌입한 현중이를 대신할, 또 다른 먹잇감을!
“이, 이번엔 나다!”
“형님, 피하세요!”
“갈 데나 있고!”
“이런 제길! 할 수 없네요, 그냥 소환하세요!”
전직했다지만 여전히 이동 속도가 느린 편인 고위 사제.
형님은 코앞에 다가온 황제의 공격에 적중되기 직전,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막대한 체력과 방어력으로 잠시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힐러 역할은 봉인될 수밖에 없는 타이탄 소환을.
<이라리움>
거대한 메이스와 방패를 든, 마치 바다를 머금은 듯한 푸른 빛의 타이탄.
워낙 높은 층고 덕분에 무리 없이 소환된 로드급의 외형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아름다웠다.
획!
하지만 그따위엔 전혀 감흥 없다는 듯, 황제는 축빙 형님이 타이탄에 탑승하자 곧바로 현중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덧 무적 시간이 끝나가는 현중이 곁으로 되돌아갔다.
“아닌 척하지 마십쇼! 당신 테오시스 맞잖아! 그렇게 경고했건만 다시 또 빙의를 써?”
난 그런 그에게 달려가 검을 휘두르면서 계속해서 소리쳤다.
“이따위 패턴을 보이는 몹이 타연에 어딨어! 공격하던 대상이 타이탄에 탔다고 타겟을 바꾼다니!”
“그게 성기사인 것도 말이 안 되잖아! 타겟을 바꾼다면 나를 공격하는 게 맞지, 아직 무적 상태인 유저한테 달려든다고? 이게 몬스터의 알고리즘으로 될 일이야?”
“대답해, 테오시스! 당신 맞잖아! 대답하라고!”
하지만 현중이 앞에 선 황제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묵묵히 앞만 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중이를 둘러싼 천상의 방패가 흐릿해지다 사라졌다.
“아, 진짜 거지 같네. 레이드에 실패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게 될 줄이…….”
퍼퍼퍼펑!
채 말이 끝나기도 전.
현중이는 집중포화와 같은 암흑구 마법 세례를 맞고 처참히 죽어버렸다.
이 역시도 마치 무적 스킬의 지속시간을 아는 것처럼, 미리 마법을 차징하고 있다 정확한 타이밍에 날린 공격이었다.
“이런 개자식아, 대답하라고! 대답해! 대답해! 대답해에에!”
눈앞에서 허무하게 잿빛 먼지가 된 현중이.
녀석이 드랍한 레벤다스를 급히 주운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또다시 내 눈앞에서 죽게 놔두다니!’
이번 레이드를 준비하며 우리가 상정한 최악의 경우.
그건 지금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황제 레이드가, 누군가의 개입으로 엉망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누군가는 우리 길드원이라면 모두가 아는 바대로 ‘운영자’였고!
“드로야! 흥분하지 마! 지금은 그냥 최대한 피를 빼놓는 게 최선이다!”
“크흑!”
그렇게 분을 못 이겨 소리치는 나를 향해, 이라리움에 탄 축빙 형님이 소리쳤다.
그리고 거대한 메이스로 황제를 선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일깨워줬다.
녀석이 운영자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지금의 전투가 중단될 순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든 이 전투를 승리로 끝마치려면, 당장 놈을 한 대라도 더 공격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런 개자식아! 죽어! 죽어!”
그렇게 알아듣게 경고까지 해줬건만 하필이면 지금 타이밍에 나타나다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황제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댔지만.
휘잉.
현중이를 죽인 황제는 역시나 나 따윈 보이지 않는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던 이라리움까지 무시한 채로 문을 향해 이동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1층으로 내려가겠다는 듯이!
“엇! 드로야!”
“안 돼! 실로키네 소환! 볼텍스!”
그리고 녀석이 막 문을 나서는 순간.
임기응변으로 사용한 스킬에 녀석의 몸이 다시 침소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용권풍, 볼텍스를 시전해 가까스로 붙들어 둔 것.
하지만 볼텍스의 유효 시간은 고작 10초에 불과했다.
“형님! 어서 문 쪽으로!”
“어?”
“가서 몸으로 문을 막아주세요!”
“아하! 그렇구나!”
그리고 이 순간 나는 기적적으로 ‘막자’를 떠올렸다.
마족화가 된 황제는 여전히 인간 외형을 띠고 있지만 몸이 상당히 커진 상태.
따라서 가뜩이나 가장 덩치가 큰 로드급이라면 침소의 문을 대부분 막아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황제가 잠시 볼텍스에 묶여있는 사이,
성큼성큼 뛰어간 이라리움이 간발의 차로 문을 틀어막았다.
쾅! 쾅!
그리고 볼텍스에서 풀린 황제가 마치 비키라는 듯 이라리움을 공격해댔지만.
나완 달리 방어력 강화에 투자한 형님의 타이탄은 체력이 쉬이 줄어들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황제였지만, 100만에 가까운 타이탄의 체력을 단숨에 깎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휴우…… 이런 개자식!”
워낙 급박하게 돌아간 전투.
혼이 나갈 것같이 급변하는 도중에 현중이까지 죽어버려 흥분했지만, 잠시나마 놈을 가두는 데 성공하자 이성을 되찾았다.
최악의 가정이긴 했지만 이 또한 예상했던 돌발상황 중의 하나.
당연히 이에 대한 대처법은 진작부터 생각하고 준비해두었다.
“지금이다, 빨리 불러라! 버티곤 있지만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어!”
“안 그래도 지금 꺼냈어요!”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형님의 재촉을 들으며, 인벤토리에서 템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신묘한 피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피리.
하지만 이전의 경험을 통해 제대로 발동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나는 곧바로 다른 아이템을 하나 더 꺼내 다시 또 입에 가져다 댔다.
[신묘한 호루라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역시나 조용하기만 한 전장.
하지만 역시나 제대로 작동시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빨리 좀 와주세요. 이오네스!’
지금 황제가 보이는 전투 방식과 반응들.
이건 누가 봐도 ‘AI’가 아닌 ‘사람’의 플레이였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렸다 해도 우리가 인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증거 영상 하나 남길 수 없는 타연에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믿어줄 사람 한 명 없을 게 뻔했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게임사를 향한 항의와 검증 정도인데, 유력한 범인이 하필이면 최고 개발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줄곧 최선을 다해 이 게임을 플레이해왔건만, 나의 적은 게임을 게임으로 놔두지 않았다.
그러니 나 또한 게임 외적인 면에서 타개책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경고했던 내가…… 빙의에 대한 대비 하나 안 했을 것 같아? 그걸 사용하면 당신이 외통수에 빠진다는 건 꿈에도 몰랐지?’
그렇게 여러 정황 증거를 찾던 내가 비밀리에 준비한 방법.
그건 이 상황을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들어가 있는 놈과는 다른 운영자에게!
퍼펑! 펑! 펑!
계속해서 이라리움을 향해 마법 공격을 날리는 황제.
내가 피리와 호루라기를 부는 모습을 힐끗 쳐다본 것 같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건 간에, 놈의 행동이 몬스터나 NPC가 보일 모습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부른 거 맞아? 왜 이렇게 안 와!”
“아직 이른 시각이잖아요! 하지만 곧 올 거예요! 분명 로그아웃 상태라도 연락이 닿는다고 했으니까요!”
미리 이오네스에게 말해둘 수도 있었다.
오늘 새벽에 중요한 레이드를 진행할 테니 모니터링을 부탁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운영자의 황제 빙의는 최악을 가정했던 것이지,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빙의를 겪어봤던 것은 상당히 오래전 일이었으니까.
또한 낮은 확률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범인은 테오시스가 아닌 이오네스일 수도 있었다.
즉, 먼저 내가 이오네스에게 호루라기를 달라고 부탁했던 이유.
그리고 굳이 지금 동시에 두 신묘한 아이템을 사용한 이유.
그건 바로 지금 황제의 몸에 들어가 있는 범인의 정체를 명명백백히 밝히기 위해서였다.
지금 황제한테 빙의한 운영자가 누구든 간에…… 둘 중 한 명은 우리 앞에 절대 나타날 수 없을 테니까!
“산드로 님……?”
그리고 마침내, 이라리움의 체력이 25%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기다리던 사람이 찾아왔다.
“오셨군요, 이오네스 님!”
전과 다름없이 후드를 눌러쓴 배혁진 이사의 모습.
그는 황제와 이라리움 쪽을 바라보며 놀란 말투로 말했다.
“이 새벽에 황제 도전 퀘스트를 진행하고 계셨다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빨리 저 황제를 살펴봐 주세요! 지금 저놈한테 테오시스가 빙의를 시전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변은 없었다.
밝은 표정과 친절함이 인상적이었던 테오시스와의 첫 만남.
그리고 그녀와 지옥불 형님과의 오랜 인연.
그런 이유들로 혹여 아니기를 바라왔지만, 이렇게 이오네스가 나타난 이상 범인은 테오시스가 확실했다.
이미 꽤 오랜 시간 예상해왔지만, 이렇게 부정할 수 없는 정황 증거로 진실이 밝혀지자 입맛이 썼다.
“네? 성지애 이사가 말입니까?”
“일단 잠시만 제대로 봐 주세요! 지금 저게 AI가 보일 법한 플레입니까? 멀쩡히 레이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가 돌변했습니다. 완전 사람처럼요!”
“그녀가 빙의했다니…… 그럴 순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기 힘들군요. 혹시 레이드를 제대로 마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절 부르신 겁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운영자는 게임 플레이에 절대로 관여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세요? 그게 아니라 지금 테오시스가 저 황제를 조종하…….”
“산드로 님?”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지금껏 타연을 해오면서 가장 놀란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
차마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 혼란스럽고 위험한 전장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
여유로우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한 그녀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어라? 서둘러 제 전화를 끊으시더니…… 설마 배혁진 이사님도 호출을 받고 접속하신 거였어요? 뭐죠, 산드로 님? 설마 이 새벽에 지금 저희 둘을 동시에 부르신 거예요?”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테오시스.
현재 황제의 몸속에 빙의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이었다.